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에필로그
* * *
시간이 흘렀다. 아주 많은 시간이 말이다.
쾅쾅
"서은하! 밥차렸으니까 나와!"
언제나 그렇듯 하루의 시작은 은하를 깨우는 일이었다.
"... 이 새끼가 진짜"
반응이 없는 은하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퍼질러 자는 건지 원.
물론 오늘이 쉬는 날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도대체 몇 시간을 처자는거야?
철컥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
저쪽 커다란 침대 위에서 은하가 대짜로 뻗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조용히 침대로 다가가 손을 올렸고.
짜악
"크허헉!!!!"
그대로 사정 없이 은하의 등짝을 갈겼다.
"흐으으..."
얕은 신음 소리와 함께 은하가 등을 문질렀다.
새끼가 그렇게 세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엄살은 무슨. 누가 보면 진심으로서 때리는 줄 알겠네.
하여간 몇 년을 함께 사는데 이놈에 엄살은 나아지지가 않는다.
"쯧...! 일어나서 밥 먹어"
"... 자기야 그런 건 말로 해 줘도 충분하지 않을까...?"
"말로 해도 안 일어나니까 그렇잖아 새꺄"
"... 이게 아주 그냥 하늘 같은 마나님께 못 하는 말이 없어..."
아이고 마나님은 무슨. 그냥 나이 많은 애새끼지.
"안 되겠다. 아무래도 내가 어제 먼저 자서 삐진 것 같은데 오늘 밤에 작살을 내줘야겠..."
짜악 짜악 짜악
"흐어어억...!"
다시 한번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그냥 입만 열면 맞을 말만 하네'
얘로부터 정신 나간 새끼는 매로 벌을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거야 원 지금까지 수천대는 때린 것 같은데 이 새끼는 변하는 게 없다니까?
뭐 어쨌든 결과적으로 일으키는데엔 성공했다.
"엄마아~"
은하랑 함께 거실로 나오니 이제 막 4살이 된 아이가 은하를 반겨 줬다.
"어이쿠. 우리 소원이 일어났어?"
"응! 아까아까 전에 일어났어!"
은하가 소원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런 은하의 행동에 소원이는 즐겁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지었고 그 상태로 은하는 식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보기 좋네'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두 모녀를 바라봤다.
소원이는 나랑 은하의 아이다.
은하와 사귀던 중 어찌어찌해서 은하에게 청혼을 받았고 내가 청혼을 수락함에 따라 우리는 식을 치르며 부부가 되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른 나이에 부부가 된 우리에게 몇몇 사람들은 걱정과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나와 은하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속궁합이 좋았는지 결혼 3개월차에 은하가 임신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임신하는거지?'
남들은 결혼 몇 년차에 임신이 안 돼서 문제라는데 이걸 좋아해야 하는건지 말아야 되는 건지 참.
물론 그렇다고 소원이가 싫다는 건 아니었다.
소원이는 나의 보물이고 나의 삶 그 자체였다.
산부인과에서 처음 소원이를 마주하게 됐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내 관심사는 오로지 소원이에게로 집중되었고 간간이 은하가 자식보다 배우자를 더 생각할 거라는 유진성씨는 어디에 갔냐며 시위아닌 시위를 벌일 때도 있었다.
"응? 뭐 해 거기서"
"... 별거 아니야. 그리고 식사 할 땐 애 좀 내려놓고 먹어라. 소원이도 너도 되게 불편해 보이는데"
그 말에 은하는 고개를 내려 소원이를 내려다 봤다.
"소원아 엄마 품이 불편해?"
"응"
"..."
은하가 침묵했다.
"... 에잇 어린놈의 자식이 누굴 닮아가지고 이렇게 야무진지"
"허이구 여보세요. 그 얘 니가 배 아파서 난 자식이예요. 그리고 상식적으로 누굴 닮았겠냐?"
"내가 이래서 아들을 원했던 건데..."
그러면서 세상 허망한 표정으로 소원이를 내려 준 은하였다.
"아빠~"
소원이는 은하의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내 쪽으로 달려왔다.
와락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품으로 들어왔고 나는 소원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담았다.
"우리 소원이. 엄마 보단 아빠가 더 좋지?"
"응! 아빠가 많이 많이 좋아!"
어휴 내 새끼 아주 그냥 사랑스러워서 미쳐 버리겠네.
고사리 같은 소원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으응 그래그래. 아빠도 소원이 많이 많이 사랑해?"
"히히..."
"우물우물... 자기야 나는...?"
"..."
이 새낀 갑자기 왜 또 지랄이야?
소원이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한심한 눈빛으로 은하를 바라봤다.
식사를 하다 말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은하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 그래. 너도 사랑한다"
"... 힣"
내 대답에 만족을 했는지 은하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식사에 전념했다.
'... 어휴 어떻게 소원이 보다 더 지능이 떨어지는 것 같지?'
아이를 낳으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모습을 보일까 기대했는데. 소원이가 더 어른스러우면 어쩌자는 거야.
