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21화 (21/170)

< 약속 >

잠깐 험악해졌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 같다.

채희가 연기를 펼친 것을 기점으로 미팅의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하게 흘러갔고.

나 또한 그들과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나올 수 있었다.

“채희야, 진짜 잘했어. 어떻게 연습도 안 했는데 한 번에 이렇게 잘해?”

“···.”

“하하! 믿고 있었다고!”

“···진짜 조용히 해요.”

칭찬을 해주고 있는데 돌아오는 건 따가운 눈빛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이제 옛말이구나.

나는 쩝, 입맛을 다시고는 운전에 집중했다.

그리고 내가 입을 다무니, 차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한실장님이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는 예상이 간다.

채희를 보낸 다음에 내게 따로 주의의 말을 하며 혼내시겠지.

어쩌면 채희가 화난 이유도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결과적으로 잘 풀려서 다행이지, 만약 채희의 공포증이 더욱 악화됐다면?

나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의 분노는 저쪽을 향했을 것이다.

나로서는 그 일말의 가능성을 막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던 셈.

내 안위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채희를 위해서 나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나.

나는 앞으로 이와 비슷한 순간이 또 온다고 해도, 여전히 비슷한 선택을 할 생각이었다.

“채희야, 조심히 들어가. 오늘 진짜 최고였어!”

“오늘 수고했고, 내일 보자.”

나와 한실장님의 인사에, 채희는 한실장님에게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내게는 여전히 따가운 눈빛만을 줬고.

채희가 들어가자마자, 옆에서 길게 내뿜는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야, 박한울. 너 제정신이야?”

뭐, 예정된 수순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반성하고 있다는 듯한 모션을 취했다.

내가 뱉은 말은 ‘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와 같은 말들뿐.

한동안 나를 혼내시던 한실장님은 마지막에서야 내 어깨를 두드려주시며 당근을 내밀었다.

“그래도 그런 마음 자체는 나쁘지 않아.”

군대에 있을 때, 이런 거 많이 겪어봤는데.

아! 그리고 대학교 예비역 선배들에게도.

그리고 이럴 때면 늘 좀 더 끈끈해지는 유대감이 생기곤 했다.

지금의 우리처럼.

‘역시 회사도 다를 바 없구나.’

한실장님은 살짝 웃는 얼굴로 물었다.

“소주 한잔 할까?”

나도 마음 같아선 한잔 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안타깝게도 다른 볼 일이 남아 있었다.

‘아직 연습실에 있을지도 몰라.’

나는 한실장님과의 술자리를 다음으로 미루고는, 곧장 회사의 연습실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그리도 보고 싶었던 그 장면을 볼 수 있었다.

“···!”

댄스팀의 이름 모를 그녀의 노래.

그녀는 연습실에 홀로 남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점심 무렵.

곧 있을 뮤비 촬영과 컴백을 위해 송하연과 댄스팀이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을 때.

연습실 안으로 한 직원이 들어왔다.

연습실로 직원들이 자주 왔다갔다하다 보니, 모두가 개의치 않고 연습을 진행했으나.

식사 시간이 되자마자 그 직원은 댄스팀의 한 명에게 다가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신인개발팀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넉살이 좋아야 하는 신인개발팀답게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친절하게 말하는 그 직원에게.

그녀는 예의상의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댄스팀의 일원들과 송하연은 그녀의 사정을 모두 알기 때문에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배달을 시켰고.

한참 뒤에 연습실로 되돌아온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제 몫의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누군가의 질문에 그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솔로 아이돌 해볼 생각 없냐고 물으셔서 괜찮다고 했어요.”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

“춤 추는 거 보니까 재능이랑 스타성이 엿보인다고요.”

“어휴. 하여간 뻔한 말은.”

안 듣는 척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모두는 작게 혀를 차거나 실소를 내뱉었다.

이 바닥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는 다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찔러보듯이 접근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캐스팅하는 사람이 베테랑이건 아니건, 이 바닥에 몸담은 이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여기서 노래는 불러보지도 않았으며, 댄스팀인 자신들이 보기에 댄스를 그리 특출나게 잘 추는 것도 아니라서.

아마 예쁘고 귀엽게 생기고 춤도 어느 정도 되니까 찔러본 거겠지.

