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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 속 처녀 지키기-63화 (63/72)

〈 63화 〉 스키장(5)

* * *

"으어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역대 최고로 강한 숙취를 느끼면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나 왜 여깄냐..."

비몽사몽 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잠시 생각이 멈췄다.

내가 있는 곳은 거실이 아닌 방이였다.

분명 필름이 끊킬 때까지 술을 들이마셨지만 거실에서 끊킨걸로 아는데 꼴에 남자라고 나만 이곳으로 옮겼나보다.

어지러운 몸을 이끌고 나는 거실로 나갔다.

"... 세상에"

그리고 거실의 풍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바닥에 나돌아다니는 술병과 조금씩 남아 있는 안주들, 그리고 그 난잡한 사이에서 사이좋게 누워 있는 두 자매들까지.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 그런데 주현씨는 어디에 있는 거지?'

엉망이 된 체 잠을 자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주현씨를 찾으러 주변을 둘렀다.

보글보글­

'? 어디서 뭔가 끓는 소리가...'

"일어 나셨네요"

"아... 네"

주현씨는 부엌에 계셨다.

분명 내 기억으론 주현씨 역시 술을 무진장 많이 마신걸로 아는데 나와는 되게 멀쩡하게 보였다.

'저 사람은 숙취도 없나? 어떻게 저렇게 편안 할 수가 있지?

보니까 해장 할 음식을 만드는 것 같은데 아마 도와주겠다고 말하면 또 씹으시겠지?

"괜찮으니까 쟤네 둘 좀 깨워주세요"

"... 넵"

혹시나 해서 물어 봤는데 역시나였다.

괜히 머쩍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바닥에 누워 있는 서씨 자매들을 깨웠다.

잠시 후 대충 치워진 식탁에서 우리는 옹기종기 모였고 주현씨가 만든 해장국을 먹으며 속을 달랬다.

"... 근데 난 누가 옮긴 거야? 내 스스로 방에 들어간 기억은 없는데"

"후르륵? 아 그거 원래는 내가 옮길려고 했는데 은하가 후배님 몸에 절대 손을 못 대게 해가지고"

보라 선배가 열심히 숟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선배의 말에 자연스럽게 은하에게로 시선이 갔다.

어제 무리하게 달린 여파로 숙취가 제대로 왔는지 내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은하였다.

뭔 별것도 아닌 일로 그렇게 반응한 건지. 지는 나보다 더 술에 취해 있었으면서.

하여간 참 알 수 없는 년이다.

'그럼 은하가 날 옮겨준 건가'

"그래서 주현이가 옮겼어"

"... 네?"

"은하 저 또라이가 날 막는데만 신경을 써서 결국 주현이가 널 방까지 옮겨 줬어"

"..."

'은하가 아니라 주현씨가 나를 옮겨 주셨다고?'

저 마네킹 같은 주현씨가? 시발?

눈이 동그랗게 떠진 나는 멍하니 주현씨를 바라봤다.

하지만 주현씨는 관심도 없다는 듯 시선을 고정한 체 묵묵히 해장국을 드셨다.

"걱정하지 마. 주현이 성격상 무방비한 남잘 건들 년은 아니니까. 야 이거 맛있다. 나 한 그릇만 더 줘라"

"니가 떠 먹어"

"... 에이 씨. 사람 서운하게 만드네..."

칼 같은 주현씨에 보라 선배는 어깨를 으쓱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주현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 옮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역시나 침묵하시는 주현씨였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이셨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순간만큼은 주현씨가 내가 만나 본 사람 중에서 제일 정상이였다.

폭풍 같은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슬슬 돌아갈 준비했다.

쓰레기는 한곳에 모아 한꺼번에 버리고 챙겨 왔던 짐을 싸며 시간을 보내니 벌써 시간이 오후 3시였다.

"좀 웃어 봐 얘들아. 무슨 저승사자도 아니고 표정들이 왜 이러냐?"

"지랄하지 말고 빨리찍기나 해. 그냥 대충 찍으면 될 것이지"

"저저... 하여간 언니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요 쌍년이"

선배의 말에 은하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설득하다 지친 선배는 그대로 사진을 찍었고 그렇게 짧지만 강렬했던 스키 여행이 마무리가 되었다.

"후배님! 종종 연락할게!"

"..."

"우이 씨?! 하늘 같은 선배님이 얘기하는데 이거 반응이라도 좀 해 줘야 되는 게 아닌... 야야! 갑자기 출발하면 어떡해!!

"들어가세요 선배님"

나는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차를 보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어쩌다 보니 주현씨의 차를 얻어타게 된 선배였다.

탕­

"뭐 두고 온 건 없지?"

"어. 다 챙겼어"

"하아암... 그럼 우리도 그만 출발하자"

은하가 길게 하품을 내뱉으며 시동을 걸었다.

"..."

"..."

차안은 조용했다.

