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콘서트(3)
* * *
[255번분! 255번분 안계시나요?]
"혀, 형!! 형 255번이잖아요!!"
재현이가 호들갑을 떨며 내게 말했다.
뽑힌건 난데 마치 자기가 뽑힌 듯 나보다 더 흥분한 재현이였다.
퍼억
'어어...'
"뭐 해요 빨리 안나가고?! 저러다가 재뽑기 하겠어요!!"
"아니... 이게 왜 내가 당첨된거야..."
억지로 나를 일으킨 재현이를 잠시 바라보다 투덜거리며 무대쪽으로 걸어 나갔다.
정말 아무런 기대도 안 했는데 이렇게 당첨이 되니 기쁨 보단 얼떨떨한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 아주 그냥 부러워 죽겠다는 눈빛들이네'
무대로 나가면서 질투와 시기의 시선들이 내게 쏠려왔다. 저 사람들 처지에선 이런 내가 부럽겠지만 뭐 어떡해 꼬우면 지들이 나보다 운이 좋던가 그래야지.
'그리고 기왕 뽑힐 거면 아까 전에 뽑히던가. 멤버들과 포옹하기가 뭐야 시발'
앞에 있는 사람들은 백화점 상품권부터 시작해가지고 정말 별의별 상품들을 받아갔는데, 이건 뭐 내 처지에선 전혀 쓰잘 때기가 없는 상품이었다.
[네 225번분이 나와주셨습니다. 딱 이제 마지막에서 뽑히셨는데 기분이 남다르시겠어요?!]
무대에 올라가자 MC가 오두방정을 떨며 물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MC도 TV에서 몇 번 본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막차를 타신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어중간 하게 서있는 내게 MC가 마이크를 건넸다.
나는 마이크를 쥐어 잡고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너무 좋네요"
[... 네에! 그러시군요. 대답은 간결하시지만 그 안에서 저는 이분이 감동을 많이 받으셨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짧은 대답에 당황했는지 MC가 급하게 포장을 해줬다.
역시 프로는 프로인가 보다. 내가 듣기에도 존나 성의없어 보이는 대답이었는데 이렇게 포장을 해주며 말하다니.
[자! 이제 기다리시던 포옹을 할 텐데요 255번님은 라인식스의 멤버들 중 어떤 멤버를 가장 좋아하시나요?]
"... 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무대에 서 있던 도중 이어지는 MC의 말에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 어 저는..."
잠시 얼을타다 떨리는 동공으로 라인식스를 바라봤다.
라인식스의 멤버들은 나를 보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줬고 나 역시 억지 미소를 지으며 멤버들을 둘러봤다.
'좆됐다'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선 내가 어떤 멤버와 포옹을 할지 고민하는 모습으로 보였겠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라인식스의 팬이 아니다. 이건 뭐 지금 상황에선 별로 상관이 없겠지만 문제는 내가 팬이 아니라서 멤버들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모르는데 어떤 멤버를 좋아한다는지를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뭇거리며 라인식스를 바라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상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르셨나요?]
"자, 잠시만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라인식스 콘서트장에서 멤버들의 이름을 모르겠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분이요 저분이요 하는 건 미친짓이었으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야. 라인식스를 얼마나 좋아하시면 이렇게 오랫동안 고민을 하시는 건지. 이분이야말로 찐 팬중에 찐 팬이시죠!]
"..."
저거 지금 빨리 고르라고 돌려까는 것 같은데. 확실히 고민하는 것 치고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가기도 했고.
'시발 어떡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재현이가 멤버들을 알려주겠다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고 들어 놓을 걸'
반쯤 포기한 체로 마이크를 만지작거렸다.
더 이상 버티기엔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것 같으니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시발... 단 한 명이라도 알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결과론적인 생각이지만 후회를 안 할 수가 없었다.
한 번에 선택으로 일이 이렇게 되다니. 할 수만 있다면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저는요..."
[...]
"..."
[좋습니다! 어느 누구도 버릴 수 없다는 이분을 위해 멤버들 전원과 포옹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네?!"
[이러면 충분하시겠죠? 제가 그동안 여러 콘서트의 MC를 맡으며 이분 만큼 간절한 팬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어라? 왜 얘기가 이렇게 흘러가는 거지?
[정말인지 욕심쟁이가 따로 없으시군요! 하하하...]
나는 멍하니 MC를 바라봤다.
생각지도 못한 동아줄이 내게 내려온 것이었다.
[어때요? 만족하십니까?!]
"네, 네네네!! 만족해요!!"
[하하... 그러면 만족하신 만큼 크게 함성을 질러 주세요!]
"와아아아아!!!!!"
