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7화 (17/170)

< 이름 모를 댄스팀의 그녀 >

3팀의 한실장과 윤팀장은 오늘 하루종일 너무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전화를 끊으면 이미 연락 달라는 메시지가 남겨져 있고, 또다시 전화를 걸어 얘기를 나누다보면, 이메일이 와 있었다.

이것들을 모두 다 처리하려면 쉴 틈이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실장과 윤팀장의 얼굴에선 기분 좋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 대부분이 모두 채희를 찾는 것들이었으니까.

“이야. 진짜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이렇게 달라지냐. 하하!”

혀를 내두르며 말하는 윤팀장의 말을 한실장이 거들었다.

“그만큼 반응이 빠르다는 거죠. 우리 드라마 시청자 연령층을 봐요. 10대랑 20대 초반이 대다수잖아요. 그러니까 반응 퍼지는 게 빠를 수밖에 없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젠 나도 걱정된다. 이러다가 1년 안에 탑스타 되는 거 아냐? 하하하!”

그렇게 하루하루 뜨거워지는 반응을 이 바닥 사람들이 못 따라갈 리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바빠진 거고.

“한실장아. 어떻게 웹드라마 하나 잘 찍는 게 웬만한 미니보다 효과가 좋아? 벌써 화보랑 광고 제의도 몇 개나 들어왔다니까? 대본이나 시나리오는 말할 것도 없고. 이게 말이 되냐? 어?”

“말이 안 될 건 또 뭐예요. 다 채희가 연기 잘해서 그런 거지. 작품도 좋긴 한데 사실 이렇게 인기 좋은 건 다 채희 덕분이잖아요.”

커뮤니티, 그리고 SNS에서 퍼지고 있는 건 채희의 외모와 분위기, 연기였다.

채희 덕분에 이렇게 웹드라마가 큰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실장아, 나 다른 일 있어서 가봐야 하거든? 이 참에 한울이 데려다가 이런 것도 알려줘. 걔도 아티스트 케어만 하지 말고 일도 배우고 그래야지. 우리가 잘 키우기로 했잖아. 그놈 크게 될 놈이라니까.”

“아 진짜. 팀장님 도망가는 거죠?”

“도망은 무슨! 우리 팀이 채희밖에 없냐? 나 팀장이야, 팀장! 바쁜 몸이라고!”

윤팀장이 나가자, 한실장은 연습실에 채희와 함께 있던 박한울을 호출했다.

운전과 현장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많이 배웠지만, 이런 걸 배우는 건 처음.

박한울은 컴퓨터와 전화를 붙들며 열심히 일을 배워나갔다.

하지만 마음만은 이미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대본 보고 싶다.’

쏟아져 들어오는 대본과 시나리오.

일에 열중은 하고 있지만, 얼른 일이 끝나고 저 대본들을 살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것도 일이긴 하구나.’

뭐, 이제 와서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긴 했다.

그저 저 대본과 시나리오들 중에 좋은 작품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만 들 뿐.

한울은 일을 배워가며 퇴근 후를 기약했다.

이제 대본들을 모두 살펴보고, 괜찮은 걸 찾아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될 터.

야근이 매우 기대되는 날이었다.

***

퇴근은 했지만 굳이 대본들을 집에서 몰래 볼 필요까지는 없었다.

매니저가 대본을 보는 게 무슨 문제라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연습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나보다 먼저 대본을 살펴보고 있을 채희와 함께 살펴보기 위해.

얘도 자발적으로 야근을 하고 있는 거였다.

‘괜찮은 대본 많았으면 좋겠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채희가 있는 연습실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어?”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우리 회사의 에이스이자, 이제 곧 컴백을 준비하는 송하연.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지금 연습 중이신 거예요?”

그녀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과 티셔츠에도 땀을 흘렸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얼마 뒤에 뮤비 촬영 들어가서요. 댄스팀이랑 맞춰보고 있었어요.”

싱어송라이터라지만 그녀는 모든 무대를 혼자 기타만 들고 채우지는 않는다.

간단한 안무를 겸하기도 하고, 기타를 안 치기도 하고, 무대장치를 활용하기도 한다.

‘이번 타이틀이 좀 신나기는 했지.’

포크송도 아니고.

역시 무대를 댄서들과 함께 채우려나 보다.

“매니저님, 근데 왜 연락 안 하세요? 저번에 완성된 곡 미리 듣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했었는데. 저 너무 서운해요.”

과장되게 울상을 지으며 친근하게 장난을 걸어온다.

뭐, 그때는 매니저 제안을 거절했던 그 일이 채희의 귀에 들어온 다음이기도 했고, 한창 웹드라마 촬영 중이라서 바쁘기도 했다.

