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8화 (18/170)

< 댄스팀의 세이렌 >

요 며칠간.

나는 대본들이 쏟아지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찔러보는 것도 많이 있었고, 그냥 대본을 뿌리는 경우도 더러 있었으니까.

혹시 모르니 그런 것들도 다 읽어봐야 했지만.

아무튼 작품을 적게 읽을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긴 했다.

채희의 앞으로 스케줄이 너무 많이 생겼으니까.

나는 작품을 빠짐없이 다 보며 채희의 차기작을 고르기도 해야 했지만, 엄연히 채희의 매니저다.

그것도 아티스트가 한 시도 떨어지길 원하지 않는.

나는 엄선해서 고른 그녀의 스케줄들을 모조리 다 따라가야만 했고, 우리 웹드라마의 20회가 업로드 된 지금까지 마땅한 대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밤을 샐 수도 없고.’

졸음운전을 하는 것보다는 대본 고르는 게 늦어지는 편이 백 번 더 낫지 않겠나.

무턱대고 내 몸을 혹사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빠! 오빠! 대본 보는 것도 좋은데, 이것도 한 번 봐봐요. 사람들 댓글 진짜 재밌게 남긴다니까요? 댓글 학원 다니는 것 같아요. 되게 센스 있어요. 그리고 요새는 이런 주접 댓글들이 유행이기도 하대요.”

10회 때부터 급격하게 핫해지기 시작했던 게, 20회가 된 지금은 거의 화산이 폭발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10대와 20대 초반에 한해서는, 우리 드라마가 지상파와 종편 드라마를 이겼다고 봐도 될 정도.

역시 내 안목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다들 본부장님 안목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아무튼.

‘이 정도면 웹드라마에선 역대급 성적이지.’

쏟아지는 기사들, 각종 커뮤니티에서 언급되는 횟수, 그리고 조회수와 ‘좋아요’ 숫자 등.

지금까지 웹드라마에서 이렇게까지 좋은 성적을 거두고, 이렇게까지 뜨겁게 화제가 된 작품은 없었다.

첫 번째 필모그래피의 초대박!

성적이 계속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고, 완결까지도 아직 4회나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드라마는 지금의 성적만으로도 벌써 웹드라마의 역사를 새로 쓰는 정도가 되었다.

“채희야. 다음 작품은 어떤 게 좋을 것 같아? 이번에도 그냥 잘 되는 작품 들어가고 싶어?”

화보 촬영장의 스텝들이 세트를 새로 꾸미며 생긴 짜투리 시간.

나는 화장대 앞 의자에 늘어지게 앉아서 물었다.

채희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난 세트로부터 시선을 돌려 그녀의 눈을 마주 바라봤다.

“왜 답이 없어? 그때랑 생각이 달라졌어?”

잠시 생각하는 듯 미간을 모으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작품이 잘 되는 것도 좋은데, 저번에 연기에도 좀 욕심이 난다고 했잖아요. 오빠가 계속 옆에 있으면 떨리지도 않으니까, 이제 작품만 잘 만나면 좀 더 실력 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실력 키울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

“네. 그렇다고 엄청 어려운 걸 하고 싶다는 건 아니고, 제가 잘 살릴 수 있는 걸 하고 싶어요. 뭔 느낌인지 알아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채희가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니까 이번 작품처럼 완성도 있고 생생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다는 거잖아. 그러면서 씬도 잘 살릴 수 있는.”

내 풀이에, 그녀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끄덕 격하게 움직였다.

아무래도 캐릭터를 살리는 재미에 푹 빠진 모양이다.

조건부이긴 하지만 공포증을 이겨낼 수 있게 됐고, 많은 사람들한테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도 조금 충족되니, 이제 연기 내적으로 욕심이 발을 뻗는 것이다.

‘좋은 변화지.’

연기 외적으로 욕심이 뻗는 것은 배우에게 그리 권장할 만한 건 아니었으니까.

특히 채희 같은 신인배우에게는 더더욱.

‘그리고 이번엔 좀 수준이 안 맞기도 했어.’

이번 작품에서 그녀와 실력을 견줄 만한 배우는 없었다.

