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20화 (20/170)

< 최악보다는 차악 >

-네가 설명한 그 사람 연예인 계약은 안 하겠다는데? 설득하려면 네가 한 번 해봐.

이런 경우는 미처 상정해놓지 못했다.

나는 핸드폰에 띄워진 메시지에 시선이 못 박힌 듯 노려보았다.

내가 설득해야 하나? 어떻게? 거절한 이유는 뭐지?

이런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채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오빠, 뭔데 그래요?”

“아니야, 아무것도.”

나는 덤덤하게 대답하며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일단은 곧 있을 미팅이 우선.

송하연의 컴백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지금 당장 뛰쳐나가서 붙잡지 않아도 괜찮았다.

막상 뛰쳐나간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감도 잘 안 잡히고 있고.

“수상한데요?”

채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가늘게 뜬 눈으로 채희를 바라봐 주었다.

“아주 여유가 넘치는구나? 나 같으면 대본이라도 한 번 더 볼 텐데.”

“아!”

채희에게 코앞으로 들이닥친 미팅을 상기시켜,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그 뒤로 우리는 바쁘게 움직였다.

의상이나 메이크업 등을 준비했고.

제작사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도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작품 분석과 캐릭터 분석이 아직 완벽하지는 않았으니까.

“안녕하세요! 신인배우 정채희입니다!”

제작사의 회의실.

몇 명의 인원들이 채희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곳에, 채희와 한실장님, 그리고 내가 함께 들어갔다.

채희의 인사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반겨주었다.

여기에 오기 전에 이미 구선학 감독님의 얼굴은 익혀둔 바.

그는 우리가 앉을 자리의 맞은편 중앙에서 일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환대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감독 구선학이에요.”

이어서 작가와 제작사 대표, 그리고 카메라 감독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착석했다.

먼저 얘기를 꺼낸 건 제작사 대표.

“하하! 이번 웹드라마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신인이신데 정말 연기를 잘하시더라고요. 호평도 자자하고.”

그의 표정은 이미 저번 작품 첫 미팅 자리에서의 조수연 작가와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직 연기는 보여주지도 않았는데, 벌써 구세주를 바라보는 얼굴이라니.

우리도 얼떨떨한데 그 부담스러운 눈빛이 향하고 있는 채희는 얼마나 얼떨떨할까.

채희는 눈을 크게 뜨고 입꼬리만 잔뜩 끌어올리는, 무진장 부자연스러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속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누가 얘를 배우로 봐.’

전작의 연기가 큰 호평을 받고 있어서 다행이지, 누가 보면 연기를 요만큼도 못하는 애인 줄 알겠다.

그런데 이런 모습조차 그들에게는 순수하고 좋게만 보이나 보다.

구선학 감독은 이것저것 재거나 숨기지 않고 모든 일의 전말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제 고집 때문에 이 역할의 캐스팅 진행이 지지부진했습니다. 티는 안 냈는데, 저도 다른 분들이랑 마찬가지로 속이 타들어갔어요.”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그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그리고 여유 있게 말을 내뱉고 있었다.

속이 탔었다는 게 거짓말일 것 같다는 의심이 들 만큼이나.

“이것 때문에 작품이 도통 나아가고 있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캐스팅을 반려했을 때, 직원들 표정이 어찌나 울상들이던지. 하하. 저도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서 다 알고도 모른 척했던 거죠. 그런데 잠깐 동안 가진 쉬는 시간에 핸드폰을 보니까 우리 초등학생 조카가 정채희 배우 사진을 보내놨던 거예요.”

일의 전말을 비롯한 캐스팅 비화가 자세하게 이어졌고.

나는 마침내 그가 괜히 베테랑 감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컨트롤하는 거구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채희의 얼굴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풀려 있었다.

감독의 여유가 전염됐다고 해야 하나.

구선학 감독의 노하우를 엿본 것만 같았다.

그로 인해 그의 촬영 스타일 또한 짐작해볼 수 있었다.

아마 현장에서도 부드러운 방법으로 출연자의 긴장을 풀어줄 테고, 어느 일에 있어서도 과격한 방법은 지양하겠지.

덕분에 나와 한실장님의 마음마저도 놓이는 느낌이었다.

“아, 그럼 여기다가 사인하면 될까요?”

“네. 하하. 조카가 엄청 좋아하겠네요.”

결국 채희는 구선학 감독의 조카를 위한 사인까지 해주었다.

감독님은 정말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하고 이끌어가고 계셨다.

스텝들과 배우들을 이렇게 주도하니까 그렇게 씬과 캐릭터의 매력을 한계까지 뽑아낼 수 있었던 거겠지?