그 메시지를 채희가 우연히 본 게 연락을 안 한 가장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하하. 그동안 제가 좀 바빴어서요. 하연 씨도 이제 바쁘실 텐데 방해될 것 같기도 하고.”

“에이. 방해 안 되는데. 그럼 지금이라도 연습하는 거 잠깐 보실래요?”

요 앞에 채희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연습 구경하러 가라고?

그럴 수야 없었다.

채희가 신경 쓰이기도 하고, 대본을 살펴보기도 해야 하니까.

“아뇨, 괜찮아요. 발매되면 그때 뮤직 비디오랑 같이 완성형으로 들어볼게요. 그 편이 팬으로서 좀 더 와닿는 게 클 것 같기도 하고요.”

내 대답을 듣고 미소 지은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죽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혹시 지금 아실지도 모르고 나중에 듣게 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얼마 전에 저희 팀에서 본부장님한테 말씀드렸대요. 매니저님 저한테 잠깐이라도 붙일 수 없겠냐고. 그거 듣고 저도 한 소리 했었는데 그때는 저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소문이랑 말이라는 게 어떻게 어떤 식으로 퍼질 지 모르니까. 오해하지 마시라고요.”

전혀 몰랐던 일들이다.

그런데, 나를 두고 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구나.’라고 생각이 드는 정도.

‘우리 아버지가 대표님인데 걱정할 필요가 뭐 있어.’

게다가 본부장님도 나를 알고 계시는데 말이다.

최실장님의 요구는 애초부터 내 동의 없이 이뤄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냥 헛수고였던 셈이지.

“아, 그렇군요.”

“몰랐긴 했는데, 그래도 죄송해서요. 어쨌든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괜찮아요. 죄송해하실 필요 없어요.”

난 그런 것에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은 그저 ‘키우는 재미’에 빠져 있을 뿐, 사내정치나 채희 이외의 것은 내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부분들이니까.

‘낙하산이 좋긴 하네.’

마음이 편해서.

“하연아.”

그때, 우리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오다가다 몇 번 마주쳤던 분.

그는 우리에게 다가오며 나를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제 매니저님이세요. 이거면 확실히 제가 했던 말 증명되겠죠?”

송하연은 그 말만 남기고 몸을 돌려 멀어졌고.

남자는 나를 잠깐 쏘아보다가 하연의 뒤를 따랐다.

‘거 참, 쓸데없이 경계하시네.’

지금 내 머릿속엔 오직 채희밖에 없는데.

난 픽 웃고는 채희가 있는 아주 조그마한 연습실로 들어갔다.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본을 살필 시간이다.

“오빠! 왔어요? 이거 봐 봐요. 재밌는 대본 엄청 많아요!”

연습실에 들어가자마자 채희가 잔뜩 상기된 채로 말했다.

내가 봤을 때, 정말로 재밌는 대본들이 많아서 저렇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대본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재밌는 대본을 발견하는 건 의외로 엄청 어려우니까.

“이번 작품 때문에 대학생 역할 같은 것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른 역할도 많이 들어왔더라고요. 장르도 다양해요. 이건 스릴러 영화고요. 이건 로맨슨데 편의점 알바생으로 나와요. 그리고 이건 기자로 나오고요. 저건 주인공 소꿉친구로 나와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내게 설명을 빠르게 늘어놓는다.

자랑을 하는 건지, 영업을 하는 건지.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대본을 펼쳤다.

어차피 들어오는 모든 작품을 다 봐야 하니까.

아마, 오늘뿐만이 아니라 당분간은 매일마다 그 양이 늘어나겠지.

진흙 속의 진주를 찾는 것은 이전과도 같았지만, 다른 건 있다.

이 모두가 채희를 원해서 먼저 제의를 보냈다는 것.

그리고 전부가 웹드라마는 아니라는 것.

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채희를 원해서 먼저 보냈든 아니든, 성공할 작품을 골라야 하는 건 이전과 똑같았으니까.

채희가 흥분한 것과 달리, 실제로 차기작을 결정할 수 있는 나는 냉정하게 봐야 했다.

여기 있는 모든 작품들, 그리고 앞으로 들어올 모든 작품들도 내 눈에 찰 만한 작품이 안 들어올지도 모른다.

없으면 다른 곳에서 찾아야지.

선뜻 제의를 내밀었다고 추가점을 줄 필요는 없다.

“아니, 오빠! 왜 이렇게 대충대충 봐요! 좀 천천히 차근차근 천천히 정성스럽게 보셔야죠!”

그러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나는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거든.

될 작품과 안 될 작품을.

“채희야. 이건 대충 보는 게 아니라 속독이라고 하는 거야. 너 속독이 뭔 지 알지?”

