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의심
* * *
"하아... 오늘 진짜 즐거웠어요! 형도 그렇게 생각하죠?!"
"... 말 걸지마라. 대답하기도 힘들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 파죽지세가 된 나와는 달리 아직도 흥분에 잠긴 재현이가 옆에서 신나게 떠들어댔다.
'뭔 놈의 콘서트를 4시간이나 처하는 거야'
처음에 1시간, 아니 크게 잡아 2시간 까진 나도 그럭저럭 즐기는 추세였건만 3시간이 흐르고 4시간까지 시간이 지나게 되니 보는 내가 다 진이 빠지는 지경이었다.
"그래도 형 덕분에 이렇게 친필 싸인이 담긴 앨범도 얻고... 저희 다음에 또 가요!"
"꺼져 미친놈아. 이런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해"
앨범을 소중하게 만지는 재현이를 보고 질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살면서 처음 가보는 콘서트였지만 두 번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조용히 다짐한 나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지하철을 몇 개 더 갈아 타고 어느덧 처음에 만난 장소에 돌아왔다.
"그래. 들어가서 쉬고 뭐 어쨌든 오늘은 고마웠다"
"조심히 들어가요 형!"
멀리서 손을 흔드는 재현이를 보고 나는 대충 손을 휘저었다.
"하아암... 존나 피곤하네. 빨리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길게 하품을 내뱉으며 택시를 잡았다.
정말인지 스펙타클한 하루였다.
***
"왔냐? 존나 늦게 왔네"
힘든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니 은하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닌 왜 안잤냐? 그냥 먼저 자지"
"아니 뭐... 언제 오는지 궁금해가지고"
은하가 티비를 끄면서 말했다.
하여간 이상한 것에만 고집적인 녀석이다.
"밥은 먹었고?"
"응. 배달 안시키고 먹었어"
"잘했네. 집에 밥이 있으면 밥을 먹어야지. 배달 음식 좀 그만 먹고"
설거지까지 다 해놨는지 주방이 깨끗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간단하게 환복을 한 뒤 다시 거실로 나왔고 소파에 누워 있는 은하 옆에 털썩 앉았다.
"웬일이야? 설거지까지 다하고"
"나 잘했지? 빨리 칭찬해 줘"
얼씨구. 새끼가 귀엽기는.
"... 그래. 존나게 잘했어요 우리 은하 어린이"
"... 아니 칭찬하면서까지 욕을 처하고 있어 이 새끼는"
"어쨌든 칭찬이잖아?"
내 말에 어이가 없었는지 은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뭐. 그건 대충 넘어가고 콘서트는 어땠냐?"
"말도마. 힘들어서 뒤지는 줄 알았다"
죽어 가는 말투로 콘서트에서 있었던 일들을 은하에게 털어놓았다.
은하는 묵묵히 내 얘기를 들었고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왠지 모르게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 갔다.
"... 아웃스타 DM은 지랄. 연예인이라는 년이 어딜 일반인한테 찝쩍거리고 있어?
"아 몰라. 어차피 아웃스타도 안 하는데. 나중 가면 잊혀지겠지 뭐"
"... 쯧. 그래서 실제로 본 라인식스는 어땠냐? 역시 보정 빨이였어?"
"..."
뭐야? 그 기대한다는 눈빛은.
이 새끼는 전부터 그러더니 왜 갑자기 라인식스한테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는 거야?
진지한 은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유독 이상한 것에만 고집을 부리는 은하였다.
'실물이랑 영상이랑 차이가 어땠냐고?'
곰곰이 가까이서 본 라인식스의 얼굴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실물이 훨씬 낫던데?"
"..."
"키도크고 얼굴도 예쁘장하게 생겼고 옷빨도 잘 받는 게 완전..."
"아 됐어. 더 이상 듣고 싶지가 않아"
뭐야 시발 지가 물어 봤으면서 승질은 왜 내는 거야?
어딘가 뚱해 보이는 은하를 잠시 바라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피곤하니까 먼저 들간다"
"... 들가든가 말든가"
"아니 갑자기 지랄이야 이 새끼는"
설마 진짜 자격지심이 있는 거야? 그 천하의 서은하가?
'... 새끼가. 외모가 그렇다는 거지 난 너가 걔네들 보다 몇백 배는 낫다고 생각하는데'
하여간 이 새끼도 참 별난 년이다.
'내일은 또 같이 마트에 가기로 했는데'
뭐 어쩌겠는가. 갑이란 놈이 을에게 삐졌는데 을이 숙이고 들어가야겠지.
내일 장에 가서 은하가 좋아하는 식재료들이나 잔뜩 사야겠다.
지가 좋아하는 걸 먹으면 적어도 기분이 풀리겠지 뭐. 워낙 단순한 새끼니까.
"에휴. 잠이나 자자"
갑자기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다음날.
"뭐 해. 빨리 안 나오고"
"아 알았어. 지금 나간다니까"
"아니 시발 그 말만 지금 9번째야 이 미친년아!"
점심을 먹고 서로 나갈 준비를 했는데 서은하 이 미친년이 30분째 방에서 안 나왔다.
