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만남(2)
* * *
두 눈을 의심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됐고 모든 감각들이 은하에게로 집중되었다.
분명히 나를 데려다주고 차가 떠나는 모습까지 확인을 했는데.
'어떻게 이곳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갑자기 울컥한 감정이 올라왔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멘탈 만큼은 굳건하다고 생각한 나였는데 아무래도 그 정신 상태도 많이 무뎌졌나보다.
"... 너가 진성이가 말한 그 양아치구나?"
"양아치? 내가 양아치면 넌 시발 폭행범이냐?"
"너 때문에 진성이가 이상하게 변해가지고...!"
아무말도 못 하는 나를 대신해 두 여자가 서로를 냉담하게 노려봤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당장에라도 주먹다짐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 가자 유진성"
침묵 속에서 은하가 조용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어?"
"더 이상 할 것도 없잖아. 그만 돌아가자고"
세상 따뜻한 목소리에 나는 멍하니 은하를 바라봤다.
따스한 미소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텁
'...?!'
그렇게 멍하니 은하의 얼굴을 바라보던 중 은하가 내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 손은 누구의 손과는 달리 차갑지도 강압적이지도 않았다.
"일으킨다?"
"..."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나였지만 이내 침묵을 한 체 은하에게 손을 맡겼다.
은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나를 일으켰고 나는 은하의 손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 순간만은 정말로 이곳 세계의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
'... 기분 참 좆같네'
꽈악
은하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몸 만큼은 솔직한 나였다.
"이만 돌아가자"
"돌아가기는 어딜 돌아가...! 유진성! 자리에 안 앉아?!"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려는 도중 수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나랑 얘기 중이였잖아 진성아... 도대체 저 양아치 새끼가 뭐길레 나를 뒷전으로 두는 거야?!"
"..."
"너 이런 얘 아니었잖아. 너 지금 저 양아치한테 속고 있는 거라고...!"
나는 말없이 수아를 쳐다 봤다.
더 이상 수아에게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 가자 서은하"
"유진성!!"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수아야. 지금은 대화할 상황이 아닌 것 같아"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은하의 손을 꽉 잡은 체 카페를 나갔다.
딸랑
"지, 진성아!"
멈칫
뒤이어 카페를 나온 수아가 당황해 찬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우리 소꿉친구 사이잖아..!! 쟤가 나보다 더 중요한 거냐고!"
"하아... 저 시발련 말 존나 많네"
그런 수아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은하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 그냥 무시하고 가자"
"흐음..."
"... 서은하?"
뭔가 미묘하게 미소 짓는 은하에 불안감을 느끼며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일까 나랑 깍지를 낀 체로 은하는 자리에서 멈춰 섰다.
"나랑 진성이가 무슨 관계냐고?"
은하가 천천히 뒤를 돌며 말했다.
"... 야 이상한 짓 벌이지 말고 그냥 가자니..."
덥썩
'어어..?!'
그리고 갑자기 나를 자기 품으로 끌어당기고 씨익 웃더니.
"애인 관계인데?"
"..."
"..."
'아...'
기어코 지랄을 저지른 은하였다.
***
"우물우물..."
"... 잘도 처먹는구나"
복스럽게 먹는 은하에 나는 무심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어찌어찌해서 우리는 집에 돌아왔고 도착하자마자 정말로 내게 식사를 요청한 은하였다.
'약속이 펑크가 나긴 개뿔 걍 지가 안간 거겠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카페에 찾아왔는지, 뭐 결과적으론 덕을 보게 됐지만 참 알다가도 모르는 년이다.
"... 근데 아까 그 미친년하곤 무슨 사이냐?"
"..."
"그 새끼는 소꿉친구라고 하던데... 그거 진짜야? 걍 그년이 거짓말 까는 거 아니야?"
"... 으응 그게 말이지..."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나는 최대한 태연스러운 말투로 수아에 대해 얘기했다.
은하는 묵묵히 내 말을 들으며 식사를 이어 나갔고 이야기가 모두 끝날무렵 어느새 텅 빈 밥그릇엔 물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 허참. 그게 소꿉친구냐? 걍 사이코패스년이지"
"몰라. 나도 더 이상 생각하기 싫으니까 이제 그만 얘기하자"
어깨를 으쓱거리는 은하의 옆에서 나는 전자담배를 꺼냈다.
왠지 모르게 답답한 마음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
폐 속으로 니코틴을 집어넣으며 멍하니 은하를 바라봤다.
그런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은하 역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우리는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응?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왜 그렇게 쳐다봐?"
"..."
나는 은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은하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다시 시선을 식탁으로 돌렸고 은하에게 시선을 고정한 체로 내 입은 계속해서 연기를 내뿜었다.
