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이 빠질 수 없죠 >
자신감을 얻은 그녀와 함께 연습실로 들어왔다.
여전히 그곳엔 호랑이 선생님이 있었지만, 그녀가 겁을 냈던 것은 지켜보던 내 시선 때문.
내 앞에서 연기를 겁내지 않고 펼칠 수 있게 된 때부터 그녀의 두려움은 많이 옅어져 있었다.
역시나.
호랑이 선생님은 한결 나아진 그녀의 연기를 보고는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어머!”
아직 평소와 같은 실력이 나오지는 않지만, 아까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좋아진 모습.
선생님의 시선이 문득 내게로 향했다.
동그랗게 커진 눈.
나는 시선을 마주보며 찡긋 윙크를 했고, 예쁜 선생님은 눈가를 찌푸렸다.
아무래도 연기를 가르치며 눈이 높아지셨나 보다.
사실 나 정도면 괜찮은데.
아무튼.
점점 매끄러워지는 그녀의 연기는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내 신체는 엄청난 피로를 호소했지만.
‘너무 졸리네.’
지금 당장 공포증에 차도를 보이고 있으니, 집에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벽에 붙어 계속 서 있기에는 몸이 너무 피곤했다.
그래서 나는 연습실 한 켠에 놓인 싸구려 소파에 앉아서 보기로 했다.
‘이제 좀 괜찮네.’
***
“음! 너무 좋아! 짜릿해! 이제 1kg 빠졌으니까··· 떡볶이 정도는 먹어도 괜찮겠지?”
희미한 의식이 점점 또렷해진다.
눈이 떠지는 것보다 먼저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떡볶이에는··· 튀김이 없으면 안 되긴 하는데··· 음···. 으음···. 오케이. 저녁은 굶자!”
눈을 떠보니, 선생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정채희 혼자 연습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다.
‘···다시 만나면 사과드려야겠네.’
수업에 참관하겠답시고 잠들었으니,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었다.
사과드리는 김에 저녁도 사드려야지.
저녁을 먹는 김에 아버지 차로 드라이브도 가고.
드라이브도 간 김에-
“어? 일어나셨어요?”
귓가에 꽂힌 목소리에 상념이 뚝 끊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순정만화의 주인공이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이쁘긴 진짜 엄청 이쁘네.
“죄송해요, 너무 피곤해서 잠들었나 봐요. 선생님 많이 화나셨죠?”
“아뇨, 전혀 화 안 나셨어요. 제가 매니저님 잠든 거 발견하고 선생님 눈치 보니까, 저렇게라도 다른 사람 있는 데서 연습하는 게 저한테 좋을 거라고 계속 수업 이어가셨어요.”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아마 그래서 정채희도 계속 날 안 깨우고 혼자 연습하고 있었던 걸 테고.
‘그나저나 화 안 나셨네···.’
아쉽게.
“매니저님, 앞으로도 시간 날 때마다 계속 옆에 있어주시면 안 돼요? 아직 다른 사람들은 좀 그럴 것 같긴 한데, 매니저님은 괜찮을 것 같아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일이 너무 바쁘네요. 빨리 채희 씨가 드라마에 들어가야 채희 씨 옆에만 붙어있을 수 있을 텐데.”
“아···. 음···. 아직 드라마 오디션은 조금 힘들 것 같기도 하고···.”
겸연쩍게 웃으며 시선을 피한다.
어차피 한 걸음씩 천천히 걷기로 했으니, 너무 급하게 안 가도 될 터.
나는 이에 대해 얘기를 이어가는 대신,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집에 가봤자 제대로 쉬지도 못 할 거, 우리 얘기나 좀 할까요?”
“얘기요? 무슨 얘기요?”
“그냥 이것저것요. 서로 조금 더 알아가면 좋잖아요. 매니저랑 배우 사이에.”
좋아하는 건 뭔지, 싫어하는 건 뭔지, 배우로서의 목표가 뭔지, 영화랑 드라마 중에 뭐가 더 좋은지 등등.
별거 아니긴 한데, 그래도 알아두는 게 좋지 않겠나.
작품을 고르는 데 참고도 할 수 있고.
‘무대 공포증 같이 몰랐던 걸 발견할 수도 있고.’
정채희는 잠시 시간을 확인하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여기서 얘기하지 말고 맥주나 한잔 하면서 얘기할까요?”