아직 숙취가 덜 된 은하는 운전을 하는데 신경을 쏟았고 나 역시 방해가 될까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상처는 괜찮아?"

"으어?"

"지금이라도 병원에 갈까..?"

은하를 방해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것 만큼은 확인하고 싶었다.

'적당히 마시라고 제제를 했어야 됐는데. 정작 나까지도 분위기에 휩쓸렸으니 원'

외적이든 내적이든 환자에게 제일 안 좋다는 게 술이다.

그런데 그 술을 한두 잔 마신 것도 아니고 대충 한 사람당 7병 정도를 마셨으니 당연히 걱정됐다.

"걱정 마. 이제 다 나았어"

"그래도..."

"야 무슨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멍 몇 개 생겼다고 병원을 가냐? 멍은 시간 지나면 없어져"

강경하게 말하는 은하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나였다.

"그런데 있잖아. 어제 보라 선배가 나한테 관심 있다고 했을 때 왜 화낸 거..."

"어, 어흠!! 갈길도 먼데 라디오나 틀어볼까..?"

은하가 내 말에 끼어들면서 라디오를 틀었다.

뭔가 되게 멋쩍여 하는 표정이었는데 자세히 바라보니 은하의 귀가 빨갛게 변해 있었다.

'새끼가 귀엽기는'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묻지 못하게 되었지만 묻지 않은 질문에 대답은 제대로 들은 것 같았다.

더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대화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마 은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 다음 사연입니다. OO님이 보내주셨는데요]

아까보다 좀 더 편안한 침묵 속에서 라디오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예민했던 문제가 해결돼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라디오에 신경이 쏠린 우리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내와 결혼한 3년차 유부남입니다. 저랑 아내는 직장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요...]

사연은 이랬다.

3년차 유부남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아내로 인해 외로움을 타다 우연히 한 여자와 불륜을 하게 됐다는 사연인데 아직 아내에겐 들키지 못했고 자신도 이런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무관심한 아내때문에 불륜 관계를 끊을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간도 크지. 그런 걸 라디오에 제보를 하네'

불륜이라니. 그럴 거면 결혼은 왜 한 거야? 아무리 아내가 자기를 안아주지 않았다고... 뭔가 어감이 이상하긴 한데 뭐 어쨌든 그래도 떡하니 아내가 있는데 이거 완전 미친 거 아니야?

너무나도 저급한 사연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게 된 나였다.

"저럴 거면 그냥 이혼하지. 왜 저렇게 사는 걸까"

"그러게 말이야. 문제를 해결할 생각해야지 그냥 회피를 해 버리네"

"남자도 병신이고 여자도 병신 같네. 쯧"

은하 역시 나랑 별반 다를 게 없었는지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 라디오를 끄고 입을 열었는데.

"난 말이야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남편만 바라보고 살 거야. 저 병신 같은 아내처럼 남편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허이구. 그런 건 남친이나 만들고 먼저 생각하세요"

"어쭈? 난 일부러 안만드는 거거든? 주변에 나 좋다고 하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거 참 부러운 소리다. 나도 시발 주변에 나 좋다고 하는 미친년이 하나 있는데.

잠시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스쳐 갔다.

겉과 속 모두 정상이 아닌 인간. 생각만 했는데 갑자기 피곤해지는 기분이다.

"... 야 근데 있잖아"

"...?"

"... 넌 결혼하면 어떻게 살 거냐...?"

"... 뭐?"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내가 갑자기 결혼을 왜 해?"

뜬금없는 은하의 말에 고개를 돌려 은하를 바라봤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나도 아까 말했잖아"

"..."

애써 앞만보고 얘기하는 은하를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은하는 기어코 내 쪽에 시선한번 주지 않았다.

'... 그래 뭐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 갔으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뜬금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을 수도 있고 정황상 충분히 물어볼 만한 질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진짜 결혼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보수적인 교육관을 가진 나로선 당연히 남자가 가정에서 모든 질서를 유지한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면 반대로 내가 현모양처, 아니 현부양처가 되는 건가?

아무리 역전 세계에 동화가 되겠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본능적인 거부감이 드는데...

"... 아 몰라. 그냥 어찌어찌 살겠지. 지금 당장도 아니고 앞으로 먼 일인데"

"그러냐? 난 니가 아내를 꽉 잡고 살 것 같은데"

"뭐래 병신이. 아무리 그래도 아내로서 대우는 해 줘야지"

어쨌든 이곳에선 여자가 사회적 지휘가 높고 내가 뭐 페미니즘? 그것도 찾아보니까 여기선 마초니즘이라 불리던데 뭐 어쨌든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 기본적인 대우는 해야 맞는 거겠지.

"..."

"..."

왠지 모르게 은하가 묘한 미소를 짓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라디오에서 틀어지는 뽕짝 노래를 들으며 차는 신나게 도로위를 질주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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