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의 또라이, 현재의 부적 >
누구도 채희를 재촉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채희가 잘 됐으면 하는 사람들이니까.
하물며 여기가 빡빡한 촬영장도 아니고.
허나, 우리가 아무리 눈치를 주지 않고 잡다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고 한들, 그녀가 초조함을 아예 느끼지 않을 리는 없었다.
우리가 얼마간 얘기를 나누는 동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채희.
내 곁에 바짝 붙어 있던 채희는 어느 순간 말없이 연습실 중앙으로 향했다.
“저 한 번 해볼게요.”
고요하게 눈을 감고 집중하는 그녀를,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지켜봤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뜬 순간.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를 수 있었다.
이제 눈빛만 봐도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음! 너무 좋아! 짜릿해! 이제 1kg 빠졌으니까··· 떡볶이 정도는 먹어도 괜찮겠지?”
며칠 전, 내가 연습실에서 잠들었다가 깼을 때 봤던 연기.
그녀는 지금 가진 실력의 반도 못 끄집어냈을지언정, 여러 눈들이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우리는 차근차근, 급하지 않게 가기로 했으니.
“떡볶이에는··· 튀김이 없으면 안 되긴 하는데··· 음···. 으음···. 오케이. 저녁은 굶자!”
중간중간 나를 힐끗 바라봐서 눈이 몇 번 마주쳤으나, 그녀는 독백으로 진행되는 한 씬을 무사히 끝맺을 수 있었다.
오디션 때보다 훨씬 나아진 것을 목격한 한실장님과 윤팀장님,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을 옆에서 모두 지켜본 나는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 때문에 우리 모두 섣불리 나서지는 못했지만.
채희는 입술을 짓씹더니, 각오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한 번만 더 해볼게요.”
윤팀장님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이겨내려 하고 있으니, 이럴 땐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는 게 베스트였다.
허락을 받은 채희의 시선이 내게 꽂혔고, 그녀는 중얼중얼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대체 뭐라고 중얼대고 있는 거야?
“···시작할게요.”
다시 눈을 감고 집중하던 그녀가 이윽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이번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상태가 좋아졌다는 것을.
중얼거리던 게 혹시 마법의 주문 같은 거였나?
“음! 너무 좋아! 짜릿해! 이제 1kg 빠졌으니까··· 떡볶이 정도는 먹어도 괜찮겠지?”
훨씬 생동감이 넘치는 연기.
윤팀장님과 한실장님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어지는 대사 또한 부드럽다.
일상 연기와 생활 연기라서 높은 레벨의 연기가 요구되지는 않지만.
일상 연기와 생활 연기에서도 수준 차이는 현격하게 나곤 한다.
대배우의 생활 연기와 신인 배우의 생활 연기를 양쪽에 놓고 비교해봤을 때.
디테일과 씬의 목적 전달, 감정, 캐릭터 표현, 자연스러움, 흡입력 등.
모든 부분에서의 차이가 모여, 전체적인 퀄리티에서의 커다란 차이로 나타난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그 두 가지의 모습이 뒤섞여 있었다.
대배우의 그것이 머릿속에 있고, 육체로도 그것을 표현하려 하지만, 결국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평균적인 신인 배우보다 좀 더 뛰어난 수준의 연기.
그녀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를 몹시도 기대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와! 잘했다, 채희야!”
“이 정도면 충분하지!”
연기가 끝나자, 한실장님과 윤팀장님은 흐뭇하게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채희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듯 보였으나, 그래도 아까처럼 분한 모습은 아니었다.
일견 뿌듯함마저 엿보일 정도.
왜 안 그러겠는가. 고질병이 고쳐지고 있는 걸 스스로가 가장 잘 느끼고 있을 텐데.
채희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내게 다가와 물었다.
“오빠, 저 어땠어요?”
“잘했어. 앞으로도 차근차근 해보자.”
“네!”
윤팀장과 한실장님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한실장, 역시 우리 대표님 안목은 인정할 만하다. 채희를 어떻게 알아봤지?”
