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곡 듣고 싶으세요? >
웹드라마 <캠퍼스 낭만이 원래 이런 거야?>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2회로 예정되어 있던 것이 무려 그 2배인 24회로.
물론 한 회마다의 러닝타임은 예정되었던 평균 20분 그대로였다.
이러한 변화의 시작은 HJ엔터테인먼트의 투자.
그리고 소속 배우인 정채희.
이 두 가지가 이 웹드라마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감독과 작가, 조연출이 한 몸이 된 것처럼 욕심을 부릴 대로 부린 결과라는 것.
제작사도 그들을 믿고 투자를 또 여기저기 끌어들이며 소문이 나고.
그 소문은 또다시 포텐이 높은 배우들을 끌어들이는 선순환을 이뤄냈다.
심지어 아이돌까지 섭외됐으니 말 다 했지.
설령 그렇다 한들 규모가 규모이기에 그 선순환이 폭발적이라거나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정이 눈에 확 띄게 좋아진 것만은 확실했다.
작가의 건강 사정만큼은 이에 반비례했지만.
‘드디어···.’
조수연 작가의 눈두덩이를 다크 서클이 거무스름하게 뒤덮어, 빈말로라도 몰골이 멀쩡하다 할 수는 없었으나.
눈빛만큼은 투지 가득한 검투사처럼 형형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내 작품에 행운의 손길이 깃들었다.
욕심을 참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완벽하게 소화해줄 든든한 배우가 있다.
조수연 작가의 눈두덩이가 피곤에 찌들었어도,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운 이유였고, 눈빛에서 광선이 뿜어지고 있는 이유였다.
“조 작가. 표정이 너무 무서워.”
“괜찮아요, 감독님. 그리고··· 감독님도 저랑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요?”
“···내 다크서클은 훈장이지.”
“저도 그런 것 같아요.”
둘은 함께 으쌰으쌰 의욕을 불태우다 보니 좀 더 친해져 있었다.
비록 감독의 능력이 조수연 작가가 완전히 만족할 정도는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정채희 배우를 만나기 이전과 비교하면 훨씬 나았다.
의욕과 열정으로부터 나오는 힘을 무시할 수가 없으니까.
“아무튼 이번 거 진짜 열심히 해볼게. 지금은 웹드라마 감독이라도 이거 잘 되면 나중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나도 이제 좀 커리어에 욕심이 생긴다.”
그저 그렇고, 욕심 없던 피디조차 바꾸는 배우.
조수연 작가는 이 작품 모든 면에 있어서 행운을 가져다준 정채희 배우의 연기를 한 시라도 더 빨리 보고 싶었다.
리딩의 시작 시간은 정해져 있었지만,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시작한 리딩.
모든 이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한 리딩실엔 어느 순간부터 기이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남자 주연배우를 맡은 아이돌 ‘인혁’도, 시기질투의 시선으로 은근히 무시하던 조연배우들도, 기대에 찬 눈으로 지켜보던 작가와 감독, 스텝들도.
모두 침을 꿀꺽 삼키며 지금 대사를 내뱉고 있는 채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민? 딱히 그런 거 없는데? 기대가 낮은 걸 수도 있고, 기준이 낮은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진짜 불행한 사람들을 보면서 위로를 얻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그런데 고민은 없어도 열심히는 살아보려고. 그러다 보면 좀 더 좋은 세상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채희의 뒤에 있지 않았다.
채희의 맞은편.
그녀가 고개를 들면 바로 보이는 정면에 서 있었다.
대사를 마친 채희가 고개를 슬쩍 들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씨익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채희의 눈이 다시 대본을 향한다.
이런 과정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반복됐는지 모른다.
나, 아니면 대본, 이 둘 말고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 걸로 봐서는 혼자 필사적으로 최면을 걸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곳엔 우리 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나름대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셈이다.
얼마 전이었으면 이렇게 하는 것조차 말도 안 되게 힘들었을 텐데, 지금은 이렇게나마 할 수 있게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것 봐라.
다들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 본실력이 다 나오지도 않았거늘.
오늘이 최대 고비였는데, 다행히 잘 풀려가고 있다.
오늘이 지나면, 이들은 ‘이미 연기를 보고 좋게 평가한 사람들’이 되니까.
촬영에 들어간 순간, 적어도 이들 앞에서는 한결 더 연기하기가 편해질 것이다.
‘근데 대체 저 주문은 뭐지? 한 번 물어봐야겠다.’
