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6화 (6/170)

< 첫 번째 작품 >

채희의 연습을 봐준 나는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버지는 약속대로 내가 대본을 직접 고를 수 있게 지원을 해주셨다.

내 방에 쌓인 A4용지의 산.

나는 잠시 그것을 망연하게 쳐다보다가 물었다.

“아버지··· 무슨 대본이 이렇게 많아요?”

“대본만 있는 건 아니고. 시놉이랑 트리트먼트만 있는 것도 섞여 있어. 혹시 몰라서 다 긁어와 봤다. 우리가 건들면 메이드 될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웹드라마잖아. 이쪽에 요즘 공급이 엄청 많아.”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나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그래. 후보가 많으면 좋지, 뭘.’

어쩌면 저 미완성의 것들 중에 황금이 있을지도 모르고.

이게 다 나와 채희를 위한 일이다.

시작은 조금 피곤하고 고달플지라도, 이게 다 나중에 편안하고 안락한 성공의 삶으로 되돌아올 터.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산꼭대기 위에 있는 것부터 펼쳐봤다.

며칠 동안 잠 좀 줄이면 바닥에 있는 것까지 읽을 수 있겠지.

그러나, 황금은 그리 쉽게 찾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대본이 없는 이유가 있네.’

이것도,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그리고 저것도.

이 정도면 의심이 든다.

그냥 내가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으셔서 일부러 이렇게 많이 가져오신 거 아닐까?

회사에 이만큼 많이 쌓여 있었을 리도 없고.

정말로 현재 나와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싹싹 긁어 오신 것 같다.

폐기된 것들까지 모조리 끌어모아서.

‘음. 이건 좀 다듬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 이것도 나쁘지는 않네.’

그러다가 차츰 원석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재능의 편린이 얼핏 보이는 수준, 혹은 신인의 번뜩임이 한두 개 정도만 보이는 수준.

그렇게 얼마나 더 읽었을까.

눈꺼풀이 무거워져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덧 출근까지 5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내가 읽은 것과, 아직 읽지 않은 것들을 비교해봤다.

‘많긴 진짜 많네···.’

나는 그 아득함에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하루이틀로는 안 될 것 같으니, 일단 지금은 좀 자야겠다.

***

일주일을 고생한 결과, 나는 하나의 보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숫제, 포장으로 가려진 수준.

그 포장 속에는 반짝반짝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이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 작가님···. 친해져야겠네.”

나는 아버지께 즉시 말할까 하다가, 채희와 먼저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 그녀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됐지만, 그래도 취향이라는 게 있고 의견이라는 게 있으니까.

회사에 출근해 연습실에 들어가니, 여지없이 채희가 먼저 와 있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품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에, 기대감으로 잔뜩 부푼 채희.

요즘은 정말 열정을 활활 불태우며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다행이도 고질병에 대한 걱정보다는, 곧 데뷔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커서 그런지 분위기가 밝기만 하다.

얘는 그렇게 많이 연습하면서도 안 지치나?

나는 몸뚱어리가 천근만근인데.

“채희야. 요즘 작품 검토하고 계시잖아. 그런데 혹시 개인적인 의견 같은 거 없어? 이런 작품은 하기 싫다든지, 이왕이면 이런 작품을 하고 싶다든지.”

채희는 고개를 홱홱 저으며 단언하듯이 말했다.

“그런 거 없어요. 일단 뭐라도 좋으니까 이 고질병부터 없애고 싶어요. 지금은 경험이 우선이잖아요. 신인이기도 하고 특히 저 같은 경우에는 더요.”

“그래도 아무거나 막 할 수는 없잖아. 너도 선호하는 게 있을 거고.”

“이왕이면 작품이 잘 됐으면 좋겠는 정도? 취향이나 개인적인 욕심 같은 건 나중에 부려도 늦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뭐 가릴 처지도 아니고. 그냥 지금은 아무거나 좋으니까 빨리 하고 싶어요.”

고질병이 아직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차도가 없는 게 아니다.

한실장님이나 윤팀장님, 그리고 다른 분들도 가끔 오셔서 참관하셨으니까.

뭐, 나야 계속 여기에 상주해 있었고.

아무튼 점차 나아지고 있으니, 그동안 억눌렸던 욕심이 더더욱 폭발하는 모양이다.

신인의 열정과 패기, 뭐 이런 거?

그 열의 덕분에 그녀의 재능도 점차 뚜렷하게 잡히며, 실력도 꽃을 피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없이 나 혼자 있을 때는 정말 감탄밖에 안 나온다.

차라리 그냥 내가 감독을 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 만큼.

