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스키장(3)
* * *
10분도 안돼서 돌아오게 된 숙소.
"아니 난 정말 괜찮다니까"
"..."
"봐봐. 걷는 것도 멀쩡하고 살짝 굴렀지만 다친 곳도 없는..."
"아가리 여물고 옷이나 벗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은하를 간단하게 무시하고 강제로 은하의 옷을 벗겼다.
어느새 얇은 티 한 장까지 남겨둔 상황. 나는 망설임 없이 하얀색에 티를 벗겼다.
"이런 미친..."
순간 나도 모르게 욕설이 내뱉어졌다.
팔부터 시작해가지고 등쪽과 옆구리, 그리고 가슴 윗쪽 부분까지. 은하의 몸엔 크고 작은 멍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야아... 아무리 내가 남자라곤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면 부끄러운데..."
"넌 지금 상황에서까지 장난을 치고 싶...! 하아. 화내서 뭐 하겠냐. 약좀 가져올 테니까 그대로 있어"
혹시나 해서 간이 응급 키트를 가져 왔는데. 이렇게 빨리 써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나마 뼈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걸 다행이라 여겨야 되는 건지 원'
키트에서 멍이 들었을 때 바르는 약을 꺼내 손에 듬뿍 뿌렸다.
"으허으어억...!! 좀 살살 발라!!"
"살살 바르긴 무슨, 넌 좀 고통을 느껴야돼. 그래야 경각심이 생기지"
하여간 지 몸 소중한 건 몰라가지고. 나는 일부러 꾹꾹 멍 자국을 누르며 약을 발랐다.
'... 에이 씨. 사람 마음 속상하게 다치기나 하고'
짝
"?!?! 왜, 왜 때려!!"
"뭔 소리야? 약 발라주고 있는 건데"
"약을 어떻게 바르길레 등 쪽에서 소리가나?!"
"아 몰라. 이제 다 발랐으니까 옷이나 입어"
마지막 자국까지 꼼꼼히 약을 발라주고 은하는 잠깐 나를 노려보다 작게 투덜거리며 옷을 입었다.
"... 몸 상태를 보니 오늘은 더 이상 스키는 못 탈 것 같네"
"... 시발. 딱 한 번 타고 병자 신세가 되버렸네"
"쯧. 보일러 좀 올릴 테니까 방에 들어가서 쉬고나 있어"
속상한 마음을 숨기지 않은 은하였지만 지금 몸으론 어쩔 수가 없었다.
'어제 오랜만에 스키장 간다고 들떠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끝이 나버리네'
풀이 죽은 체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가는 은하를 보니 내가 다 침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난 쉬고 있을 테니까 넌 좀 더 놀다 와"
하지만 내 발은 차마 방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런 내 속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 은하는 작은 미소와 함께 빨리 꺼지라며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다친 건 내가 다친 거지 너가 다친 게 아니잖아. 나는 괜찮으니까 가서 놀기나 해"
"..."
"스키장이야 뭐 다음에도 가면 되니까"
결국 강제로 떨어진 축객령과 함께 방에서 쫓겨난 나였다.
'그래. 스키장이야 뭐 다음에 같이 오면 되니까 나라도 즐기자'
은하 또한 내가 자기 때문에 이러는 것에 부담을 느낄 것이다.
밖으로 나오고 잠시 커다란 숙소를 응시하다 나는 스키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덜컥
"... 뭐야? 왜 벌써 왔냐?"
"..."
"나 때문에 너 까지 이럴 필요는 없다니까? 어서 가서 놀..."
"뭐래 병신이. 나도 다쳐서 온 건데"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은하에게 대답한 뒤 나 역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바로 옆에서 은하가 당황해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대충 무시하고 은하에게 덮여져 있는 이불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으쌰... 침대가 커서 그런지 둘이 누워도 공간이 남네"
"... 아니 나간지 5분도 안 된 것 같은데 어딜 다쳤다는 거야"
"아이고 당사자가 다쳤다고 하면 다친 거지 뭐 이리 말이 많아"
내 말에 은하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고 나는 그런 은하의 시선을 즐기며 팔다리를 쭈욱 뻗었다.
"... 뭐 한 게 없는데 몸이 피곤하네"
"어디를 다쳤는데? 심하게 다친 거면 치료라도 해야 하는거 아니야?!"
"됐고 난 잠 좀 잘 테니까 좀 이따 깨워줘라~ 하여간 만지기만 해 봐 시발. 아주 그냥 존나게 패줄 테니까"
"야이 씨..."
난감해 하는 은하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픈 곳은 없었다. 무슨 길을 가다 넘어진 것도 아니고 내 몸은 아주 정상이었다.
"... 진짜 잘거냐?"
"..."
"... 모르겠다. 그럼 나도 잠이나 자야지"
그러고는 내가 가져간 이불을 쬐끔 자기 쪽으로 가져간 체 내 쪽으로 몸을 붙였다.
단둘이, 그것도 여자랑 하나의 침대에 누워 있는 상황.
이상하게도 그 여자가 은하라서 그런지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
조용하고 편안했다.