이에 참다못한 내가 버럭하고 소리를 질렀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고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무렵 드디어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도대체 뭘 하길레 이제야 나오는 거...?"
'... 어?'
??????
"..."
"..."
화를 내기 위해서 입을 열었는데...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은하가, 그 거만한 표정에 은하가 난생 처음으로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 어, 어떠냐? 쬐끔 꾸며봤는데..."
"..."
"보, 보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말해 봐...! 존나 부끄러우니까..."
"..."
은하가 발끈거렸지만 난 여전히 입만 벌린 체 말을 할 수 없었다.
평소에 입고 다니던 어두운 계열의 티와 청바지가 아닌 새하얀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검게 태닝한 피부와 하얀색의 원피스. 어떻게 보면 서로 상극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피부가 짙은 사람들은 피해야 하는 패션이지만 오히려 너무 상극이라 그런지 왠지 모르게 잘 어울렸다.
"... 이상해...? 역시 그냥 원래 입던 대로 입는 게..."
"아니야! 잘 어울리는데...! 근데 왜 갑자기 그런 옷을 입은 거냐?"
"아니 그냥 뭐... 오늘은 좀 색다르게 입어보고 싶어가지고..."
"... 그래?"
사람이 평소에 안 하던 짓하면 죽을병에 걸렸다는데 설마...?
꽉
"응? 손은 왜..."
내가 은하의 손을 잡자 은하가 눈을 크게 뜬 상태로 나를 쳐다 봤다.
원래는 이런 얘가 아니었는데. 혹시 모르니 한마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어디 아프거나 그런 게 있으면 꼭 말해라"
"... 그런 거 아니라고 시발아"
"그러지 말고 비밀은 꼭 지켜줄 테니까..."
그 말에 은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강하게 쳐 냈다.
"지랄 좀 하지 말고 빨리 나가기나 하자"
"아니 근데 이 날씨에 그렇게 입으면 존나 추울 것 같은데"
"아 몰라. 여잔 그런 거에 신경 쓰는 게 아니야. 대충 패딩하나 입고가면 되겠지"
그러면서 롱패딩을 입는 은하였다.
나는 그런 은하를 잠깐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나와 은하는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휘이잉
"..."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야 뭐 든든하게 입은 상태로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은하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 춥지?"
"뭐래. 시원하기만 하구먼"
말은 그렇게 하면서 맨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모습이 참...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애써 못 본 척을 하고 그렇게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마트에 들어갔다.
"아..."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따뜻한 히터 바람이 나와 은하의 몸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좋냐? 따뜻하니까?"
"... 아닌데? 더워서 죽을 것 같은데?"
"병신. 꼴에 이상한 자존심만 있어가지곤"
하여간 웃긴 새끼다.
카트를 끌면서 여러 식재료들을 담았다.
걔중에는 은하가 좋아하는 삼겹살부터 시작해가지고 채소와 과일등 꼼꼼하게 장을 봤다.
"야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그래 갔다 와. 난 수산물 코너에 있을 테니까 글로 와"
은하가 미묘한 표정을 지은 체 자리에서 이탈했다.
떠나간 은하를 뒤로하고 나는 계속 카트를 끌었고 꼼꼼하게 유통기한을 확인하던 도중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띠리링
[성수아]
"..."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잊을 만 하면 자꾸 연락이 오니까 시발. 미치겠네'
인상을 굳히며 휴대폰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수아의 전화를 안 받은 적은 없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을 경우 이어질 미래가 너무나도 뻔히 보였다.
머리로는 늘 이런 관계를 어서 빨리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생각은 생각에서만 그칠 뿐이었다.
어쨌든 심호흡을 한번 내뱉은 뒤 통화 버튼으로 손을 가져다 댔는데.
우당탕
'... 욱?!'
그때 갑자기 뒤에서 뭔가가 나를 들이박으며 잡고 있던 휴대폰이 공중으로 붕 뜨더니 유리 바닥으로 처박혀 버렸다.
"아으으..."
예상치 못한 충격에 나는 고통을 호소하며 나와 부딪힌 뭔가를 바라봤다.
내 뒤를 급습한 무언가는 아까부터 마트에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여자아이였다.
"지우야! 아빠가 마트에선 뛰어다니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잖아!!"
뒤늦게 아이의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이쪽으로 달려와 아이를 혼냈고 내게 고개를 숙여가며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다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켜서 일어난 일이에요"
"아, 아니에요. 어린 나이인데 그럴 수도 있죠"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것에 부담감을 느껴 괜찮다고 말했지만 남자는 계속 사과를 하며 혹시 모른다고 내게 명함 한 장을 건네주고 아이와 함께 자리를 떠나버렸다.
"끄응... 별꼴을 다 당하네"
그래도 다행히 큰 부상은 당하지 않은 것 같았고 작게 투덜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집었다.
"... 어라?"
'뭐야 시발? 이거 왜 안 켜져?'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지 휴대폰이 켜지지가 않았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계속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그 어떠한 빛도 볼 수 없었다..
'아... 진짜 개지랄이네'
몇십 번을 눌러봐도 켜지지 않는 휴대폰에 크게 한숨이 내뱉어졌다.
아무래도 아까 바닥에 떨어지면서 휴대폰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