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만남
* * *
쾅
집에 돌아왔다. 아주 창백한 얼굴로 말이다.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내가 그동안 개지랄하면서까지 이사한걸 안 들키려고 했는데, 고작 3일 전화 안 받았다고 들통이 나버린다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발만 동동구르며 거실을 나돌아다녔다.
"..."
조용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수아에게 통화를 걸었다.
뚝
[여보세요? 진성이야?]
통화를 걸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1초도 안 돼 전화가 연결됐다.
나도 모르게 등가에서 소름이 돋아났지만 놀랄 기색도 없이 수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나서 얘기하자. 늘 만나던 카페에서 기다릴게]
"수, 수아야..."
뚝
"..."
그러면서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켜 버렸다.
'시발. 좆된 것 같은데'
나는 천천히 귀에서 휴대폰을 내려놨다.
입술이 파르를 떨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적이 없었는데 내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났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 역시 나대지 말고 수아한테 연락을 했어야 됐어"
뒤늦은 후회심이 나를 찔러됐지만 결국엔 내 선택이었다.
'어떡하지. 그냥 도망칠까?'
슬그머니 올라오는 불안감에 아예 회피할 생각도 해봤지만 도망칠 자신도 없었다.
내가 아는 수아라면 정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찾을 것 같았다.
"... 씨발"
작게 욕설을 내뱉고 집을 나와 수아랑 만나기로 한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딸랑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리 와 있었는지 저쪽 구석에서 수아가 홀짝 커피를 마시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나는 조용히 수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
"..."
우리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멤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 혼자 어쩔 줄 몰라 하는 분위기였다.
'이게 아닌데...'
마른침을 삼키며 커피를 마셨다.
카페에 오면서 당당하게 할 말은 해야겠다고 다짐한 나였는데 막상 이렇게 마주하게 되니 입이 안열렸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
"..."
결국 수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린 것 같은데 내가 말을 못 하니 자기가 침묵을 깬 것이다.
"... 그게 사실 내가 휴대폰을 떨었뜨렸는데 어디가 고장이 났는지 작동이 안 돼서 AS센터에 갔는데..."
"그럼 따로 말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주절주절 대답하는 내 말을 끊고 수아가 매섭게 몰아붙였다.
"진성아. 우리 소꿉친구잖아. 게다가 내가 전화를 걸었다는 걸 알았을텐데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니?"
"... 미안"
"미안 할게 아니라 내가 걱정이 돼서 그랬어. 하루면 몰라 3일이나 연락이 안 되는데 뭐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야 나도 이해하지"
실망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수아에 숙이고 있던 고개가 점점 더 내려갔다.
내가 잘못은 한 건 맞는데 생각보다 훨씬 심하게 책망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사를 간 사실은 왜 말해주지 않았어?"
"..."
수아의 말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침내 올게 온 것이다.
"연락이 안 돼서 너가 사는 고시원으로 찾아갔는데 글쎄 다른 사람이 머물고 있더라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
"혹시 날 바보로 본 거니? 그래서 이사를 갔음에도 맨날 고시원 앞에서 헤어진 거야?"
나는 화들짝 놀라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내가 널 왜 바보로 봐..."
"그럼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줘. 계속 시선 피하지 말고"
"끄응..."
지금껏 계속 시선을 피하다 결국 조심스럽게 수아와 눈을 마주쳤다.
화가 난 기색은 없었다. 그보단 마치 감히 너 따위가 이런 짓을 해? 라는 분위기로 나를 옥죄왔을 뿐이었다.
'대체 왜 나를 저렇게 보는 거지? 조금 구린 기색이 있어도 우린 친구 사이가 아닌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친구가 아닌 주인이 노예를 보는 눈빛이었다.
'...'
불안감에 차 있던 머리가 어느새 차갑게 굳어졌다.
상황이 이해가 되니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뭐라도 말을 해ㅂ..."
"내가 그걸 왜 너한테 얘기해 줘야되는데?"
"..."
"내가 니 노예야? 니가 뭔데 시발 내가 그런 얘기까지 해야 되냐고"
저질러버렸다.
그동안 꾹꾹 참고 있었던 응어리가 마침내 풀리고만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깟 연락 한번 못 할 수도 있지 내가 뭐 니 전화 받기 싫어서 휴대폰을 일부러 고장냈어?"
"진성아 너 지금 많이 흥분한 것 같은데..."
