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 속 처녀 지키기-58화 (58/72)

〈 58화 〉 엇갈림(2)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약속한 31일이 다가왔고 나와 수아는 근처 술집에서 간단하게 술을 마시며 시간을 때웠다.

곧있으면 신정이라 그런지 술집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고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수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성이 넌 새해의 목표가 뭐야?"

"어? 그런 건 안정해 놨는데"

"그래도 한번 정해 보는 게 어때? 간단한 거라도 말이야"

살짝 취했는지 수아가 홍조를 띤 얼굴로 말했다.

수아의 말에 나는 조용히 술을 들었고 수아는 방금 내려놓은 술을 다시 잡고 내가 따르는 술을 받았다.

'새해의 목표라...'

누군가에겐 신정이 의미 있는 날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겐 그냥 1월 1일에 불과했다.

때문에 새해에 이루고 싶은 목표나 그런 걸 딱히 세워 본적이 없었고 내 성격상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았다.

'1월 1일은 1월 1일인 거지 그게 인생에서 뭔 기여를 한다고'

기념일은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외엔 챙겨두지 않는 나로선 뭐 어쨌든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 글세다. 그럼 너는 있냐?"

"나? 나는 말이야... 으음..."

내 물음에 수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술잔을 들었다.

나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들었고 경쾌한 짠 소리와 함께 수아는 순식간에 잔을 비워 버렸다.

"난 말이야... 이번년도에 남자 친구를 만들고 싶어"

"..."

"남자 친구를 만들어서 이것도 해 보고 싶고 저것도 해 보고 싶고..."

나는 묵묵히 수아의 말을 들었다.

보니까 결국에 이 얘기하려고 밑바닥을 깐 것 같은데 들으면 들을수록 참 영악하게 느껴졌다.

이게 그냥 겁이 많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가스라이팅인건지 결과적으론 뭐가 됐든 내 피로감만 늘어날 뿐이었다.

"어때? 나 응원해 줄 거지?"

"... 그래. 꼭 이루길 바래"

"헤헤... 진성이 너도 새해에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래"

수아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남아 있는 술을 입에 털어놓았다.

'술맛 한번 쓰네'

언제나 마셔도 쓴 술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술이 쓰게 느껴졌다.

하지만 맛만 썼을 뿐 거부감은 오늘이 제일 없었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

어느덧 신정까지 30분 정도가 남은 시간.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종 치는 모습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

"우와. 저게 다 종 치는거 보러 온 사람들인가 봐. 엄청 많네..."

"... 춥지도 않나. 뭐 하러 이렇게 모여있는 건지 원"

굉장히 많은 인파들에 나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내 모습에 수아가 작게 미소를 지었고 빽빽하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0시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어우... 술기운이 도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네'

어질어질한 기운으로 생각 없이 주위를 둘러보다 순간 나는 수아의 품에 얼굴을 박았다.

"어어?! 지, 진성아 왜 그래...?!"

"... 잠깐만 몸 좀 빌리자. 머리가 조금 어지럽네"

위에서 수아가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좀 더 깊숙이 수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 그러면 알겠어... 혹시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줘"

"그래. 고맙다"

"... 헤"

왠지 모르게, 아니 이유를 알 것 같은 수아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내게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분명 머리가 어지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수아에게 기댈 정도까진 아니었다. 다만

"사람 한번 뒤지게 많네"

"야 은하야. 진짜로 이따 술 안마실꺼냐? 이게 뭔 집에 남자라도 데려놨나. 요즘 들어 존나 비싸게구네"

"꺼져. 아까 오기 전에 한잔 했잖아. 뭘 또 더 마셔"

수많은 인파들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에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뭉쳐 있었지만 나는 한눈에 은하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가지고 마주칠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때문에 별수 없이 수아의 품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묵묵히 은하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부스럭­

"어어? 진성아 불편해? 너무 어지러우면 그냥 나갈가?"

"... 아냐. 그냥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 줘"

저번에 내가 좋다고 말했던 향수 냄새가 내 코를 찔러왔다.

그때는 수아와의 안정감을 위해 거짓말로 향수가 좋다 말했는데 결국에 돌고 돌아 나를 찌르는 말이 되었다.

'으윽...! 향수 냄새 한번 지독하네'

그렇지 않아도 술 때문에 어지럼증이 있는 상태였는데 역겨운 향수 냄새 때문에 머리가 더욱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은하의 목소리가 점점 작게 들려왔다는 점이다.

혹시나 이 근처에서 자리를 잡았더라면 조금 아찔한 상황이 되었을텐데.