중간중간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대체 뭐라고 중얼대는지 모르겠다.
주문이 그렇게 효과가 좋은가?
아무튼 그녀가 잘하는 모습을 보여줄수록 내 기분 또한 무척이나 고조되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주먹에 힘이 들어가며, 어깨가 펴지고, 입술을 혀로 핥게 된다.
제발.
얼른 촬영이 시작되고, 영상이 올라갔으면 좋겠다.
이 모습을 세상 사람 모두와 공유하고 싶어.
‘아이돌도 있으니까 초반 조회수에도 불이 붙겠지?’
몇 시간이 지나며 종반으로 향해가는 리딩.
채희가 조금씩 긴장이 더 풀리고 편안해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리딩실의 열기는 뜨거워져만 갔다.
배우들이라 해봤자 모두 다 신인.
그리고 작가도 신인.
이곳에 모인 대부분이 패기와 열정, 욕심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그런지 자극에 불이 확확 잘 붙는 모양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열정이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신인들이 서로 부딪히고, 얽히고 엮이며 내는 싱그러우면서도 뜨거운 공기.
마침내 리딩이 모두 끝났을 때.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서로를 돌아보며 박수를 치던 그들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하는 종착지는 한 곳.
정채희.
바로 내 배우의 얼굴이었다.
***
내가 고른 배우답게 리딩 현장을 싸그리 발라버린 채희.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잘했다는 보상 겸 앞으로도 힘내달라는 격려의 당근이지.
사실 그리 비싼 것도 아니고, 편의점에서 파는 일반적인 아이스크림인데도 효과가 아주 만점이다.
“맛있어?”
“네! 최고예요!”
나는 참 잘도 먹는 그녀에게 그간 궁금해했던 것을 물었다.
“채희야.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너 항상 하는 주문 같은 거 있잖아. 그거 뭐라고 하는 거야?”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던 채희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비밀이에요. 그거 효과가 점점 강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저만 알고 있어야 돼요.”
“···.”
“그렇게 게슴츠레한 눈으로 봐도 소용없어요. 정말 이제 주문 효과가 너무 세서 절대 버릴 수 없거든요.”
“근데 그걸 나를 보면서 한단 말이지? 설마··· 내 욕하는 거냐?”
“···!”
부드럽게 휘어졌던 그녀의 눈이 순식간에 동그랗게 커졌다.
역시, 내 욕하는 거였어.
어쩐지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하더니.
“하! 어이가 없네.”
“아니에요! 오해예요! 진짜 오해하지 마세요. 갑자기 욕이라고 하니까··· 놀라서! 놀라서 잠깐 놀란 거였어요!”
“놀라서 놀란 거였다고?”
“네! 정말요. 믿어주세요!”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그래. 욕을 하든 말든 긴장이 풀리면 그걸로 됐지.
조금 괘씸하긴 해도,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나를 향한 신뢰가 얼마나 큰 지, 그리고 그녀가 지금 내게 얼마나 의지하는지는 익히 알고 있으니까.
내게 호의가 가득하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지.
이것만큼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고, 언제나 항상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괘씸한 건 괘씸한 거고.’
하고 많은 방법 중에 감히 그런 식으로 긴장을 풀어?
“채희야, 너 내일부터 운동도 좀 하자. 내일 실장님한테 말씀드려볼게. ‘유나현’ 캐릭터는 힘들고 열악하게 살았는데 네 몸은 너무 온실 속 화초에서 자란 것 같잖아. 흐물흐물해. 이러다 팔뚝살이 팔꿈치 타고 손목까지 흘러내리겠어.”
“와! 진짜 말이 너무 심하시네요! 아무리 욕했다 해도 그렇지!”
“어? 오해라며. 진짜로 나 욕한 거였어?”
“아···니요···?”
“운동할 거지?”
마지못해서 어쩔 수 없이.
너무나도 처량한 표정으로.
“···네···.”
그녀는 아주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행운을 깃들게 해주는 또라이 부적이 내 앞에 있다.”
언제 어디서나 잘 먹히는 주문.
점점 더 강력해지기만 하는 주문.
그러나 이젠, 이걸 약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행운을 깃들게 해주는 완전! 또라이 부적이 내 앞에 있다.”
그냥 또라이가 아니라 ‘완전’ 또라이가 틀림없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좋은 사람인 것 같기도 한데, 또 어떨 때 보면 얄밉고 얄미워서 한 대 쥐어박고 싶기도 하다.
