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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 속 처녀 지키기-62화 (62/72)

〈 62화 〉 스키장(4)

* * *

치익­

"후우..."

담배에 불을 붙이고 멍하니 스키장쪽을 바라봤다.

새벽까지 스키를 타는 사람들. 넘어지고 또 넘어지지만 오뚜기처럼 일어서서 계속 스키를 타는 모습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쩝. 지금이라도 이용권을 끊을까?'

몸이 근질근질 거렸지만 애써 욕구를 억눌렀다.

그렇게 멍하니 스키장을 바라보다 어느새 담배를 다 피게 되었고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또 꺼냈다.

"와. 울 후배님 담배도 피시네?"

"..."

"나도 하나 줄 수 있을까? 담배를 놓고 와가지고"

담배에 불을 부치던 중 뒤에서 보라 선배가 밝은 미소와 함께 나타났다.

잠시 물끄러미 선배를 보다 담배와 라이터를 건냈다.

"... 어우. 독한 거 피네? 이게 뭔 맛이야..."

"은하는 어떻게 됐어요?"

"... 풋! 서로 관심이 없기는 무슨. 후배님 여친은 아까 소주 한 병 원샷 때리고 뻗어서 자고 있어"

여친 아니라니까 진짜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시네.

그래도 분위기상 선배와 은하가 크게 한바탕 싸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보다.

'근데 은하는 왜 화가 난 거지?'

보라 선배가 내게 고백한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인가? 이해가 안 되네. 누가 보면 지가 날 좋아하는 줄 알겠네.

뭐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건 아닐 테고 그냥 친구로서 나를 걱정했다? 그나마 그게 합리적인 생각인 것 같다.

독한 담배맛에 인상을 찌푸린 선배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 선배 은하랑 이복 자매라면서요"

"어? 은하가 말해줬어?"

"... 혹시 실례되는 얘기였나요?"

내 말에 선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은하가 나와의 관계를 누군가에게 말하는 걸 꺼려 했거든. 용케 너에겐 말해줬나보네"

"... 그래요?"

선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왠지 모르게 보라 선배의 모습이 씁쓸해 보였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을 뿐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그런데 정말 둘이 아무 사이가 아니야?"

"... 아니라니깐요. 은하랑 전 그냥 친구일 뿐이예요"

"... 정말로? 은하도 그렇게 생각할까?"

담배를 털어내면서 보라 선배가 내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야? 뭐 내가 은하랑 사귄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야'

허이구 어림도 없지.

"당연하죠. 은하도 절 친구로 생각하고 있을 걸요?"

명색이 과에서 철벽이라 불려왔던 나다.

선배가 고집이 세다는 것은 알겠지만 나 역시 고집 하나만큼은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쯧. 이건 뭐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냥 바보인 건지"

내 대답에 선배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고집 대결에선 내가 이긴 듯했다.

"그래도 우리 은하 싫어 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는데요"

"풋...! 아주 그냥 한번을 지지 않으려 하는구나 후배님은"

아까 담배를 놓고 왔다면서 어느 순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 선배였다.

미녀의 축에 들은 선배가 저렇게 폼을 잡으니 마치 자세를 잡은 모델처럼 느껴졌다.

'... 은하 보고 싶다'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은하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다르지만 어찌 됐던 같은 핏줄이 흐르는 두 사람.

외모부터 시작해가지고 성격 또한 확실한 차이점이 있었지만 비슷한 부분도 적지 않게 눈에 띠었다.

은하는 여우 같은 고양이 상이였고 보라 선배는 고양이 같은 여우상이였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가 보기엔 거기서 거기였다.

"응? 뭘 그렇게 쳐다봐?"

"... 별거 아니예요"

너무 대놓고 선배를 쳐다봤나보다.

어리둥절해하는 선배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스키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슬슬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다.

더이상 담배 생각이 안 든 나는 선배가 담배를 다 피기 만을 기다렸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조용히 스키를 타는 사람들을 바라봤고 선배 또한 스키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후배님은 외동이야?"

조용한 침묵 속에서 보라 선배가 입을 열었다.

"아니요. 아래로 동생 한 명 있어요"

"그래? 동생하고 관계는 좋아?"

선배의 말에 지금쯤 군대에서 구르고 있을 진아가 떠올랐다.

'관계가 좋냐고?'

최근에 은하 덕분에 진아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이제껏 유지해온 관계를 생각하면 조금 애매한데...

"아무 말도 없는걸 보니 적어도 나쁘진 않나보네"

"...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신 건데요?"

"... 그냥. 그냥 물어보고 싶어서 그랬어"

선배의 담배가 빠르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 이복자매 만큼 애매한 관계가 없어. 난 은하에게 좋은 언니가 되주고 싶은데 은하는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겨하고"

마치 내게 말을 한 게 아니라 혼자 중얼거리듯이 보라 선배는 담담하게 말을 하셨다.