"아빠~ 나 뽀뽀해주세요"
"뽀뽀? 소원이 뽀뽀 받고 싶어요?"
"네에~"
그러면서 먼저 내 볼에 뽀뽀하는 소원이에 나 역시 뽀뽀해줬다.
"더 해 주세요!"
"한 번이면 됐지 뽀뽀 더 받고 싶어요 소원이?"
"네에~"
나는 소원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나이도 어린 게 또박또박 말도 잘하고 어쩌면 우리 소원이는 천재가 아닐까...?
"... 큼!"
"?"
그렇게 소원이에게 뽀뽀 폭격을 하고 있을 때 그새 식사를 다 마쳤는지 은하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 나도 뽀뽀 좋아하는데..."
"... 허어?"
"해 줘엉~"
아주 시발 염병을 하는구나. 굵은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니까 토악질이 나올 것 같네.
"... 에휴. 그래 오냐. 해 줄게"
"그리고 나는 볼 뽀뽀 보다 입술 뽀뽀가 더 좋은데..."
아이고 이 여자가 대낮부터 못 하는 말이 없네.
"... 알겠으니까 이빨이나 닦고 와"
"응응. 후딱 닦고 올 테니까 꼼짝 말고 있어?!"
그러면서 은하는 재빠르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빠. 엄마는 바보예요?"
"으응.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바보란다"
"꺄하아~ 바보 엄마~"
지 엄마가 바보라는 게 그리 재밌을까?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소원이에 나는 작게나마 미소가 지어졌다.
***
모처럼 쉬는 날을 맞아 가족끼리 동물원에 왔다.
"사쟈갸 더 쎼!"
"뭐래 호랑이가 더 쎄거든?"
열띤 표정으로 말싸움하고 있는 두 모녀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동물원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온 사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동물은 무엇일까?' 라는 주제로 말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한년은 진짜 꼬마고 다른 한년은 정신연령이 꼬마 보다 못하니 원'
둘이 모습도 비슷하니 어린 은하랑 다큰 소원이가 싸우는 것 같기도하고, 참고로 소원이의 머리색도 은하처럼 노란색이었다.
'설마 장인 어른, 아니 아버님이 한국인이 아닐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유독 머리색하고 피부가 돌아오지 않는다 했더니 전부 유전 때문이었다.
처음 그 사실을 들었을 때 그동안 겉모습만 보고 은하를 판단했던 내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진짜.
"아빠! 사쟈가 더 쎼지?"
"아니지. 호랑이가 더 쎄지?"
치열한 토론을 펼치던 두 모녀는 끝내 해답을 찾지 못했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며 나를 보는 모습들이 참으로 귀여워 보였다.
'동물 중에서 가장 쎈 새끼가 뭐냐고?'
아니 뭘 이런 거로 싸우고 있어? 딱 보면 나오지 않나?
"둘 다 아니야"
"...?"
"....???"
나는 의아해하는 두 모녀를 보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가장 강한 동물은 코끼리야"
"..."
"..."
그리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색한 침묵이 일어났다.
"..."
'아'
갑자기 바보가 된 기분이다.
퍽퍽
"크어억!! 아니 갑자기 난 왜?!"
"야이 개새끼야!! 니가 좀 져 주면 안 돼냐? 나이도 그렇게 처먹어 놓고선 4살짜리 애 한번 이기겠다고 지랄을 하고 있어!"
난데 없는 폭력에 은하가 억울한 기색을 보였지만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밥을 먹고 우리는 돌고래 쇼를 보러 갔다.
촤아악
"와아아!!"
사람들의 환호 소리와 정겨운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소원이는 내 무릎에 앉힌 체 즐거운 표정으로 쇼를 관람했고 은하는 우리 둘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데에 열중이였다.
"아빠 아빠! 돌고래갸 점프를 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기 무슨 생각해?"
"아니 그냥... 내가 결혼하고 아이가 생겼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아가지고"
그러면서 지난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갑자기 사라진 수아와 짧은 연애 끝에 은하와 결혼하게 된 나.
내 손을 붙잡고 고맙다고 말한 은하의 어머님과 결혼한다는 소식에 화들짝 놀란 진아가 다시 한번 은하랑 진탕 술을 마셨던 일까지.
처음 세계가 역전이 됐을 땐 득보단 실이 많다고 느낀 나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 모든 게 꿈만 같았고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꼬옥
"그래서 지금 인생이 마음에 안 들어?"
카메라를 내려놓고 은하가 내 어깨를 붙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런 은하의 물음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내 인생 최고로 지금이 행복해"
"그래? 그러면 된 거지. 너가 행복한 거면 된 거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얼굴을 내쪽으로 들이댔다.
터헙
"그러면 넌 행복해?"
불도저 처럼 달려오는 은하의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한 내 행동에 은하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짖궃은 미소와 함께 내 손을 붙잡았다.
"응. 존나 행복해"
은하가 강제로 내 손을 내렸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