격변해가는 일상 속에서 가장 의지되는 사람이 하필이면 그 또라이라니.
정채희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꼭 마음에 들었다.
역설적이지만 사실이 그런걸.
촬영 시작까지 딱 하루밖에 남지 않은 오늘.
채희는 연습실 복도를 걷던 도중 어느 한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데뷔 때부터 팬이었던 싱어송라이터.
HJ엔터에 들어오면서 가장 보고 싶었던 가수.
송하연.
채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악!”
“···?”
미간을 구기며 걸음을 옮기던 송하연의 시선이 채희의 얼굴로 향했다.
제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막은 채희는, 계속되는 송하연의 시선에 겨우 말을 꺼냈다.
“저··· 신인배우 정채희라고 합니다. 선배님, 정말 팬이에요!”
구겨져있던 송하연의 미간이 펴지고, 만면에는 훈훈한 미소가 번졌다.
“아, 네. 반가워요. 신인배우세요?”
“네! 3팀에 들어왔어요! 정말 너무 팬이에요!”
하연이 웃으며 받아주자, 본격적으로 호들갑을 떨며 좋아하는 채희.
송하연은 이런 팬들을 볼 때마다, 다운됐었던 기분이 한방에 올라가는 마법을 겪곤 했다.
이렇게 좋아해주는 팬들 때문에 더욱 퀄리티에 집착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팬들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그리고 이런 반응을 계속해서 보고 싶어서.
“저 이번에 웹드라마 들어가요! 내일부터 촬영이고요. 앞으로 정말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허리를 완전히 접어버리며 인사하는 채희를 보면서, 하연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영악하지 않고 순수한 신인은 언제나 보는 재미가 있다.
게다가 자신의 팬이기도 하니 더더욱.
방금 전에 본부장님에게 불려가 따끔하고 진심 어린 말을 들어서, 기분이 복잡하고 짜증나고 다운됐었는데, 이제는 정말 기분이 좋다.
이런 팬에게 선물을 해서 더 좋아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정말 기분이 더 좋아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작업에 도움이 될지도?
그래서였다.
정채희에게 이런 말을 건넨 것은.
“그럼 응원의 의미로 한 곡 정도만 들려드릴까요?”
“어···? 네···?”
“연습실 가자고요. 거기서 라이브로 한 곡 들려드릴게요.”
“헉!”
입을 떡 벌리며 굳은 채희.
“하하! 내일 촬영이신데 제가 방해했나요? 아니면 다음에 들려드릴-“
“아뇨! 아니에요! 정말 듣고 싶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연은 서슴없이 채희의 팔을 붙잡고 연습실로 이끌었다.
뚜벅뚜벅, 삐걱삐걱.
흥이 오르는지 콧노래까지 부르는 하연과 달리, 채희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끝없이 의심하며 걸음을 옮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연습실.
송하연은 연습실 중앙에서 기타를 멘 채로 물었다.
“어떤 곡 듣고 싶으세요?”
질문에 대한 답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거의 자동 수준.
“푸르른 하늘에게!”
“아, 푸르른 하늘에게요?”
이 노래 역시 인기 많은 곡들 중 하나.
채희가 감격스럽게 쳐다보는 가운데, 하연은 망설임없이 기타를 튕기려 했다.
그런데 그때.
연습실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불쑥 들어왔다.
남자는 황당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채희에게 물음을 던졌다.
“정채희, 너 여기서 뭐하냐?”
“아, 오빠! 제발 부탁인데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저 지금 진짜 중요한 순간이란 말이에요!”
“중요한 순간은 촬영 시작인 내일이고.”
하연은 둘의 대화를 통해, 안면 없던 그가 매니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안면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신입임이 분명했고.
“채희 씨 매니저님이세요?”
하연은 그에게 말을 건넸고.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당당하게 막 들어왔던 것처럼이나, 신입 로드답지 않은 당당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네, 안녕하세요. 채희 매니저 박한울입니다. 죄송해요. 관리를 못해서 송하연 가수님 연습하시는데 방해를 끼쳤네요. 바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아뇨. 제가 데려왔어요. 응원의 뜻으로 한 곡 들려드리고 싶어서. 그래도 되죠?”
“아, 그런 거라면···. 네, 그럼요.”
문이 닫힌 연습실.
송하연은 다시 기타를 잡았고, 그렇게 관객은 두 명이 되었다.
< 어떤 곡 듣고 싶으세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