선배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엔 빛이 없었다.

어느덧 다 태운 담배를 손가락으로 튕기시며 선배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다행히야. 전역 하고 오랜만에 은하를 보게 됐는데 얘가 전보다 되게 행복해하고 있더라. 아마 후배님의 영향이 컸겠지"

"전 은하에게 딱히 해준게 없는데..."

"글쎄... 그건 당사자가 알겠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은하는 변했어. 그리고 그 중심에선 후배님이 자리 잡고 있고"

보라 선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대체 나와 은하의 사이에서 무엇을 본 건지 나로선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럼 울 은하 여자로선 어떻게 생각하니?"

여자? 그러니까 뭐 연인 관계에 그런 사이를 말하는 건가?

"그런 생각은 해 본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한번 생각해 봐. 만약에 너랑 은하가 연인의 사이라면 어떨지"

진짜 존나게 질기시다. 그렇게 계속 철벽을 쳤는데 계속 창으로 찌르시다니.

하여간 지금까지 내가 만나 본 사람들 중에선 최고로 끈질기신 것 같다.

'그냥 대충 맞장구쳐주고 끝내자'

결국 선배에게 고개를 숙인 나였다.

"저랑 은하가 사귀는 사이라면..."

옆에서 함박웃음을 짓는 선배를 무시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여자 친구. 보수적인 집안 때문에 살면서 여자 친구 하나 만들어 보지를 못 했다.

내 친구들은 이런 나를 모태 솔로라 그러며 놀려왔지만 딱히 크게 상관을 쓰진 않았다.

그런 내게 그나마 유일하게 있는 여사친이 수아였는데... 한때 이러다간 수아랑 결혼까지 가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은하랑 사귀게 된다면...'

글세다. 지금 관계에서 크게 변할 것 같지는 않은데.

뭐 같이 밥을 먹는다던가 데이트를 한다는 건 일상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 그럼 도대체 뭐가 달라지게 된다는 거지?

섹스? 굳이 차별하자면 그런 성적인 관계 밖에 없어 보이는데. 그런데 사귀려는 목적이 섹스라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무슨 발정 난 개새끼도 아니고.

'스킨쉽도 그 좆 같은 성인용 젠가로 몇 번 해봤고. 이렇게 보니까 진짜 섹스 빼곤 다해봤네'

이렇게 보니 나랑 은하의 관계도 그렇게 정상적인 관계는 아닌 것 같다.

"별 차이 없을 것 같은데요?"

"호오 그래?"

"네. 은하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전 똑같을 것 같아요"

그것이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였다.

내 말에 보라 선배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둘이 평범한 관계가 아니라 꽤 특별한 관계인가 보네"

"몰라요. 듣고 싶어 하시는 대답 드렸으니까 더 이상 그런 얘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그래 뭐. 나도 대충 궁금증은 해결되었으니까"

궁금증은 개뿔. 아주 그냥 궁금하다고 사람도 죽여 버리겠어?

내가 말없이 선배를 째려보자 선배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얼굴로 헤맑게 미소를 지으셨다.

'그래도 웃는 건 은하랑 똑 닮으셨네'

하지만 성격은 은하가 훨씬 양반이다.

설마 은하를 누군가와 비교해서 은하의 손을 들어 줄지는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역시 사람일을 모르는 일이다.

"그럼 후배님. 난 어떻게 생각해?"

"... 네?"

"아까 숙소에선 장난으로 대답한 거 다 알아. 진심으론 어떻게 생각해?"

보라 선배가 장난기가 가득한, 하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죄송한데 저랑은 잘 안 맞으신 것 같아요"

"왜? 나 이래 봬도 나 좋다는 남자들이 쫘악 깔려 있는데"

그럼 시발 그냥 그중에서 고르지 왜 자꾸 지랄을 하는 거야.

"됐어요. 추우니까 전 이만 들어갈래요"

"어어? 후배님? 지금 하늘과도 같은 선배의 말을 무시하는 거야?"

'하늘님은 니미'

옆에서 지랄을 하는 선배를 무시하고 나는 숙소로 들어갔다.

"같이 가요 후배님~"

"... 아오 시발"

뒤에서 보라 선배가 쫄래쫄래 내 뒤를 따라왔다.

하여간 여기 서씨 자매들은 둘 다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얼굴만 반반하지 성격들이 그모양이니'

아무튼, 나와 보라 선배는 그렇게 숙소로 돌아갔다.

우리는 계속 술을 마셨고 중간에 일어난 은하 또한 잠에서 깨자마자 아무일 없다는 듯 소주를 들이마셨다.

분위기는 활기찼고 나 역시 필름이 끊킬 때까지 술을 마셨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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