나중에 가서 은하의 목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게 되자 그제야 나는 조심히 수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으... 머리야..."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진성아...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급한 대로 편의점에 가서 약이라도 사갈까?"

"... 됐어. 이제 곧 있으면 시작할텐데"

"그래도... 정 못 버틸 것 같으면 꼭 말해야 해?"

수아가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솔직한 심정으론 수아의 말대로 약이라도 사 먹고 싶었지만 신정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그냥 참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이 옳다는 걸 증명하듯이 거대한 종 앞에 여자 스님이 나오셔서 몸을 풀고 계셨다.

잠시 후 어느덧 0시가 되어 버린 시간.

"..."

"..."

순간 주변이 고요해 지면서 모든 시선들이 앞에 있는 종앞으로 쏠렸다.

곧이어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은 여자 스님이 몸을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하셨고 그 결과.

데앵­

데애앵­

많은 이들이 있는 앞에서 종소리가 시원 명쾌하게 울려 퍼졌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와아아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사람들은 신나게 웃으며 서로에게 덕담을 건넸고 다시 한번 주위는 산만하게 변해 버렸다.

텁­

'응?'

"... 진성아 새해 복 많이 받아"

혼란스러운 주변 속에서 수아가 내 손을 잡은 체 덕담을 건넸다.

"... 그래 고마워.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으응. 우리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

"... 그래"

수아의 환한 게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다.

주머니에 핫팩이라도 쥐었는지 따뜻한 수아의 손길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렁찬 소리를 냈던 종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울려 퍼지며 잦아들기 시작했다.

***

"정말 안 데려다줘도 괜찮아?"

"괜찮다니까. 시간도 늦었는데 너도 어서 들어가 봐. 마침 너 타야 될 버스 오네"

"그래도..."

정류장 앞에서 계속 망설여하는 수아에 나는 괜찮다면서 수아에게 손짓했다.

그렇게 계속 망설여 하던 수아는 집에 도착하면 연락을 하겠다는 나의 약속에 찜찜한 표정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수아를 태운 버스는 시원하게 도로를 달려 나가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나 역시 운 좋게 택시 하나를 발견해 집으로 돌아갔다.

턱­

"네 감사합니다"

부르릉­

"..."

오피스텔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 머리 좀 깰 겸 조금이나 걷자는 생각으로 이곳에서 내렸다.

피로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던 도중.

'으응?'

어둡지만 익숙하게 느껴지는 인영에 유심히 인영을 바라보다 노란 머리색깔을 발견하곤 나는 앞에 있는 사람에게 소리쳤다.

"야 서은하!"

내 말에 은하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무슨 주인을 만난 강아지 마냥 내 쪽으로 달려왔다.

"아니 뭘 달려오기까지 해. 내가 그쪽으로 가면 되는데"

"그게 뭔 상관이야... 그나저나 어디 갔다 왔어? 겁도 없이 뭔 남자애가 새벽에 혼자 돌아다니냐?"

말은 퉁명스럽게 하면서도 표정 하나만큼은 헤맑은 은하였다.

우리는 서늘한 새벽공기를 느끼며 거리를 걸었다.

"... 그래가지고 스님이 무슨 날아오르듯이 점프를 했는데..."

종을 치는 스님이 인상이 싶었는지 은하는 재잘재잘 스님에 대해 얘기했고 나 역시 적절하게 반응해주며 정신을 유지했다.

"참. 그리고 아까 종 치는거 보러 가면서 음습한 커플 한 쌍을 봤거든?"

"..."

"간도 크나 봐. 사람이 그렇게 많은 곳에서 남자가 대놓고 여자 품에 안기더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존나게 헤픈 남자일 거야"

"... 그러냐?"

은하가 역겹다는 듯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은하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헤픈남자라니...'

설마 은하에게 헤프다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물론 그때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저지른 행동이었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듣게 되니 되게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평생을 보수적인 집안에서 보수적인 교육을 받으며 보수적으로 살아온 나였는데 은하의 저 한마디에 과장해서 내 삶이 무너지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 편의점이나 같이 가자"

허망함을 느끼며 암울한 목소리로 은하에게 말했다.

"응? 왜 또. 먹고 싶은 거 있어?"

"담배가 떨어져가지고..."

내 말에 은하는 긍정해 하며 뒤를 돌았고 나 역시 은하를 따라 뒤를 돌았다.

"... 그래 뭐. 엄밀히 말하면 담배도 먹는 거긴 하지"

그렇게 우리는 왔던 길을 돌아서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새해 첫날부터 가장 먼저 하게 된 일은 결국에 담배였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