“···저 바보 아닌데요?”

“그렇지? 난 또 네가 못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못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지. 그럼 조용히 하고 대본 마저 보자?”

대본의 페이지를 휙휙 넘기는 가운데.

얼굴 위로 꽂히는 따가운 시선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절대 대본에서 시선 떼지 말아야지.

***

언젠간 마주칠 거라 생각하긴 했다.

같은 회사니까, 그리고 둘 모두 회사에 자주 오가니까.

저번에도 이런 식으로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나.

오늘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둘 다 연습실을 쓰고 있었으니 마주칠 확률이 높을 수밖에.

허나, 그때의 분위기와 지금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채희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그땐 팬과 가수로 만나서 동경과 기쁨이 만연했다면, 지금은 껄끄러웠던 일을 상기하며 긴장을 끌어올리고 있다.

연기를 그렇게 잘하는 애가 이렇게 어색하고 경직된 표정이라니.

내 옆에서 인사를 한 채희가 살금, 반 걸음 앞으로 나서서 슬쩍 내 앞을 가로막았다.

다는 아니고, 한쪽 팔과 어깨를 살짝 가릴 정도만.

노골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 행동이 담고 있는 의미는 매우 노골적이었다.

나를 뺏어갈까 봐 경계하는 것.

예민하고 깐깐한 선배라면 이런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을 수도 있었겠지만, 다행히 송하연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머쓱하게 웃으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언제 한 번 사과드리려고 했었는데, 컴백 때문에 바빠서 신경을 못 썼네요. 그때 일은 죄송했어요.”

독불장군, 그리고 음악적으로 간섭하는 직원들에게 무척이나 깐깐하고 까칠하게 대한다는데, 나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선뜻 먼저 간섭하려 들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처음 봤을 때 팬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여튼, 서로 얼굴 붉히지 않을 수 있어서 우리에겐 그저 잘된 일이었다.

송하연의 소문은 그렇다 치고 채희도 사나운 면이 전혀 없어서, 서로 잡아먹을 듯 신경전을 펼치는 건 애초에 상상도 안 했었지만.

게다가.

‘나 때문에 신경전 펼친다는 것도 말도 안 되고.’

채희라면 모를까, 송하연은 그저 가볍게 제안한 것일 테니까.

아무튼 이렇게 복도에 서서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며 잠깐 쌓였던 벽을 허물어가고 있는 가운데.

송하연의 뒤쪽에 있는 사람이 문득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댄스팀이 분명한 사람들 중에 한 명.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저 너무 하얗고 오밀조밀 귀엽게 생겨서였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내 시선을 강제로 빨아들이는 듯했고.

그런데 내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나 보다.

댄스팀의 사람들이 내 고정된 시선을 따라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고, 그 약간의 변화로 하연은 물론 채희도 눈치 챌 수 있었다.

“오빠! 뭐하시는 거예요, 창피하게!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데!”

채희는 제 딴에는 작은 목소리로 나한테 주의를 주고 있었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들리게 말하기는 했다.

대체 목소리를 줄인 이유가 뭘까.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는 일이었을 텐데, 얘 때문에라도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냥 멍하니 있다가 보여서···.”

“오빤 그냥 조용히 있어요!”

채희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있는데, 댄스팀과 송하연의 얼굴에는 미소가 맺히고 있었다.

내가 쳐다봤던 그 여자를 바라보면서, 짓궂게.

그렇다고 뭐 나랑 핑크빛 기류가 흘러서 놀리고 있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었다.

그냥 저 사람의 반응이 재밌어서 그런 듯했다.

어딘가 맹하고 순하고 순박하게 미소 짓고.

선배들의 눈길을 일일이 마주보며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투명하게 깨끗한 속이 훤히 보이는 듯한 모습.

보아하니 막내인 듯한데, 선배들한테 이쁨을 많이 받는 것 같았다.

“여기 배달 왔어요!”

그때 직원의 말이 들렸고, 우연히 만난 우리는 그렇게 각자 가던 길을 걸었다.

댄스팀과 송하연은 연습실 밖으로, 나랑 채희는 배달원에게로.

저쪽은 밖에서 식사하고 오려나 보다.

우리는 자장면이랑 짬뽕인데.

“너 빨리 더 성공해라. 그래야 우리도 점심에 고기 구워먹지.”

“저기는 고기 먹는대요?”

“그러지 않을까?”

“뭐야. 모르면서 왜 아는 척해요.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감이란 게 있지 않은가.

감이라는 게.

나는 자장면과 짬뽕 그릇을 양손에 들고, 그들이 나간 문 밖을 쳐다봤다.

< 이름 모를 댄스팀의 그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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