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9화 (19/170)

< 설득하려면 네가 한 번 해봐 >

내 문자에, 아버지는 가볍게 저녁이나 먹자며 이곳으로 나를 부르셨다.

나는 아버지가 알려주신 식당으로 향했고,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을 마주해야만 했다.

단정하게 잘 다려진 깔끔한 양복, 날카로움과 딱딱함이 공존하는 듯한 얼굴.

그리고 그 무엇보다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느낌을 풍기는 분위기와 눈빛.

아버지의 오른팔이자, 존경할 만한 상사라고 사내에서 소문이 자자한 김본부장님이었다.

나는 당황을 드러내기도 전에 허리가 먼저 깊숙하게 숙여졌다.

“매니지먼트3팀 박한울입니다!”

재밌는 장난을 성공시켰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시는 아버지.

본부장님과 달리, 체통이 너무 없어서 내가 다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대체 본부장님은 왜 우리 아버지 밑에 계시는 걸까?

“왔으면 앉아야지 서서 뭐해? 크흐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고 있는 아버지의 말에 이를 바득 갈고는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반쯤 사라진 참치회와 빈 소주병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어림짐작하기로, 둘이 마시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연락한 모양이다.

하여간 타이밍은.

“회사 생활은 할 만해?”

“네. 괜찮아요.”

나는 젓가락을 들고 큼지막한 회 두 점을 한꺼번에 집어먹었다.

본부장님이 계실 거라 예상하지 못했었기에 잠깐 당황은 했지만, 긴장은 되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이라면 몰라도 나는 긴장할 이유가 없지.

난 태연한 목소리로 본론부터 꺼냈다.

“아버지,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그리고 부탁도 하나 있고요.”

어차피 본부장님도 아실 건 다 아시겠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겠지.

아버지도 그래서 나를 이곳으로 부르신 걸 테고.

“짜식아. 숨 좀 쉬고 말해라. 앉자마자 본론이야?”

“굳이 천천히 할 필요가 뭐 있어요.”

음. 어쩌면 나도 높이 올라가면 아버지처럼 될지도 모르겠다.

체통 없이.

그게 편하긴 하겠지. 윗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거니까.

생각을 바꿔보면 이게 진짜 멋일 수도 있겠다.

“한잔 받아.”

아버지가 술을 따라주려 하자, 나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그냥 받기로 했다.

이곳엔 나와 아버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잘 보여서 안 좋을 리 없는 본부장님도 계시니까.

어쨌든 그렇게 본부장님께도 한잔 따라드리고, 몇 순배 돌고 나니.

그제서야 아버지가 물으셨다.

“그래서 말할 게 뭔데.”

나는 입안에 있던 회를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채희 차기작은 구선학 감독님이 연출하시는 작품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작품 얘기일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거기에 하나를 더 얹었다.

“그리고 송하연 가수님이랑 작업하는 댄스팀 중에, 여성분 한 명은 아이돌로 키우면 성공할 거예요. 이왕이면 솔로 아이돌로요. 우리 회사에서 꼭 잡아야 돼요.”

***

박한울은 예언이라도 하듯 말투와 목소리에 확신이 크게 담겨 있었다.

김본부장은 그 말을 듣고는 실소가 나올 뻔했다.

모든 업계가 그렇겠지만, 연예계에서는 특히 모든 일에 있어 100%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잘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고꾸라지기도 하는 반면, 여기저기서 무시 받던 이가 단번에 최고의 위치에 오르기도 하니까.

변수가 너무도 많고, 가끔은 그저 대중들의 변덕으로, 혹은 유튜브의 알고리즘으로 갑자기 뜨고 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울의 저 확신을 담은 말을 마냥 우습게 보기도 힘들었다.

‘전례가 있으니까.’

능력은 이미 증명됐고, 자신도 그가 능력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밀어줘야겠다고 생각도 했었는데.

‘솔로 아이돌이라고?’

솔로 아이돌, 그것도 남자 아이돌보다 팬덤의 화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여자 아이돌.

여성 솔로 아이돌이 얼마나 성공하기 어려운데, 대체 어떻게 그걸 저리도 확신한다는 말인가.

김본부장은 박한울의 능력을 한 번 더 시험해보고 싶었다.

이토록 어려운 일까지 성공시킬 수 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하게 내뱉은 저 말을 과연 증명할 수 있는지.

“그럼 한울 씨가 책임지고 한 번 키워보시겠습니까?”

박한울의 눈이 크게 떠지는 것도 잠시.

고심하는 듯 테이블에 꽂은 시선을 한동안 떼지 않았다.

“음···.”

박한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침음을 흘리며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눈이 반짝거리기도 하고.

아무도 재촉하지 않으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고심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아 끝이 났다.

