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End
* * *
뚝 뚜둑
갑자기 하늘에서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늘 비가 온다는 소식은 못 들은 것 같은데, 물방울은 어느덧 굵은 물줄기로 변해 나와 수아를 덮쳤다.
쏴아아
"..."
"..."
비가 미친 듯이 내려왔고 우리는 굵은 빗줄기를 맞으며 서로를 응시했다.
지금 상황에서 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 왜 하필 그런 여자랑 사귀는 건데... 넌 원래 그런 스타일의 사람을 싫어했잖아..."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
수아의 얼굴이 젖어 들었다.
그것이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아니면 비 때문인건지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 할 말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자. 비가 거세지네"
수아랑 있는 자리였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선 은하의 생각만이 가득했다.
이 불쾌하고 더러운 감정에서 벗어나 어서 빨리 은하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 말에 대답을 안 하고 우뚝하게 서 있는 수아에 나는 이만 발걸음을 떼었고 천천히 입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더 이상 수아는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그럼 마지막으로..."
그렇게 입구를 막고 있는 수아쪽으로 걸어가던 중 수아가 죽어 가는 말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를 단 한 번이라도 여자로 본 적은 없는 거야...?"
우뚝
"..."
너무나도 애절한 목소리에 저절로 다리가 멈춰 섰다.
마치 울먹이는 듯한, 아니 울먹이는 게 맞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정도로 수아의 목소리는 처절했고 처량했다.
"... 응"
"..."
"널 한 번도 여자로 본 적은 없어"
"하하..."
담담히 말하는 내 목소리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넌"
털털한 성격으로 언제나 내게 미소를 지어줬던 수아.
"소꿉친구였을 뿐이지"
역전이 되고 나서 성격이 바뀐 듯 보였지만 그래도 내게 있어선 소중한 친구였던 수아가.
"여자의 대상은 아니었어"
나를 공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수아의 얼굴에 젖은 물줄기가 단순히 비 때문이 만은 아니라는 걸 말이다.
"하하.... 그렇구나... 나는 그저..."
"..."
"소꿉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였구나..."
"... 미안"
울고 있는 수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쏴아아
"..."
"..."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점점 더 거세게 쏟아졌다.
'큰일이네. 베란다에 빨래를 안 들여 놓은 것 같은데'
이제는 할 말도 끝났으니 슬슬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
스윽
"...?"
철퍽 철퍽
내가 잘못 본 건가? 왠지 모르게 수아랑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 뭐, 뭐야. 왜 갑자기 일로 와?"
"... 진성아"
수아가 작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당황한 나는 수아를 보며 소리쳤지만 수아는 멈추지 않았고 그런 수아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텁
'...!'
뒤에서 뭔가가 부딪혔다.
계속 뒷걸음질을 치다 보니 어느덧 막다른 길에 몰려선 것이다.
"진성아..."
"으윽...!"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아가 코앞까지 걸어왔다.
'서, 설마 이 새끼가...?!'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아주 강하게 들었다.
가까이서 본 수아의 모습은 귀신과도 같았고 수아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내 얼굴 쪽으로 손을 올렸다.
꽈악
두려움에 잠긴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무서웠고 은하가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툭
"...!"
머리 위로 조그마한 손바닥이 느껴졌다.
그러나 강압적이거나 위협적인 기분은 들지 않았다.
"..."
"..."
잠시 그 상태 그대로 우리는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진성아"
"...?"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미안 했어"
"..."
차분하고 따스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슬며시 눈이 떠졌다.
'아...'
수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수아가 나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스윽 스윽
"..."
작고 나약한 손이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분명히 차갑고 축축한 손이였지만 왠지 모르게 따뜻함이 느껴졌다.
"행복하게 지내"
그 말을 끝으로 수아는 비틀거리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쏴아아
"..."
어느새 혼자 남게 된 골목 안.
털썩
"아하하..."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나는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바닥에 고인 웅덩이에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들었지만 딱히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스윽
"..."
바닥에 앉은 그 상태로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커먼 저 하늘 위로 구름 사이에서 연한 노란색이 눈에 들어왔다.
***
띠리릭
"..."
집으로 돌아왔다.
한 손에는 새로 산 우산이, 다른 한 손에는 비에 젖은 호빵 봉지가 들려 있었다.
"... 서은하?"
힘겹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니 집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혹시 외출을 했나 싶어 신발장을 둘러봤지만 은하의 신발은 그대로 있었고 나는 축축한 몸을 이끌고 천천히 집안을 뒤졌다.