“그래? 일단 뭐라도 좋으니까 경험을 쌓고 싶다 이거지? 이왕이면 잘 되는 작품으로.”

“네.”

그렇다면, 뭐 끝났지.

나는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 바로 톡을 보냈다.

[아버지. 채희 이번 작품 <캠퍼스 낭만이 원래 이런 거야?>로 밀어주세요. 유나현 역할로.]

10대와 20대를 모두 타켓팅한 작품.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새내기들의 청춘을 그린 드라마.

이 작품에서 ‘유나현’ 역할이 채희한테 딱이지.

여주인공 ‘유나현’.

이 작가는 다른 것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도 캐릭터, 그중에서도 여주인공의 매력을 기가 막히게 끌어낼 줄 알았다.

이걸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신인 중에선 우리 채희밖에 없을 거라고 본다.

***

HJ엔터테인먼트의 대표실.

두 남자는 조용히 대본을 넘기고 있었다.

이목구비의 선이 굵어 호방함이 엿보이는 박호진 대표.

그리고, 눈매가 날카로우며 대단히 깔끔하고 정갈한 옷차림 때문에 깐깐하고 까다로워 보이는 김본부장.

둘은 외모와 분위기에서 큰 차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둘 다 잔뜩 집중한 얼굴로 대본을 상당히 신중하게 읽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검토가 끝나고.

먼저 대화의 포문을 연 건 박호진 대표였다.

“어때? 내 아들 눈 쓸 만하지?”

아들과 관련된 여러 가지 혜택을 말했을 때와는 달리, 한껏 의기양양해진 목소리.

씨익 웃으며 건네는 물음에, 김본부장은 대답 대신 미간을 찌푸리기만 했다.

“이제 슬슬 인정해. 나라고 괜히 그런 줄 알아? 나도 회사 망치기 싫어.”

“···거짓말하지 마시죠. 안목은 그럭저럭 쓸 만한 것 같은데, 원래는 대표님도 아드님이 안목 있는지 몰랐잖습니까.”

박호진 대표가 아들을 낙하산으로 꽂을 때는 김본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로드 매니저니까.

티를 내지 않고 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도 걸었으니, 어느 정도 납득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입사 첫날부터 만장일치로 탈락한 지원자를 멋대로 합격으로 돌려버리는 행동은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김본부장은 화가 났지만 박호진 대표가 볼멘소리를 하자, 한숨을 쉬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자식에 대한 고민을 자신에게 수도 없이 털어놨었으니까.

원칙상 절대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러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늘어져 있던 박호진 대표의 어깨는, 며칠 되지 않아 깔끔하게 원상복구됐다.

정채희가 연기하는 걸 찍은 동영상 하나로.

그리고 그 아들이 고른 대본까지 다 읽은 지금은 아주 어깨가 천장까지 솟구칠 기세였다.

둘 모두 어느 정도 안목이 있었기에, 이게 보석인지 아닌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

“거 봐! 내가 괜히 그런 게 아니라니까? 정채희도 연기 얼마나 잘해! 무대 공포증도 엄청 빨리 극복하고 있고.”

“···.”

“안목이 증명된 인재한테 작품 하나 맡기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게다가 딱 고른 것도 가능성이 훤히 보이잖아. 시놉이랑 트리트먼트까지 내가 얼마나 많이 가져갔는지 봤지? 그 많은 것들 중에 하나 고른 게 이거라고! 이건 운이 아니라 재능 맞지?”

김본부장은 어금니를 으득, 씹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이제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아직 배우도 불안한 점은 남아있고, 작품이 잘 된 것도 아니니까요.”

“대신 작품 결과까지 잘 나오면 그때는 얘기가 다른 거 알지?”

그 말엔 김본부장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때쯤이면 우연이 아니라는 게 증명되는 거니까.

만일, 원칙에 어긋나도 회사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면.

오히려 대표가 말려도 자신이 먼저 그만한 힘을 실어주리라.

“우리 아들이 진짜 보통 천재가 아니야.”

분명, 단순한 아들 바보일진데, 그 아들의 능력이 매우 출중하다고 밝혀진다면.

그건 더 이상 제 새끼를 예뻐하는 고슴도치의 사랑이 아니게 된다.

“만약 잘 안 되면, 그땐 정말 더 이상의 특혜는 없는 겁니다.”

“알았다니까 그러네.”

박한울의 미래를 건 소소한 내기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

한실장님과 윤팀장님, 그리고 나와 채희는 소회의실에 모여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대본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본부장님이 이걸로 하라고 하셨다고요? 갑자기?”