“맥주요?”
“서로 알아가면 좋다면서요. 그럴 땐 술이 빠질 수 없죠.”
그렇게 우리는 늦은 밤, 회사를 나와 주변 편의점으로 향했다.
날씨도 적당하고, 시끄럽지도 않고.
딱 편의점 테라스에서 먹기 좋을 때지.
우리는 과자 한 봉지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건배했다.
“채희 씨, 술 좋아해요?”
“딱히 싫어하는 편은 아니에요. 오디션 망했을 때나, 아니면 오늘처럼 연기가 잘 안 될 때, 그리고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하다고 느껴질 때 마셔요. 그러니까 이 회사 들어오기 전까진 무진장 마셨다는 뜻이죠.”
“되게 좋아하는 거네요.”
“다르죠. 술이 좋아서 먹은 게 아니라, 속 풀려고 먹는 건데.”
그런 것 치고는, 지금도 먹고 있지 않나.
한 모금 들어가니까 아주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있었다.
“매니저님은 왜 매니저 하게 됐어요?”
‘아빠가 시켜서요.’라고 할 수는 없었다.
비밀이고 뭐고, 일단 너무 볼품이 없어 보이니까.
그리고 뭔가 다른 이유도 생기는 것 같았고.
나는 정채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마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퇴근하자마자 쏜살같이 집으로 튀어갔겠지.
회사일이 너무 힘들다며 온갖 불평을 해댔을 테고.
하지만 웬걸.
난 오늘 퇴근하고나서도 자발적으로 회사에 있었고, 심지어 연습실에서 새우잠을 잔 뒤에도 퇴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얼른 그녀와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이 생겨나고 있다.
재능을 폭발시키는 걸 꼭 두 눈으로 보고 싶었고.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가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재능 넘치는 그녀가 하기에 최적인 작품으로, 그리고 최고의 작품으로.
“그냥··· 어쩌다 보니 하게 됐어요. 그런데 매니저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하네요. 채희 씨는 왜 배우가 하고 싶어졌어요?”
“영화 보고 반해서요. 너무 멋있어 보였고, 저도 그렇게 되고 싶었어요. 별거 아니죠?”
“그럼 드라마보다는 영화 쪽으로 가고 싶으신 거예요?”
“아뇨. 배우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건 영화 때문인데, 배우로서 하고 싶은 건 드라마도 영화도 좋아요. 욕심 같아서는 두 쪽 다 하고 싶긴 하죠.”
“그렇구나. 참고할게요.”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500ml 한 캔을 다 마셨다.
우리는 새로운 캔을 따고 다시 건배를 했다.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며 이렇게 편의점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걸 보니.
우리 사이가 조금 가까워지기는 한 모양이다.
아까의 일이 크게 작용했겠지.
“채희 씨는 배우로서 목표 같은 거 있어요?”
“목표요? 음. 아뇨. 딱히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연기를 잘하고 싶고, 오래 하고 싶고, 이왕이면 많이 하고 싶고, 주연도 하고 싶고, 인기도 좀 얻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은 정도?”
“···오케이. 욕심 많은 거 접수.”
우리는 그 후로도 많은 얘기를 나눴고.
밤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술자리가 끝나갈 즈음.
우리는 어느새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채희야’라 하고, 그녀는 내게 ‘오빠’라고 하고.
채희의 말이 맞았다.
서로 알아가는 데엔 술이 빠질 수 없지.
***
그로부터 며칠.
나는 매니저라는 직업을 왜 힘들다고 하는지를 매순간마다 깨닫고 있었고, 아버지는 힘들어하면서도 군소리 없이 일하는 나를 보며 집에서 항상 흐뭇한 미소를 보이셨다.
매니저가 천직이라는 말씀은 굳이 안 하셔도 괜찮았는데.
‘진짜 이러다 뒤질 것 같네.’
일에 별로 보람이 안 느껴진다.
지금 내가 붙어다니는 이들이 내 담당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채희랑 있을 때와는 달리,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오늘도 아침 퇴근이니까 채희 연기나 보러 가자.’
몇 번 함께 하며, 그녀는 내게 완전히 익숙해졌다.
이젠 내가 옆에 있어도 평소와 똑같은 실력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제 슬슬 다른 사람 시선도 괜찮을지 확인해봐야 하는데.’