이불에 스며든 은하의 냄새를 맡으며 나는 서서히 잠에 빠졌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덧 저녁이 밝았다.
치이익
"야이 고기도 아직 안구워졌는데 뭔 벌써 술을 따라"
"뭐 어때. 위에 기름칠 좀 하기 전에 소독한다고 치지 뭐"
버너 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 소리와 함께 옆에선 은하가 신나게 소맥을 말고 있었다.
"자 건배~"
짠
4개의 잔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식탁 위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누구 하나 말할 것 없이 모두 한 번에 술을 들이마셨다.
"크으... 이 새끼가 꼴에 진성 후배님이 있다고 소맥 비율을 씹창내버렸네"
"뭔 소리야. 쟤가 얼마나 술을 잘 마시는데. 그리고 난 술 마실 때 장난질은 안쳐"
"이상하다. 뭔가 맛이 미묘한데..."
보라 선배가 입맛을 다시며 은하를 바라봤지만 그 누구도 선배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먹어. 다 익었네"
"그래~ 너도 좀 먹으면서 굽고. 힘들면 내가 구워줄게"
"언니는 씨발 고기 하나만큼은 뒤지게 못 굽잖아"
먹음직스럽게 익은 고기에 젓가락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저녁 식사 겸 술파티가 시작되었고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그래서... 너희 진짜 사귀는 사이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도대체 몇 번을 처말해야 하는거야"
"야이년아. 내가 이해가 안 돼서 그래. 세상에 어떤 남녀가 같이 사는데 아무런 사이가 아닐 수가 있냐고... 그러면 반대로 진성 후배님은 우리 은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 저랑 은하는 그냥 좋은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어요 하여간"
답답하다는 듯 보라 선배가 소주 한 병을 통제로 들이마셨다.
그 많던 고기는 다 구워진지가 예전이었고 주현씨가 간단한 안주를 만들어 주면서 본의 아니게 2차 청문회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게 안봤는데. 고집 한 번 더럽게 쎄시네'
과에서 자칭 여신이라 불려오며 많은 이들의 마음을 뺐어간 보라 선배. 현실은 그냥 어린아이 같은 때쟁이였다.
이렇게 보니까 은하랑 비슷한 것 같기도하고... 하지만 은하도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이 다가 아닌 것 같다.
"은하 너 진짜 진성 후배님한테 관심이 없다는 거지...?"
"아오. 그냥 닥치고 술이나 마시면 안 돼?"
은하의 말에 보라 선배가 예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응시했다.
텁
'...?'
그리고 내 어깨의 살짝 손을 올려놓고선 천천히 입을 여셨다.
"그럼 내가 진성 후배님에게 고백해도 되는 거지?"
"... 뭐라고?"
"진성 후배님이 딱 내 스타일이여서 나는 관심이 있거든. 정말 다행히도 울 동생과 후배님이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니까 대쉬 정도는 해볼 만 하지"
그러면서 보라 선배는 내게 윙크를 날리셨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나는 저항할 타이밍을 놓쳤고 은하는 어버버 거리며 나와 보라 선배를 바라봤다.
"그,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언니가 왜 진성이한테 관심이 있어?!"
"왜? 관심이 있을 수도 있지. 난 후배님 처럼 다소곳한 남자를 좋아하걸랑"
"다소곳?? 이진성 저 새끼가 다소곳하다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말문이 막혔는지 입만 떡하니 벌린 은하였다.
"기왕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진성 후배님은 내가 고백하면 받아 줄 생각이 있어요?"
"..."
보라 선배의 말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은하를 바라봤다.
'어우 시발. 눈이 튀어나오다 못해 빠져 버리겠네'
은하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정확히 말하자면 내 입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순간 장난기가 돈 나는 은하와 선배의 눈치를 보다 작게 입을 열었다.
"... 글쎄요"
"글쎄요? 그 말은 적어도 부정적이지는 않다는 거네?"
"저야 모르죠. 저도 아직 여자 친구는 없으니까 말이에요"
보라 선배의 미소에 나 역시 미소로 화답을 해주었다.
물론 솔직한 마음으론 선배에게 관심이라 할 것이 1도 없었지만 그냥 내가 이렇게 대답하면 은하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싶어 즉설적으로 대답했다.
"이,이이....!"
"응? 뭐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냐 서은하야?"
"왜 자꾸 이런 시건방진 장난을 치는 건데...!"
"얼씨구 이게 왜 장난이야. 진성 후배님이 날 좀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장난 하지 말라 했다 서보라..!"
정말로 화가 났는지 은하가 날 선 눈빛으로 보라 선배를 째려봤다.
하지만 보라 선배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거리며 소주를 뜯었고 그런 선배의 행동에 빡이 쳤는지 점점 은하의 표정은 점점 더 썩어가기 시작했다.
드르륵
"...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서 그런데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바람은 무슨 지랄말고 해명이나..."
"그래. 우리 사랑하는 후배님은 바람 좀 쐬고 오세요오~"
"시발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병신으로 보이나?!"
흥분해 하는 은하를 보라 선배가 적절히 만류 하면서 내게 윙크했다.
선배가 만들어 준 틈에 나는 재빨리 옷과 담배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