“예, 할 수 있으면 제가 직접 키워보고 싶습니다.”

***

새로운 아티스트를 맡게 되는 게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때보다 이르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재능을 보고 참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 해야 할 것과 배울 것이 많아 눈앞이 깜깜하나, 차근차근 해가면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나 혼자 A부터 Z까지 다 맡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트레이닝을 해주는 트레이닝팀 선생님들도 계시고, A&R팀, 우리 매니지먼트3팀 등등 많은 조력자들이 함께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녀의 잠재력을 똑똑히 확인했으니, 조력자들과 함께 무럭무럭 재능이 만개할 수 있도록 거들기만 하면 그뿐이다.

‘아이돌이면 데뷔하는 데에 시간도 꽤 걸릴 거고.’

아직 채희 하나를 케어하는 것만으로도 이 한 몸이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그런데도 새로이 그녀를 맡아서 키우겠다고 대답한 이유는 하나였다.

아이돌은 데뷔를 하는 데 있어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리기 때문에.

그녀를 맡겠다고는 말했어도 곧바로 내가 뭘 해야 하는 건 없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긴 한데, 그녀의 잠재력을 직접 보고 판단한 결과.

그 엄청난 포텐을 어느 정도 터뜨리는 건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질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백 퍼센트 확신은 할 수 없지만.’

내가 갖고 있는 안목은 현재의 실력과 잠재된 재능을 꿰뚫어보는 것뿐이지, 어떻게 연습했을 때 어느 정도의 속도로 발전할 수 있는지 아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장점과 단점을 콕콕 집어주고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잡아주는 것 정도?

‘설마 실력이 순식간에 올라오겠어?’

사실 얄팍한 생각이기도 했다.

나도 실장님과 팀장님처럼 많은 아티스트를 맡고 싶었다.

그것도 엄청난 재능이 있는 사람들로만.

당장은 채희의 공포증 때문에 새로운 아티스트를 맡을 여건이 안 된다고 해도, 빠른 속도로 나아지고 있고 우리 모두 계속 노력하고 있다.

아마 그 사람을 맡아서 본격적으로 데뷔를 준비할 때쯤엔 채희의 공포증도 말끔하게 사라져 있지 않을까.

‘매력이 다른 사람들한테도 훤히 보이려면 최소한 1년쯤은 걸릴 것 같고···. 그때는 아마 채희도 나 없이도 잘 연기할 수 있을 거고, 그리고···.’

나는 속으로 나만의 계획을 세우며 집으로 향했다.

멀리는 채희와 댄스팀의 그녀를 슈퍼스타로 키우는 것부터, 가깝게는 내일 채희와 연습을 하는 것까지.

아무튼 한동안은 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예정이었다.

***

그녀가 우리 회사와 계약하는 건 오늘일 거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 로드 매니저인 내가 직접 그녀를 설득해서 계약하는 건 아무래도 걸릴 것이 많을 테니, 아버지와 본부장님께 부탁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트레이닝에 들어가게 되는 건 이번 송하연의 앨범 활동이 끝난 다음이겠지만, 그래도 저 사람을 만천하에 드러낸다는 게 불안하잖아.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가능성을 보고 채갈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 바로 접촉해보라고 말한 거였다.

‘기다리다 보면 알아서 소식 들려오겠지.’

내가 오늘 해야 할 건, 채희와 연습하는 것.

난 그것만 신경 쓰면 그만이었다.

“이번에도 본부장님이 골라주셨어. 이게 이번에 들어갈 작품이야.”

한실장님은 우리에게 대본을 내밀며 말씀하셨다.

내가 어제 말했던 구선학 감독님의 드라마.

“구선학 감독님이 연출하시는 거요? 이걸로 결정난 거구나!”

몰랐던 척하기도 참 힘들다.

난 슬쩍 채희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좋아하고 있었다.

이 작품을 이미 봤었기 때문이리라.

이것도 재밌을 것 같다고 말했었지.

“너희들이 열심히 읽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결정돼서 힘 빠질 수도 있는데, 의미없는 일이었다고는 생각하지 마. 나중에 다 도움이 될 거야.”

한실장님이 뽀글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씀하셨다.

멋쩍어 하시는 게 양심에 찔려서, 나는 일부러 입꼬리에 힘을 주며 더 끌어올렸다.

“아니에요. 이런 게 다 경험이죠. 그리고 이번 웹드라마도 본부장님께서 결정하셔서 잘됐잖아요.”

“맞아. 그만큼 본부장님도 채희를 신경 쓰신다는 거니까 우리한테는 좋은 일인 거야.”

내 어깨를 두터운 손으로 툭툭 두드리시며, 덧붙였다.

“미팅이나 오디션이나 아직 결정된 건 없으니까, 일단 천천히 연습이나 하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소회의실에서 나왔고, 채희는 내 소매를 잡아끌며 연습실에 빨리 가기를 재촉했다.