예능 프로그램을 녹화하고 있는 스튜디오.
나는 구석에 앉아 텁텁한 공기를 마시며 채희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핸드폰이 우우웅- 울리며 진동했다.
발신자는 한실장님.
“음?”
나는 복도로 빠져나와 전화를 받았다.
“예, 실장님.”
-어, 지금 거기 석환이랑 같이 있지?
김석환.
나와 함께 이곳에 온 우리팀 선배 로드 매니저.
“네. 현장에 같이 나왔습니다.”
-그럼 넌 빨리 회사로 좀 와.
“회사에요? 지금요?”
-그래. 채희 촬영된 거 보고 괜찮아서, 팀장님이랑 같이 채희 연기 좀 직접 보려고 했는데, 네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네? 선생님도 그게 좋겠다고 말씀하시고.
“아.”
무거웠던 눈이 번쩍 뜨였다.
팀장님이랑 실장님이 함께 채희의 연기를 직접 보기로 했다는 건.
이제 채희도 본격적으로 활동을 준비해도 되는지, 활동의 사이즈는 어떻게 해야 할지 직접 확인하겠다는 뜻일 터.
그 중요성을 알았기에 채희는 나를 요구했을 테고, 선생님도 옆에서 거들어주셨겠지.
연기를 할 때, 채희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지만, 그게 평가를 내리는 시선이라면 더더욱 두려워하니까.
“네,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나는 선배 매니저님에게 말씀을 드리고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전력질주를 하면서.
***
택시를 타고 도착해 채희가 항상 사용하던 연습실로 달려갔다.
문을 열어젖히니, 안절부절못하던 채희가 나를 발견하고는 살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가 안도감을 느끼는 걸 보니, 나도 안도감이 느껴졌다.
‘다행이다. 안 늦었구나.’
이런 나를 본 한실장님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얼씨구, 누가 매니저 아니랄까 봐. 하하. 쟤 지금 뛰어온 거 맞죠?”
3팀의 리더, 윤팀장님도 웃으며 맞장구쳤다.
“싹수가 있네. 저렇게 진심으로 생각해야지. 요즘은 저런 신입 찾기 힘든데. 한실장, 쟤 잘 키워라. 이 일 오래 하겠다.”
“아니, 신입은 나만 키우나? 팀장님도 같이 키우셔야죠.”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여간 진짜, 보는 눈도 있는데 말꼬리 잡기는···. 야, 너 때문에 내가 팀에서 체면이 안 살아. 다른 팀은 위계질서가 얼마나 잘 잡혀 있는지 아냐?”
“걔네는 연차 차이가 심하고. 팀장님이랑 저는 얼마 차이 나지도 않는구만. 그리고 이 세월 동안 붙어있으면서 이 정도 해주면 됐지, 저한테까지 꼭 그렇게 대접을 받고 싶으세요?”
“···됐다.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어먹는 건 집구석이나 회사나 똑같아요, 아주.”
내가 3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마침 매니저 한 명이 도망을 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입김 또한 들어갔나 보다.
아니면 단순히 운이 좋았던 걸 수도 있고.
한실장님과 윤팀장님.
아직 이들을 오래 본 건 아니나, 그럼에도 참 좋은 사람들이라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들에게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울아, 그 마음은 높게 사는데, 우리도 같은 팀이거든? 우리도 채희가 잘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야.”
“아, 네!”
윤팀장님과 한실장님은 이미 채희의 문제를 알고 있다.
그때, 나는 한실장님만 소개받아서 몰랐지만 오디션장에는 윤팀장님도 계셨다고 하니까.
이제 관건은 이 해결 방법이 통할지 안 통할지.
둘은 지금 그걸 궁금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앞에 바짝 다가온 채희에게 말했다.
“간단하게 생각해. 안 떨면 1억 버는 거고, 떨면 땡전 한 푼도 없는 거야.”
“웬 1억이요?”
“안 떨면 드라마 출연할 수 있을 테니까. 신인이라 출연료는 적어도, 광고는 혹시 모르잖아.”
“광고···!”
그녀는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솔직히 1억이라는 돈 자체가 동기부여가 됐다기보다는, 그냥 대화로 긴장을 푸는 것 같았다.
뭐··· 아닐 수도 있고.
영 현실성 없는 얘기는 또 아니잖아?
< 술이 빠질 수 없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