뻔할 뻔 자였다.

‘그러다가 안 되면 마는 거고.’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YU엔터에서 이미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현지야, 괜찮지?”

“네,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오랜 기간 몸담았던 YU엔터에서 걸그룹 데뷔조에 들지 못한 순간, 그녀는 아이돌의 꿈을 접기로 마음먹었었다.

“현지야. 집중해. 방금 거기 틀렸잖아.”

“네,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모든 미련이 다 정리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현지야! 또!”

점심 식사 후 다시 재개된 안무 연습.

유현지는 좀처럼 집중을 제대로 하질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따라가고는 있었으나, 평소의 유현지답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유현지의 사정을 모두가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걸 감안하여 모든 걸 좋게 좋게 넘어가줄 수만은 없는 시기였다.

특히 일에 있어서는 어지간히 깐깐하고 까칠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송하연으로서는 더욱이.

“잠깐만요.”

결국 송하연은 연습을 중단하고는 말했다.

“이제 뮤비 촬영이 코앞이고 컴백도 얼마 안 남았어요. 사연이 있는 건 아는데 오늘 안에 제대로 마음 정리하세요. 오늘 안에 못 털어낼 것 같으면 미리 말씀하시고요. 빨리 다른 분으로 바꾸게. 내일도 이런 모습 보이면 그때는 정말로 바꿀 거예요.”

그렇게 삐그덕거리는 연습이 몇 시간 동안 반복되고 모두가 짐을 챙기며 나갈 준비를 할 때.

송하연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유현지에게 말했다.

“말해뒀으니까 여기 남으셔서 좀 풀고 가세요. 그리고··· 본인을 위해서라도 미련 같은 건 빨리 털어내시는 게 좋을 거예요.”

냉정한 연예계.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치열한 세계.

이미 아이돌이라는 꿈을 접고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 미련 같은 건 방해 요소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가 빠져나간 연습실에 홀로 남은 유현지는 송하연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리고, 그녀가 해준 말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시원하게 풀어내며 미련을 떨쳐내기로 했다.

***

이름 모를 그녀의 허밍을 들으며 상상했던 소리였다.

기대했던 대로, 예상했던 대로, 확신했던 대로.

그녀의 노랫소리는 내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듯 깔끔하고 청량하며 순수하고 고왔다.

아니, 모든 걸 다 떠나서 그냥 매력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이 목소리에 숨겨진 잠재력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내가 그녀의 허밍을 듣고 바쁘게 옮기던 발걸음이 우뚝 멎었던 것처럼, 그녀는 목소리 하나로 대중들의 귀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재능이 좀 더 개화한다면··· 확실해.’

문득 재밌는 상상이 들었다.

호프집, 혹은 화장품 가게, 혹은 카페나 길거리.

그녀의 노래가 흘러나올 때, 여유 없이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귀를 쫑긋 기울이고는 가수가 누구인지 찾는 장면.

피식 웃음이 나올 만큼, 꼭 보고 싶은 장면이었다.

‘진짜 엄청난 재능이야.’

댄스 또한 마찬가지였지.

그녀는 아이돌이 될 수밖에 없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 전세계 팬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듯 보였다.

“···.”

노래가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

한껏 집중하고 있던 그녀는 거울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는 노래를 끊어냈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

나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내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얽히고 파생되는 갖가지 방법들과 상념들을 깔끔하게 지워냈다.

그저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을, 그녀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제가 그쪽 키우고 싶은데, 혹시 허락해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드립니다. 꼭 맡고 싶어서요.”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보탰다.

“그쪽처럼 재능 넘치는 분을 놓치기엔 너무 아까워서요.”

“아···. 감사합니다.”

그녀는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아까 안 하겠다고 다른 직원분한테 말씀드렸어요.”

“네, 그건 들었어요. 그래서 너무 아깝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이유 좀 알 수 있을까요?”

맑고 깨끗한 눈동자로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진짜 이 사람한테는 거짓말 같은 거 못할지도 모르겠다.

채희한테 하는 거랑 다르게 양심의 가책이 너무 클 것 같아.

아니, 거짓말뿐만이 아니라 이 사람 앞에서는 짜증이나 화도 절대 못 낼 것 같아.