흥분과 기대가 되는 듯 환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오빠, 영화감독님이면 연출도 엄청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요즘은 드라마도 연출로 화제 되고 그러잖아요!”

“너한테 제의 들어온 거 받기로 한 거긴 한데, 아직 완전히 출연이 확정된 건 아니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하여튼 초 치는 데는 선수라니까.”

잠깐 내려갔던 채희의 입고리가 금세 다시 올라갔다.

나한테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그만큼 기분이 좋은 건지.

채희는 연습실 문이 닫힐 때까지 입을 가만 두지 않고 재잘거렸다.

“자, 이제 작품 분석 한 번 해보자. 한 번 읽어봤어도 이번엔 제대로 해야지.”

“네! 전 준비 됐어요!”

이 드라마의 제목은 <헌팅 포차에서 만난 사이>.

젊고 뜨거운 감성을 잘 녹여내고 있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미니 시리즈였다.

채희에게 제의가 들어온 역할은 여주인공과 함께 포차에 간 친구 역할.

남주와 여주의 서사에 윤활유가 되기도 하고, 서브 로맨스 스토리까지 담당할 여지도 있었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고, 연기와 연출이 받쳐주기만 한다면 이 서브 로맨스 비중도 커지겠지.

나는 그 부분에 있어선 전혀 걱정이 없었다.

내가 이 작품을 고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오빠, 근데 오빠는 헌팅 포차 같은 데 가본 적 있어요? 전 안 가봐서 디테일 같은 거 잘 모르겠는데.”

“그 핑계로 가볼 생각 하지 마. 그러다가 사진 찍히면 큰일 난다?”

“아니, 그 뜻이 아니라요! 가보셨으면 좀 알려달라는 거죠. 분위기는 대충 어떤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모르니까.”

물론 실제로 가보면 디테일이 더해질 수는 있다.

시청자들 중에 적지 않은 수는 이미 경험이 있을 테니, 디테일로 인한 어색함이 보이면 안 좋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연기가 평가절하될 수도 있고.

그런데.

“넌 신경 쓸 필요 없어. 캐릭터가 독특하니까.”

매력 있지만 참 어려운 캐릭터다.

채희에게 이 역할로 제의가 들어온 건, 웹드라마에서 ‘유나현’ 캐릭터를 잘 살렸기 때문일 터.

이번 작품 역시, 캐릭터만 잘 살릴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평범한 사람을 연기하는 거라면 남들처럼 실제와 비슷한 디테일이 필요할지 몰라도, 이 캐릭터는 남들과 많이 달라야 하거든.

“채희야, 이렇게 한 번 생각해봐. 치킨이랑 맥주 조합, 그리고 떡볶이랑 맥주 조합의 느낌이 다르잖아. 근데 사실 맥주의 맛은 항상 같단 말이지? 넌 그 맛만 잘 살리면 돼. 맥주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라니까? 떡볶이랑 치킨 같은 건 제작진들이나 다른 배우들 역할이야. 넌 딱 네 맛만 잘 살리면 돼.”

경악한 듯 채희의 입이 벌어졌다.

헛웃음이 새어 나오고, 경멸의 눈빛이 스친다.

“와···. 진짜 오빠 그걸 비유라고 드는 거예요? 제가 들어본 비유들 중에서 제일 구린 것 같아요.”

“그럼 헌팅 포차 가서 연예인 인생 말아먹든가.”

“안 갈 거거든요!”

비유가 구리든 구리지 않든, 어쨌든 알아먹기는 한 모양이다.

상황 자체를 보기보다는 캐릭터의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려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작품 분석과 캐릭터 분석을 1차적으로 끝낸 후.

우리는 바로 대본 연습에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 했다.

연습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한실장님이 말을 꺼내기 전에는.

“얘들아, 빨리 준비해야겠다. 아무래도 그쪽에서 몸이 달았나 봐. 지금 바로 만나고 싶대.”

“네!? 저 아직 대사 한 글자도 못 뱉어봤는데요!?”

채희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한실장님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런 채희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우리도 연기는 바로 보여주긴 어렵다고 말해뒀어. 그냥 미팅만 좀 하는 거야.”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한실장님.

하긴, 채희의 고질병을 잘 아는 우리 팀에서 대뜸 수락할 리가 없지.

연기를 안 보여주는 거라면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아, 그런 거구나.”

채희는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우리는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곧장 미팅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때.

내 핸드폰에서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

발신자는 우리 아버지.

메시지에 담긴 짧은 내용에,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네가 설명한 그 사람 연예인 계약은 안 하겠다는데? 설득하려면 네가 한 번 해봐.

< 설득하려면 네가 한 번 해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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