"후우..."
넓은 집안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공기 마저도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정작 나는 그 차분함을 즐길 수가 없었다.
[애인 관계인데?]
[소꿉친구 그거 뭐 특별한 거라고 진성이는 내 집에서 동거하는 중인데]
[너 같은 버러지 년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어지지 못할 거니까 집에 가서 야동이나 봐 병신아]
'말하는 꼬랑지 하고는 정말'
천박해도 너무 천박한 말투였다.
아니 시발 애인이라고 말한 건 둘째치고 야동을 처보라는 건 왜 말한 거야? 내 어깨의 손을 올린 체 혀를 삐쭉 내민건 또 뭐고.
예전 같았으면 기겁을 했을 나였는데 지금은 딱히 역겹거나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표정이 굳어가는 수아를 보고 통쾌감이 들었달까?
"야야... 아무리 연초가 아니라곤 하지만 그래도 너무 심하게 피는 거 아니야?"
"... 뭐 어때 환기시키면 되지"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다.
슬슬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하는지 더 이상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지 않았다.
'나도 드디어 미쳐버렸나 보네. 하긴 저 새끼랑 같이 살면서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하겠지'
하여간 문제가 많은 인생이다.
Rrrrr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담배를 피던 중 전화가 걸려 왔다.
[성수아]
"..."
Rrrrr
드디어 연락이 왔다.
언제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했던 시간 때보다 조금 늦게 전화가 걸려 왔다.
스윽
"응? 어디가냐?"
"연초피러. 같이 갈레?"
"시발 연초 끊으라고 전자담배까지 사줬는데... 갔다 와"
은하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에선 나를 의심하는 그런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나 간다"
"올 때 호빵이나 사다 줘~"
"... 쯧"
아주 그냥 귀여워서 한 대 때려주고 싶네.
대충 옷을 차려입고 그렇게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
[...]
전화가 연결 됐지만 나도 수아도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 만나서 얘기할까?"
짧은 침묵 끝에 결국, 내가 먼저 차분히 수아에게 말했다.
"고시원으로 갈게. 그쪽에서 만나자"
잠시 후.
"... 후우"
고시원 근처에 위치한 골목길. 내 손에는 전자담배 대신 연초가 들려 있었고 나는 연초의 쓴맛을 맛보며 수아를 기다렸다.
'쓰읍... 이제 연초도 진짜 못 피겠네'
전자담배의 달달한 맛에 길들여져서 그런지 예전 만큼에 연초뽕이 안 올라왔다.
그렇게 하염없이 줄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스윽
"... 진성아"
"..."
좁은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언제왔는지 저 앞에서 수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아까 우리와 헤어지고 나서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수아는 수척해 보였다.
"... 너 담배도 폈어...?"
"필 수도 있지. 너도 한대 줄까?"
"..."
수아는 말없이 담배를 건네받았다.
살면서 얘랑은 같이 담배를 펴볼일이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수아랑 맞담을 피게 되었다.
"... 그래서 왜 전화했는데"
잠깐의 담배타임이 끝나고 수아에게 물었다.
물론 수아가 나를 왜 불렀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직접 대화하고 싶었다.
"... 너 진짜 그 양아치..."
"서은하. 그 양아치 이름 서은하야. 그러니까 양아치 말고 이름으로 불러줘"
내 말에 수아가 멍하니 나를 쳐다 봤다.
"... 서은하씨랑 사귀는 사이야?"
그러고선 정말 애절한 표정으로, 한대 툭치면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힘겨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
나는 말없이 곽에서 연초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후우..."
연초를 태우며 천천히 하늘을 바라봤다.
'달이 안 보이네. 구름에 가려져서 그런가?'
분명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훤한 보름달이 눈에 익혔는데 지금은 어두운 밤하늘 밖에 보이지 않았다.
"..."
"..."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담배만 피는 내 모습에 신경질을 낼 만도 했지만 수아는 묵묵히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은하랑 사귀는 사이냐고...?"
"..."
"... 응. 사귀는 사이야"
연초가 모두 태워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아의 표정 또한 무너졌다.
물론 내가 하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랑 은하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아니라고 답하면 수아에게 기회를 주는 것 같아 그냥 사귀는 사이라고 대답했다.
수아는 다르겠지만 더 이상 수아와 이런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 지, 진짜로? 거짓말이 아니라...?"
"응"
"... 그럼 왜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내가 너에 대해서 어떤 감정인지 잘 알고 있잖아..."
"... 미안"
난생처음 듣는 울먹거림이 내 귀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서 나는 어떠한 동정도 느낄 수 없었다.
"..."
"..."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왠지 모르게 수아의 눈빛이 검게 변한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