다른 배우들을 이끌고 받쳐주긴 했어도.

그녀와 함께 시너지를 일으키며, 가진 에너지를 모두 쏟아내게 할 만한 배우는 없었다는 거다.

‘그러니까 이쪽으로 욕심이 생길 수밖에.’

그럼 이왕이면 규모 있는 작품이 좋을 것 같았다.

작품성도 있고, 대본도 좋고, 실력 좋은 배우들이 포진해 있을 만한 작품.

그도 아니면.

규모가 조금 작더라도 감독이나 작가가 작품에 욕심을 내서 기준이 높다든지.

‘참고해야겠네.’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계속 파보면 하나쯤은 나오겠지.

***

스케줄과 대본에 씨름을 하던 요 며칠.

마침내 나는 발견할 수 있었다.

채희의 요구사항에도 맞고, 내 눈에도 찰 만한 그런 대본을.

나는 대본 첫 장에 표기된 감독의 이름을 보며 미소 지었다.

“구선학 감독이면 충분하지.”

영화감독 구선학.

나는 방구석에서 온갖 컨텐츠들을 섭렵할 때, 그의 작품들을 모두 다 봤었다.

연기력이 없는 배우는 절대 쓰지 않으며, 한계가 있는 시나리오 속에서도 씬과 캐릭터가 가진 매력을 끝까지 뽑아내서, 결국엔 영화를 훌륭하게 만들 줄 아는 능력 있는 감독.

비록 드라마가 처음이라고 해도, 그의 장점과 능력이 어디 도망갈 리는 없었다.

‘거기다 대본도 좋아.’

구선학 감독에게 있어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것을 굳이 꼽아보자면, 그리 큰 매력이 없고 한계가 있는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 이 대본은 구선학 감독이 주가 되어 쓴 게 아니었다.

내 손 안에 있는 대본도 감독과 상의 끝에 수정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워낙 뼈대가 튼튼했던 건지, 아니면 수정할 것을 집어내는 능력만큼은 떨어지지 않는 건지.

아무튼 감독의 이름을 떼고 대본만 봐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 대본에, 연기력이 떨어지는 배우는 절대 쓰지 않는 구선학 감독의 특징, 그리고 그의 세련된 연출.

여기에 채희의 연기까지 더해지는 걸 상상해보면.

‘더 고민할 것도 없어.’

눈앞에 카타르시스가 선해서, 입매가 큼지막한 호선을 그렸다.

‘이걸로 해야 돼.’

대본을 읽다가 곯아떨어진 채희를 흘깃 보고는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말씀도 드릴 겸, 담배도 한 대 필 겸 해서.

몸은 천근만근인데 정신만은 또렷하다.

기대감이 가득하게 차오르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머릿속에 이 대본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서 복도를 걷고 있는데.

문득 귓가를 파고 들어온 소리가 빽빽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흐으음~”

익숙한 멜로디를 허밍으로 흥얼거리는 소리.

그 음색이 어찌나 좋은지, 내 머릿속을 헤집어 자리를 차지하고.

바쁘게 움직이던 내 발걸음까지 멈추게 만들었다.

내 시선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는데, 그곳엔 낯익은 인물이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댄스팀의 그녀.

하얗고 귀엽게 생기고, 유독 내 시선을 강제로 빨아들여서 기억에 남았었는데, 또 이렇게 보게 되었다.

그녀가 흥얼거리고 있는 콧노래는 송하연의 이번 앨범 타이틀곡이었다.

내가 랩을 넣어보라고 말해줬던 그 곡.

나는 제자리에서 멈춘 채로, 연습실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를 따라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귀는 이미 쫑긋 열려 한껏 집중하고 있는 상태.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짜릿짜릿한 느낌이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타고 올라왔다.

그녀의 피부만큼이나 깔끔하고 깨끗한 소리, 기본적으로 톤이 높아 가볍게 불러도 높이 올라가는 음정, 바쁜 발걸음을 강제로 멈추게 해서 집중시키는 매력.

그리고 무엇보다, 내 속에서 무언가가 팽팽하게 예민해져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쪼그려 연기하던 채희를 처음 봤던 때와 같이.