"흥분은 니미 시발! 지랄도 정도껏 해야지 사람을 아주 그냥 개병신 새끼로 보는데 어떻게 흥분을 안 할 수가 있어!"
"..."
물꼬가 터지기 시작하니 더 이상에 망설임은 없었다.
몸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분비가 되었고 나는 수아에게 끊임없이 울분을 토해내며 화를 냈다.
수아는 내 모습에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뜬체로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그래. 내가 이렇게 화를 내니까 수아도 당황해하잖아. 진작에 이랬어야 됐어'
알 수 없는 쾌감이 온몸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시간이 지날수록 수아의 표정이 차갑게 변하기 시작하며 타올랐던 분위기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 해서 그렇게는 안 했으면..."
자신감에 차 있던 목소리가 자신감을 잃고 점점 작아졌다.
뒤늦게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었다.
'너,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마음속 깊은 곳에 묵혀논 불안감이 다시금 올라왔다.
더 이상에 흥분은 없었고 불안감은 점점 더 거대해지더니 어느새 공포라는 감정으로 바뀌어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
"..."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침묵이 찾아왔다.
더 이상 아까처럼 쉽게 입을 열지 못한 나였다.
"그게 끝이야?"
"..."
"고작 그런 이유로 화를 낸 거라고?"
감정 없는 수아의 말에 머릿속에서 적색 신호가 울렸다.
"수, 수아야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좀 닥쳐줄레? 내가 말하고 있잖아"
"..."
수아의 욕에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욕 하나만큼은 하지 않은 수아였는데 처음으로 욕을 내뱉은 것이었다.
'아...'
머릿속이 하얘졌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수아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이성을 잃고 수아에게 욱했을 때? 아니면 휴대폰이 고장 났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때?
모든 게 내 잘못으로 느껴진다. 결국, 나의 안일한 선택 때문에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조금만 더 냉철했다면, 조금만 더 인내심이 있었더라면... 기회는 많았는데 대체 왜 그런 행동을 저지른 거지? 병신인가?
"내가 말했잖아"
"..."
"너 만큼은 그렇게 성공하고 싶지 않다고..."
수아가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나 역시 목이 탔지만 지금 상황에선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가 없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척하지마. 그때 우리 여행 갔을 때 내가 정말 니가 자는줄만 알았다고 생각한거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물론 당연히 알고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면전에서 듣게 되니 충격적이었다.
꼬옥
'...!'
"진성아. 난 널 믿어. 너가 이렇게 된 건 너가 나빠서가 아니라 주변에 환경 때문인 거야"
차가운 수아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손이 움찔거렸다.
"그 양아치랑 아직 연락하고 지내지?"
"..."
양아치라면 설마 은하를 말하는 건가?
'여기서 은하가 왜 나오는 거지'
"부정을 안 하는걸 보니 그렇나보네. 진성아. 너가 이렇게 변해 버린 건 너 때문이 아니야. 모두 그 양아치 때문인 거야"
"뭔 소리야... 그게 왜 은하 때문이..."
"은하? 허참! 이름도 참 다정하게 부르네"
꽈악
나긋나긋 했던 수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갑자기 내 손을 강하게 잡았다.
'으윽...!'
"생각보다 친하게 지내나보네...? 난 너한테 여사친은 나 말곤 없는 줄 알았는데"
손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 아파. 손 좀 놔줘..."
"..."
"잘못했어... 그러니까 손 좀 제발..."
기어가는 목소리로 수아에게 간절히 빌었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인지 그동안 헬스로 몸을 단련한 나였지만 수아의 손 한 방에 아무런 반항할 수 없었다.
'시발... 대체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의 내가 너무나도 처량하게 느껴졌고 왜 내가 이런 고생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억울함이 바닷물이 밀려오듯이 쏟아졌다.
'다시 과거로 돌아갔으면...'
"시발련아 손 좀 놔 달라고 하잖아"
타악
"으윽...?!"
그렇게 고통을 호소하며 수만 가지에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웬 커다란 손이 등장해 수아의 손목을 강하게 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했는지 나를 꽉 잡던 손이 놓아졌고 자연스럽게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 개 같은 년. 사람 병신만들려고 그렇게 잡았냐? 손이 시퍼렇다 못해 검게 변해 버렸네"
"어떤 개념없는 년이 어디서...!"
익숙하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에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
"..."
가슴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미친 듯이 올라왔다.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감정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유진성 그만 일어나"
가장 보고 싶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가서 나 밥해 줘야지"
내 앞에 서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