“그러니까요. 처음엔 저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진짜 포텐이 확실하네요. 근데 제 기억엔 분명히 대표님도 부정적인 반응이셨던 것 같은데···.”
“당연하지. 분명 엄청 잘하는 앤데 오디션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으니까 부정적일 수밖에 없잖아.”
“그것도 그렇네요.”
나로서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만한 대화였다.
인정은 무슨. 채희는 내가 뽑았다, 내가.
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길이 들어가고 있다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지만, 곧이어 이어진 윤팀장님의 말에 의해 바로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채희야. 그런데 혹시 한울이 없이 해볼 수 있겠어?”
“아···.”
나를 바라보는 채희의 눈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런 확인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함을.
나는 걱정스러운 속내를 숨기며,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전에 말했지? 이미 좋은 평가를 내린 사람들 앞에서 똑같은 연기를 보여주는 것뿐이라고. 평가나 시선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야.”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거 좀 억지 같은 말인 것 같기도 하던데요.”
“···그래서 평생 연기 안 하게?”
“아뇨, 그건 아니고.”
“그럼 그냥 내 말 믿어. 억지로라도.”
채희는 뾰루퉁하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좀 그럴듯한 말 없어요? 무슨 마초도 아니고 무작정 믿으래?”
그럴듯한 말은 무슨.
“아까 네가 중얼중얼 무슨 주문 같은 거 외우더만. 그거라도 하던가.”
“아, 그거?”
채희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아니, 저거 비웃음 같은데.
“설마 내 욕했냐?”
“에이, 제가 무슨 오빠 욕을 해요. 그런 거 절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지?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거지?”
“네. 오빠가 오해했네요!”
너무 의심이 되어 좀 더 캐묻고 싶었지만,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늪에 빠진 듯,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내며 나는 연습실을 나왔다.
부디 공포증이 악화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럴 기미가 보이면 아마 실장님과 팀장님이 조절하실 거다.
아까 실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한 팀.
채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우리 모두가 같으니까.
***
초조하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하겠다.
어슬렁 어슬렁 같은 자리를 맴돌고, 손톱을 물어뜯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왜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무려 한 시간 동안 연습실의 문이 열리지 않고 있다.
아까 유리 사이로 몰래 안을 들여다보기는 했는데, 그러다가 실장님께 주의를 들었다.
아예 머리카락도 보이지 말라고.
‘이러다 공포증 악화되는 거 아냐? 설마 정도를 모르나? 조절 못하시나? 그 짬에 설마 그것도 모르려고?’
머릿속에서 온갖 걱정이 휘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 문이 열리며 한실장님이 밖으로 나오셨다.
그런데 표정이 썩···.
좋은 얼굴이 아닌 건 확실한데, 그렇다고 그렇게 나쁘지도 않아 보인다.
저건 대체 무슨 뜻이지?
“후우. 일단 들어가봐.”
한실장님과 윤팀장님이 밖으로 빠져나오시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온몸에 진이 다 빠진 듯,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채희.
나는 그녀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옆에 같이 앉았다.
묻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애가 너무 지쳐 보여서.
그냥 가만히 앉아 그녀가 기운을 차리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
채희는 옆에 앉은 자신의 매니저를 힐끔 바라봤다.
과거의 또라이, 현재의 부적.
미래엔 또 뭐가 될지 모르겠으나, 일단 부적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 느낌이다.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됐지?’
잘 모르겠다.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매니저 앞에 있으면 고질병이었던 긴장도 말끔하게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게 되는 상황에 놓여도, 매니저만 시야에 보이면 조금 안심이 된다.
‘행운을 깃들게 해주는 또라이 부적이 내 앞에 있다.’
‘행운을 깃들게 해주는 또라이 부적이 내 앞에 있다.’
아까 매니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주문처럼 외웠던 구절.
매니저가 내 앞에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인지하고 되뇌이는 것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즉효약이었다.
‘이제 나 어떡하지?’
그가 자신을 내버려두고 연습실을 나갔을 때 느꼈던 감정은 ‘두려움’.