“···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그녀는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데.

나는 고개가 향하고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가는 건 조금 이따가.

지금은 발길이 향하는 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활짝 열린 연습실 문을 통해서 많은 인원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가까워질수록 더욱 크게.

그런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봐도, 그 여러가지로 뒤엉키는 소리들 가운데 내가 방금 전에 들었던 그 허밍 소리는 찾을 수 없었다.

또 듣고 싶은데. 아니 이번엔 허밍이 아니라 그냥 노랫소리로.

“어? 매니저님.”

결국 연습실 안까지 들어오자 송하연이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크게 뜬 눈이, 무슨 일로 왔는지 내게 묻고 있었다.

글쎄, 뭐라고 말해야 할까.

무턱대고 허밍 소리를 따라 들어왔다고 해야 할까.

그리스 신화에서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따라 스스로 물에 뛰어든 선원들처럼?

나는 이전에 했던 그녀의 제안을 떠올리고는, 임기응변으로 대답했다.

“완성된 음악도 듣고 싶고, 연습하시는 것도 보고 싶어서요. 조용히 있을 테니까 한 번 구경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내 말에, 동그랬던 그녀의 눈이 반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안 될 리가요. 만족하실 때까지 보셔도 돼요.”

나는 그녀의 허락을 받고 연습을 참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허락을 받고 자리를 잡아 다시 생각해보니, 이 연습을 본다고 해서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댄스팀이니까, 댄스를 하는 건 볼 수 있겠지.

가볍게 흥얼거리는 허밍 소리로 관심이 생겨버려서 사실 이 또한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그녀가 댄스팀이라니.

더 흥미가 생기는 느낌이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할까요?”

“네!”

“옙!”

송하연의 의욕적인 목소리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앉아있던 댄스팀이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이름 모를 그녀도 왼쪽 끝에 서서 자세를 잡는다.

나는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송하연의 음악을 좋아했던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신곡의 연습을 보는데 다른 이에게 집중하고 있다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막연한 기대감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곧이어 음악이 흘러나오고···.

나는 또다시 머릿속에 섬광이 번쩍였다.

애초에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송하연에게 시선이 뺏기겠지만, 적어도 내 두 눈은 저절로 송하연이 아닌 이름 모를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으니까.

아마, 그녀의 존재를 몰랐었더라도 나는 그녀를 인지할 수 있었겠지.

그저 시기상의 문제였을 뿐.

메인이 되는 송하연을 받쳐주는 댄서이기 때문에, 순간순간마다 생동감 넘치는 표정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으나.

나는 그녀의 얼굴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특별히 단독 안무를 하거나 튀는 안무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손끝과 발끝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까지도 마치 섬세하고 세련된 예술 작품을 보는 듯했다.

가능성, 잠재력, 포텐.

뭐라고 불러도 좋은 그것이 내 눈에 훤히 보이는 것을 넘어, 강제로 내 시야에 꾸역꾸역 들어오고 있었다.

하나도 빠지지 않고, 아주 자그마한 가능성까지 전부.

그렇게 한 번 타이틀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조롭게 마치고.

송하연은 연습실 한 구석에 서 있던 내게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보셨어요?”

그녀의 표정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럴 만하지.

이런 걸 보여줬으니 충분히 자신을 가져도 됐다.

내 시선을 빼앗은 건 댄스팀의 그녀였지만, 송하연 역시 매우 훌륭했고, 듣는 귀도 즐거웠으며, 실전 무대 또한 정말 기대가 될 만했으니까.

“엄청 좋던데요? 더 보탤 말이 없을 정도로.”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 위로 화사한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그래요? 다행이다.”

나는 이 연습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확인을 했으니, 이제 전달만 하면 그뿐.

아직 그녀의 노래를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건 좀 아쉽긴 해도, 그 허밍은 아직까지도 내 귓가에 생생하다.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지.’

연습이 재차 이어지고 있는 도중에, 나는 조용히 몸을 뺐다.

그리고 복도를 걸으며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하나는 아니고, 둘 정도.

< 댄스팀의 세이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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