평소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지 않았다.

이들이 충분히 토의를 마친 끝에 몇 개의 후보를 추려 보고하면, 본부장님, 홍보팀과 함께 상의하며 결정하는 과정.

이번에는 그 과정을 모조리 엎어버리고, 일방적인 방향의 소통만 이루어졌다.

“아니 뭐··· 본부장님이라면 분명 뜻이 있으시겠지만···.”

한실장은 의아한 기색을 드러낼지언정 반발심은 일어나지 않았다.

본부장님이 회사를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평소에 얼마나 공명정대하며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지 잘 아는 까닭이었다.

그러니 이번 결정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하며 의아해할 뿐이었다.

“뭔가 소스가 있었겠지. 어디서 투자금이 크게 들어오게 됐다든지, 아니면 배우로 짱짱한 아이돌이 들어온다든지.”

“그런데 그 소스를 우리한테도 숨기셨다? 쓰읍···. 팀장님, 그냥 사실대로 말해봐요. 저한테 뭐 숨기는 거 있으시죠.”

“없어, 인마.”

“···.”

“그 눈빛은 뭐야. 나만 본부장님한테 듣고 너한테 숨겼을까 봐? 아니, 진짜로 없다니까?”

“예, 예. 그러시겠죠. 이 참에 그냥 확 팀이나 옮겨버릴까.”

둘이 옥신각신하거나 말거나.

채희의 시선은 대본 위에 완전히 못 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꼴깍, 침이 넘어갈 정도로 그녀는 지금 대본을 읽어보고 싶어 안달복달 못하는 중이었다.

“야, 이상한 의심 같은 거 하지 말고 일단 읽어나 보자.”

윤팀장님의 말에 한실장님은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대답했다.

“예에. 근데 팀장님은 한 번 더 읽는 척 안 하셔도 돼요. 굳이 피곤하게.”

사실 한 번 더 읽는 척하는 건 난데.

나는 대본을 읽는 척하며 채희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대놓고는 아니고, 힐끔힐끔.

그녀는 눈 깜빡이는 시간마저도 아깝다는 듯, 부릅뜬 눈으로 대본을 탐독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대본을 다 읽었을 때.

채희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구나.’

다행이다.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설령 성공할 작품이라 해도,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억지로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천재적인 재능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강제해서 나타나는 게 아니니까.

“이거 좀 밋밋한 거 같지 않아? 본부장님이 왜 이걸 고르셨지?”

윤팀장님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보는 눈이 없나 보다.

“스토리는 밋밋해도 캐릭터는 괜찮은 것 같은데요? 특히 여주인공이 괜찮네.”

“뭔 소리야. 캐릭터들이 뭔가 팍팍 튀는 게 없잖아. 이건 연기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지 않으면 절대 못 살려!”

둘의 말 모두 맞는 말이다.

연기력이 뒷받침돼야 진짜 빛을 볼 수 있는 캐릭터들.

‘적어도 여주인공은 걱정할 필요 없지.’

그렇기에 더욱 채희가 이 역할을 해야 한다.

그녀의 연기력이라면 이 캐릭터가 아주 눈부시게 빛을 뿌릴 수 있을 테니까.

“오빠는 어땠어요?”

채희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가 여주 하면 최고일 것 같은데? 다른 캐릭터들보다 여주인공 캐릭터가 존재감이 커서, 다른 배우들이 그렇게 잘하지 않아도 사람들 시선 잡아놓기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이 작품은 스토리로 가는 게 아니라 캐릭터로 가는 거니까.”

“그러니까 저만 잘하면 된다는 거죠?”

“응. 그렇다고 주인공병 걸리지 말고.”

“아니···! 그냥 부담 갖지 말라고 따뜻하게 말해주면 되지, 맨날 이렇게 말을 꼬아요? 츤데레예요?”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돌리는데, 한실장님과 윤팀장님이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한울, 안목 있네?”

“한실장, 쟤 진짜 잘 키워라. 다른 데 뺏기지 말고.”

면전에서 상사들의 푸근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다시 채희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어졌다.

나를 흘겨보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쁘니까.

“같이 키우는 거라고요, 나만 키우는 게 아니라. 대체 몇 번을 더 말해야 합니까?”

“야, 팀장 체면 좀 지켜주라고 나도 몇 번을 말하냐.”

둘은 또다시 아웅다웅하기 시작했고, 채희는 다시 대본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채희를 바라보고 있었고.

역시 진짜 예쁘긴 하다.

이 역할에 너무 잘 어울리겠어.

딱 청춘 드라마 여주인공이잖아?

< 첫 번째 작품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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