“우리 ‘헌팅 포차에서 만난 사이’라는 작품이 젊은이들의 감성을 노린 거기도 한데, 그렇다고 이삼십 대만 노린 작품은 아니거든요. ‘신수아’라는 역할이 장년층의 시선을 붙들 수 있는 요소라고 보시면 돼요. 그리 드라마틱한 효과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독특한 맛도 있잖아요.”

채희가 맡을 역할인 ‘신수아’.

깡촌에서 자란 그녀의 집엔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었고, 성인이 될 때까지는 핸드폰 또한 없었다.

물론 같은 동네의 가구들이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라서 냉동인간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버지 세대와 할아버지 세대까지 아우르는 아날로그적인 개성과 옛스러운 가치관들이 뜨문뜨문 묻어나야만 했다.

‘헌팅 포차를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이거지.’

실제 헌팅 포차를 가도 ‘신수아’에게 참고가 될 만한 것들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디테일 같은 건, 모르는 게 더 이득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구선학 감독님.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하고 상황을 이끌어가는 노하우가 많으신 분.

허나, 그것과 욕심은 별개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

씬에 담긴 매력과 캐릭터의 매력을 한계까지 이끌어내시는 분답게.

그는 지금의 이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끌어내려고 하셨다.

“잠깐 가볍게 몇 줄 정도만 읽어보실 수 있어요?”

“···네?”

채희의 고개가 내 쪽으로 홱 돌았다.

휘둥그레 커진 채희의 눈이 나를 향했다.

불과 1초 전까지 자연스럽게 풀려있던 그녀의 얼굴이 지금은 긴장과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어갔다.

“하하···. 아직 채희가 연습이 안 돼서요.”

한실장님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미 이 자리에서는 연기를 하지 않기로 말이 되었을 텐데.

감독님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참 별거 아니라는 어투로 일관하며 말했다.

“연기가 아니라 그냥 느낌만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아까 말했듯이 저희가 많이 불안해서 안심 좀 하고 싶어서요. 채희 씨, 몇 줄 읽어주는 정도는 해줄 수 있죠?”

제작사 대표나 작가, 카메라 감독 또한 감독의 말에 호응하는 분위기다.

얘기와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뭐 그 정도는···’이라는 가벼운 분위기로 이끌어가려 하고 있었다.

‘들은 말이랑 별로 다른 거 없네.’

연예계는 눈 뜨고 코 베이는 곳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사실 이렇게 핵심 제작진들이 모인 자리에서 느낌만 보는 정도는 가볍게 해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과연 정말 느낌만 보려 할까?

그들은 채희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펼치는 연기를 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굽힐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채희는 아직 공포증이 완전히 다 고쳐지지 않았으니까.

마음을 굳게 먹고 철저히 준비를 하고 선보여도 모자랄 판에, 연습이 아예 되지 않은 걸 선보이게 한다는 건.

‘아직 무리지.’

이러다가 나아지고 있는 공포증만 더 악화될라.

로드 매니저라서 잠자코 있던 나는 더 이상 거리낌없이 무례를 범하기로 했다.

어차피 무례는 저쪽이 먼저 범했는데 뭐.

“채희가 원래 준비를 철저히 하는 걸 좋아해서요.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하하. 이미 얘기가 된 거라 이 정도쯤은 이해해주실 수 있으시죠?”

똑같은 말투로 말했는데, 저쪽은 되고 이쪽은 안 되나 보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지고, 한실장님은 입을 떡 벌렸다.

“당신 혹시 로드 아닌가?”

제작사 대표가 눈살을 사정없이 찌푸리며 물었고, 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싱긋 미소 지으며 답했다.

“예, 맞습니다. 채희 매니저예요.”

막 험악해지려 하는 분위기 속에서, 채희는 불안하게 떨리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진짜 또-“

채희가 말을 하다가 만다.

‘또’ 다음에 뭐라고 하려고 했는데.

“응? 내가 또 뭐.”

채희는 내 물음에 답을 하지 않고,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는.

입술을 살짝살짝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눈에 익은 장면이다.

그 주문 같은 걸 외우는 건가?

‘설마 연기하려고···?’

자칫하면 공포증이 더 심해질 수도 있는데?

내가 눈치 채고 뜯어말리려 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채희가 먼저 입을 떼며 말했거든.

“해볼게요. 몇 줄 정도는.”

***

웹드라마의 첫 촬영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한실장님은 내게 채희의 케어를 담당하게 하며 이런 말을 했었다.

“공포증이라는 건 말이야. 심리적인 문제거든. 그리고 그런 건 차츰차츰 나아지기도 하는데 순식간에 고쳐질 수도 있어.”

“순식간에요?”

한실장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뱃재를 털었다.

바람에 휘날린 담뱃재가 셔츠 밖으로 존재감을 표출하는 불룩한 뱃살 위에 안착했다.