“재능이랑 실력이 모자라서요.”

그런데 방금 전의 그 생각이 무색하게도.

나는 그 깨끗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얼굴을 기괴하게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대답이 말도 안 됐거든.

“···재능이랑 실력이 모자라다고요?”

“네.”

나는 그녀가 댄스팀에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YU엔터에서 길게 연습생 생활을 했던 것.

그리고 결국 데뷔조에 탈락한 것.

내가 봤을 때, YU엔터는 아주 어처구니없는 희대의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자기 주머니 속에 있는 보석을 끄집어내서 바닥에 버려도 이렇게 아깝지는 않을 텐데.

“그쪽 사람들 눈이 완전히 삐었네요.”

나는 그녀의 긴 사정을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일축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재능이 완전히 개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못 알아본 거겠지만.

뭐, 이런 경우는 이 바닥에서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긴 했다.

아무리 최고의 기획사라 하더라도, 훗날 최고의 스타가 되는 이들을 다 알아보지는 못한다는 말이지.

‘나랑은 다르게.’

이 경우엔, 그쪽이 운이 없었고, 내가 운이 좋았다고 보면 됐다.

아니, 능력 탓도 있겠지.

어쨌건 그쪽은 못 알아봤고, 나는 알아봤으니까.

“YU엔터가 눈이 삐었어요. 그쪽 재능 넘쳐요. 엄청나게.”

눈을 끔뻑이며 긴가민가하는 그녀에게.

나는 확신을 주기 위해 쐐기를 박기로 했다.

“제가 어제 연습실 들어와서 잠깐 구경하다 간 거 기억하세요? 사실 복도에서 우연히 그쪽 허밍 소리 듣고 홀린 듯이 따라간 거였어요. 그때 되게 피곤하고 바빴는데 허밍 소리 들리고 딱 발걸음이 멈춘 거 있죠. 그리고 다 같이 안무 맞추는 거 봤을 때도 제 눈엔 그쪽밖에 안 보였어요. 거기에 이제 노래까지 들어보니 더 말할 것도 없죠. 그쪽은 아이돌 하셔야 돼요. 그 재능으로는. 무조건이요.”

순하고 맹해 보였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역시 아직 미련이 남아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었겠지.

“제가 안목이 없어서 헛소리하는 게 아니에요. 송하연 가수님도 이번 앨범 작업할 때 제 말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하셨거든요. 저랑 좀 친한 거 보셨죠? 다른 이유가 아니라 제 안목 덕분이에요. 못 믿으실 수도 있으니까 지금 하연 씨한테 바로 전화해서 그쪽한테 확인시켜드릴게요.”

핸드폰을 들어 정말로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내가 꺼낸 핸드폰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여전히 힘이 없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현지예요.”

“네?”

“제 이름이요. ‘그쪽’이 아니라, 유현지예요.”

음. 사람이 한없이 착하게 보이고 말하는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도, 자기 의견이나 생각은 말할 줄 아는 사람인가 보다.

좋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 전 박한울입니다. 매니지먼트3팀이에요.”

그런데 다 넘어올 것만 같았던 그녀는 쉽게 승낙의 말을 내뱉지 않았다.

다만 약속 정도는 받을 수 있었다.

“제가 오늘 집중을 잘 못해서 많은 분들한테 피해를 드렸어요. 오늘 아티스트로 계약하면 또 그럴 것 같아서요. 혹시 이번에 계약된 활동 다 끝나고 다시 말씀해주실 수 있으세요?

이번 송하연 앨범 활동에 댄스팀으로서 같이 한다는 계약이 다 끝난 뒤를 말함이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계약을 서두르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분명히 약속하신 겁니다.”

나는 그녀에게 새끼 손가락을 내밀며 말했고.

그녀는 꾸밈없이 풀어진 미소를 지으며 마주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네.”

일단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애초에 계약이 오늘 무사히 성사됐었다 해도, 송하연의 앨범 활동이 끝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트레이닝을 시작하려고도 했었고.

나는 그녀와 손을 흔들며 헤어지고 나서 아버지께 메시지를 보냈다.

-아버지, 제가 회사보다 능력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 약속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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