그녀는 매니저가 밖으로 나갔을 때도 억지로나마 매니저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며 주문을 외웠고.
추가적으로 머리속에 다른 것도 되뇌었다.
그가 주장했던 다소 억지 같은 논리.
‘이미 좋은 평가를 내린 사람에게 똑같은 연기를 보이는 것뿐이니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라는 것.
자기최면을 걸듯 머리에 새겨 넣으니, 연기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시도는 엉망진창.
두 번째 시도는 그보다는 조금 낫게.
세 번째, 네 번째···. 횟수를 거듭해갈수록 더 나아지는 것이 보여 자신도 그렇고 실장님과 팀장님도 응원하며 지켜봐 줬으나.
역시 매니저와 함께 있었을 때의 연기보다는 확실히 덜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매니저가 이곳에 도착한 후 처음 선보였던 정도의 퀄리티.
지금으로선, 매니저 없이 그 이상의 연기를 선보이는 건 불가능했다.
“오빠.”
“어.”
“우리 떡볶이 시켜 먹어요. 계속 떡볶이 먹고 싶다고 대사 쳐서 그런지 진짜 먹고 싶어졌어요.”
“그럼 이번엔 먹기 싫다고 대사 쳐보는 게 어때.”
“···.”
분명 고마운 존재인 건 맞지만, 가끔은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질 때도 있었다.
***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한실장님과 소회의실에서 마주했을 때.
나는 희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너 오늘부터 다른 거 하지 말고, 채희만 담당해.”
“네! 알겠습니다!”
나는 냉큼 대답했다.
고민할 가치도 없다.
“채희 연습하는 거 옆에서 계속 봐줘. 우리도 가끔씩 들를 테니까. 아직 채희 상태가 그렇게 좋은 건 아닌데, 회사 들어온 지 며칠 안 돼서 이렇게 차도가 있는 거 보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봐도 될 것 같더라.”
맞다.
월단위를 넘어, 연단위로 공포증을 극복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아예 평생동안 고치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채희도 이때까지 오래도록 고생했겠지만, 지금 극복하는 속도만 보면 굉장히 양호하다고 할 수 있지.
비상계단에서 내 억지 논리에 속았던 게 이렇게 스노우 볼이 굴려진 것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좀 더 오래도록 고생을 겪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채희 드라마 알아볼 생각이야. 일단 스텝들 적은 웹드라마부터. 기본적으로 비주얼은 차고 넘치고, 연기도 가진 실력에 비해서 안 나올 뿐이지, 꽤 출중하니까.”
“···!”
나는 눈빛을 빛냈다.
드디어 내 재능을 쓸 때가 왔다.
웹드라마?
무시할 게 아니다.
요즘은 웹드라마의 기세도 심상치 않다.
대박이 아닌 중박이라도 터지면, 10대에 한정해서는 웬만한 미니 시리즈보다 효과가 뛰어나다고 봐도 될 정도.
대박은 뭐 말할 것도 없고.
“대신 촬영에 들어가면 너는 현장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계속 채희랑 같이 있어야 돼.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거기서 다른 일 할 필요는 없고, 대기 시간 때 피곤하면 얼마든지 편히 자도 되고.”
“네, 알겠습니다.”
채희의 데뷔에 조건이 붙었지만 그 정도쯤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었다.
아니, 시키지 않았어도 내가 자진해서 그렇게 했겠지.
“작품은 우리가 상의해서 고를 거니까, 넌 이제 연습실로 가.”
“네!”
작품을 상의해서 고른다고?
틀렸다.
채희가 들어갈 작품은 내가 직접 고를 것이다.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작품으로, 채희와 가장 잘 어울리는 배역으로.
‘이제부터 시작이야.’
나는 발걸음을 옮겨 곧장 채희가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스타가 되기 위해 내딛는 첫 걸음.
우리가 함께 쌓을 필모그래피엔 단 하나의 오점도 남겨두지 않으리라.
< 과거의 또라이, 현재의 부적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