달칵
"..."
달칵
"..."
화장실에도 은하의 방에도 은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나는 일단 옷을 갈아입으러 내 방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내가 찾던 사람을 마주치게 되었다.
"... 너 뭐 하냐?"
"왔어? 아주 그냥 비에 홀딱 젖은 생쥐 꼴이구먼"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하가 내 침대에서 누워있었다.
"... 빨리 나가. 나 옷 갈아입어야 되니... 으윽! 너 시발 술 마셨냐? 이게 뭔 냄새야?!"
"한잔 했어. 너가 하도 안 와서 할게 없어가지곤"
"야이 개새끼야! 술을 얼마나 처마셔된 거야?! 침대에 술 냄새 다 배기겠네"
지독한 술 냄새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일어나라고 미친년아!"
"싫어엉~ 은하 못 일어 나겠어요~ 은하 일으켜 주세요~"
아이고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네. 어디서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가 난리야?
나는 손으로 코를 막으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옷이 빗물에 흥건히 젖어서 그런지 내가 올라가니 침대의 크고 작은 얼룩들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다.
"일어나 이 쌍년..."
덥썩
"어어?!?!"
내 손이 은하의 몸에 닿는 그 순간 은하가 재빠르게 나를 자기 품으로 껴안았다.
"뭐, 뭐하는 거야?! 이 미친년아?!?"
"... 아 몰라. 잠깐만 이렇게 있자"
"아니 시발 니 몸에서 알코올 냄새가 존나게 난다고!!"
당황한 나는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은하의 무식한 힘 앞에선 무용지물이였고 결국 몸에 힘을 빼고 포기를 한 나였다.
"...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 그럼"
"글쎄... 100만년?"
"아이고 지랄하지 말고 나 옷 갈아입어야 된다니..."
"좋아해"
뚝
"..."
"..."
순간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 뭐라고?"
"좋아한다고 유진성"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은하를 올려다 봤다.
은하의 표정은 진지하기가 짝이 없었고 늘 장난기가 넘치는 그녀의 목소리 또한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 날 좋아한다고?"
"어. 좋아해. 너무 좋아해서 미칠 것 같아"
"..."
"지금까진 긴가 민가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나 너 좋아해"
쿵쿵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글거리면서 느끼한 은하의 말에 역겨움 보단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
"..."
머리가 미친 듯이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
"..."
말없이 은하를 바라봤다. 커다란 은하의 눈에선 세상 멍청해 보이는 내 모습이 담겨 있었다.
스윽
그 상태에서 은하의 얼굴이 조금씩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나는 슬며시 눈을 감으며.
텁
"우으읍?!"
"... 술냄새난다고 했잖아 시발련아"
손으로 은하의 입술을 가로막고 얼굴을 강하게 들여올렸다.
"으... 손에서도 술 냄새가 나네"
그렇게 은하의 품에서 벗어난 나는 재빠르게 침대에서 나왔고 은하는 입을 삐죽내밀며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은 마치 심술이 난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 아오 이 무드 없는 새끼. 지금이 딱 키스하는 타이밍이였는데"
"꺼져 이 미친년아. 애초에 고백받은 사람이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입술을 내밀면 어쩌자는 거야"
"... 에휴 그래. 내가 병신이다 병신"
침대에 대짜로 누은 은하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꼴에 여자라고 아주 그냥 짐승이 따로 없다니까? 조신한 꼴을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뭐 고백 받아 줄 거야 말 거야?"
"허이구 시발. 내가 뭐라고 대답할 거 같냐?"
세상 하찮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내 모습에 은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오 진짜. 순진한 사람 마음을 뒤락 펴락 하는 꼬라지가 아주 그냥...?!"
투덜거리며 말하던 은하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은하의 입을 입술로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
"..."
잠시 시간이 멈췄다.
지금, 이순간만큼은 나도 은하도 어떠한 생각할 수 없었다.
"대답했다"
"야 너..."
"나도 너 좋아해 서은하"
은하가 멍하니 나를 올려다봤다.
덥썩
그리고 내 머리를 잡고 다시 자신의 얼굴쪽으로 끌어 당겼다.
아까보다 훨씬 거칠고 과격한 키스였지만 나는 온전히 내 몸을 은하에게 맡겼다.
"..."
"..."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첫 키스의 맛은 소주 맛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