함성이야 그까짓 거 백번도 넘게 지를 수 있지.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있는 힘껏 함성을 지르는 내 모습의 라인식스와 MC가 놀라워하며 박수를 쳤다.
[네에! 정말 재밌으신 팬분이네요. 그럼 시간 관계상 포옹은 짧게씩만 하는 걸로 하고 이쪽 지수씨부터 차례대로 포옹을 하겠습니다!]
MC의 말대로 포옹은 짧게 짧게씩 진행됐다.
한 명씩 안을 때마다 MC가 자연스럽게 멤버들의 이름을 불렀고 뒤늦게 라인식스 멤버들의 이름을 알게 된 나였다.
그렇게 그룹의 리더인 지수부터 시작해가지고 라인식스의 멤버들과 포옹을 했고 이제 마지막 멤버인 J가 남았는데.
"그때 그분 맞죠? OO대학교 때 저희 사이에서 사진찍으신 분"
"... 네?"
"저 이름도 기억나요. 아마 진성씨였던가?"
J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J를 바라봤다.
"그걸 어떻게 기억을..."
"당연히 기억하죠. 제가 그날 사진찍으면서 약속했잖아요. 진성씨를 잊지 않겠다고"
J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약속은커녕 완전히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로선 그런 J의 행동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니 시발 이곳의 나는 도대체 뭔 짓거리를 하고 다닌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평범한 일반인이 아이돌과 약속한거지? 왜 계속 알지도 못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거야.
"그때 진성씨가 워낙 무뚝뚝 하셔가지고 저희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 설마 이렇게 극성 팬이실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아... 네"
극성팬이라니. 난 방금 5분전까지만 하더라고 멤버들 이름도 모르는 문외한이였는데.
어색한 미소와 함께 J의 품으로 들어갔다.
지금의 내 처지에선 이러한 오해를 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민폐를 끼치는 것보단 오해가 쌓이는 게 더 낫지.
"혹시 아웃스타 하시면 DM걸어 주세요. 원래는 안 되는데 진성씨 만큼은 제가 꼭 답장 드릴게요"
J와 포옹을 하며 그녀가 귓속말로 조용히 내게 말했다.
'아웃스타는 또 뭐야 시발. 진짜 별걸 다 역전시키네'
뭐 어쨌든 J와의 포옹도 마치고 라인식스의 싸인이 담긴 앨범까지 받아 가며 나는 자리로 돌아갔다.
"옛다. 이건 너 가져라"
좌석에 털썩 주저앉으며 앨범을 재현이에게 건넸다.
팬이 아닌 내겐 필요가 없는 물건이였고 애초에 재현이가 콘서트를 같이 보자고 안 했으면 못 받을 물건이였다.
"형..."
내 말에 감동을 받았다는 목소리로 재현이가 조심스럽게 앨범을 받았다.
뽀로통했던 재현이는 이미 없어진 지가 한참이었다.
"형. 근데 아까 사회자가 어떤 멤버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이름을 몰라서 침묵한 거예요?"
"... 뭐 어쨌든 잘 해결됐으니까 이러면 된 게 아닐까?"
그 말에 재현이가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지만 이제는 반응을 하기도 귀찮았다.
재현이는 열심히 내게 설교를 하다 공연이 다시 시작되고서야 관심을 돌렸다.
진이 다 빠져 버린 나는 멍하니 라인식스를 바라보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에 들어갔다.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라...'
학교 축제때 라인식스와 함께 찍은 사진. 모두가 환하게 웃는 반면 사진 속 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는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은 걸로 아는데 뭐 때문에 라인식스가 나를 기억하는지를 도통 예상할 수가 없었다.
'시발. 이렇게 역전이라도 될 거였으면 그전에 있었던 기억들도 같이 줘야 되는 거 아니야? 답답해서 미칠 것 같네'
하여간 정말 앞길을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이다.
[너와 함께 저 길을 건너며...]
휴대폰을 집어넣고 다시 무대를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아까 그 J라는 멤버가 내 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꺄아악!! J언니가 나를 보며 윙크를 날려주셨어!!"
"뭐래 이놈아! 나한테 날려준 거거든?!!"
갑작스러운 J의 윙크에 이쪽에 위치한 팬들이 괴성을 질렀고 나는 J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DM걸어 주세요. 원래는 안 되는데 진성씨 만큼은 제가 꼭 답장 드릴게요]
'DM은 무슨 앞으로 너랑 난 다시는 볼일이 없을 거다 임마'
현생을 살아가기도 바쁜데 연예인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우리들의 밝디 찬 미래를 향해 나는 노래할 거야~]
"..."
조용히 라인식스의 노래를 들었다.
뭐 그래도 노래 하나 만큼은 기깔나게 잘 부르는 음색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