“에이! 쯧!”

나는 꾹, 웃음을 참고는 일부러 한실장님의 눈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뱃재를 털어내고는 다시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했지?”

“순식간에-“

“아! 그래, 순식간에 고쳐질 수도 있다는 거야. 서서히 심리적인 벽을 낮추다가 자기 스스로 뛰어넘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보다 더 싫은 상황이나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뛰어넘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도 있고.”

“최악보다는 차악이다, 뭐 이런 거요?”

“그래. 근데 아무래도 그건 좀 위험부담이 있으니까, 우리는 서서히 가는 쪽으로 하자고.”

***

나는 순간 고민이 들었다.

지금 그녀를 뜯어말려야 할까, 아니면 가만히 두어야 할까.

찰나 같은 시간 동안 두 선택지가 치열하게 부딪히고 있는 가운데.

내 머릿속엔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독 하얗고 오밀조밀 귀엽게 생긴 얼굴.

맹한 듯, 순한 듯, 순박하게 미소 짓는 댄스팀의 그녀.

‘···일단 지켜볼까.’

지금 채희의 바로 옆에 내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연습을 제대로 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연습을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만약 이게 성공하기만 한다면.’

곧바로 모든 공포증이 깔끔하게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증세가 훨씬 더 나아질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방금 전까지 조금은 짜증이 났던 감독과 제작진들을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채희 본인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저들이다.

당연히 우연히 이렇게 되었을 게 분명하나, 아무튼 우리에겐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상황.

나는 채희의 눈을 바라봤고.

채희는 다시 나와 눈을 맞추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본에 시선을 던졌다.

첫 번째 변화는 눈빛에서부터 나타났다.

경악, 충격, 경멸.

불가해의 영역을 마주한 듯한 눈빛.

그 다음으로는 표정, 그리고 전신에 이어 분위기까지.

그녀는 급하지 않게 차근차근 하나씩 몰입해갔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런 꼬라지가 실제로 존재하는 일이라고? 우와···. 내가 이 두 눈으로 이런 걸 볼 줄은 상상도 못했네. 진짜 서울은 놀랍다, 놀라워. 아주 놀랍기 짝이 없어. 우리 마을에서 저런 건 상상도 못한다니까. 저렇게 남사스럽고 추잡스럽게 다니면 그냥 그 순간부로 죽었다고 보면 돼.”

대본을 든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최대한 떨지 않으려 애쓰는지, 손에 힘을 바짝 주고 있는 것이 보인다.

대본 끝자락이 구깃구깃 구겨지고 있다.

힘겹게 이겨내고 있는 거겠지.

나는 속으로 그녀에게 무한한 찬사와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응원했다.

제발 그녀가 모든 공포증을 멋지게 이겨내서, 그 거대하고 찬란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으면 한다.

성장하고 성장해서 세상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한 최고의 배우가 되었으면 한다.

‘정채희 파이팅!’

***

‘진짜 또라이야!’

어떻게 로드 매니저가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채희가 원래 준비를 철저히 하는 걸 좋아해서요.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하하. 이미 얘기가 된 거라 이 정도쯤은 이해해주실 수 있으시죠?”

“당신 혹시 로드 아닌가?”

“예, 맞습니다. 채희 매니저예요.”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닌데, 저렇게 싱긋 웃고 있는 건 분명 일부러 그러는 거다.

채희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저 또라이의 뚜껑을 열어서 머릿속을 한 번 들여다보고 싶었다.

대체 무슨 깡으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럴 수가 있는 걸까.

‘불이익 받으면 어떡하려고!’

어쩌면 짤릴 수도 있다.

업계 최고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규모가 그리 작지만은 않은 제작사의 대표, 그리고 구선학 감독과 베테랑 카메라 감독,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재능 있는 작가.

이들과 얼굴을 붉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로드 매니저를 짤라버리는 게 기획사로서는 훨씬 더 합리적인 선택 아니겠는가.

채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해볼게요. 몇 줄 정도는.”

최악보다는 차악이다.

연습은 단 하나도 해보질 못했고, 여전히 두렵고 떨리지만.

그래도 자신의 매니저가 불이익을 받고 짤리는 것보다는 백 번 낫다.

‘진짜 완전 또라이!’

채희는 박한울을 노려보며 속으로 주문을 몇 번이고 외워댔다.

‘행운을 깃들게 해주는 또라이 부적이 내 앞에 있다.’

‘행운을 깃들게 해주는 진짜 또라이 부적이 내 앞에 있다.’

‘행운을 깃들게 해주는 완전! 또라이 부적이 내 앞에 있다!’

그리고 역시.

주문의 효과는 탁월했다.

< 최악보다는 차악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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