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상처
* * *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기말시험이 다가왔다.
나야 뭐 틈틈이 공부를 해놓아서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우리 집 주인되시는분께서는 문제가 많았는지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를 않았다.
하루 종일 방안에만 처박혀서 밥도 거르고 급하게 벼락치기를 했으니 원. 보는 사람 처지에선 한심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러게 진작에 공부 좀 하지 지금 당장 이틀 뒤에 시험인데 그게 다 들어오겠냐고'
하여간 쟤는 그냥 뭘 하든 날로 먹으려는 성향이 있어 가지고 그런건 좀 고쳐야 될텐데...
뭐 어쨌든 이건 대충 넘어가도록 하고 마지막 기말시험이 끝이 나고 당연한 말이지만 학교에선 축제아닌 축제가 벌어졌다.
"야! 오늘 한 명도 빠지지 않는 거다?!"
"시험 조진 건 미래의 내가 책임질 문제고 오늘 한번 다 같이 죽어보자!!"
물론 나랑은 상관없었지만 말이다.
...
...
...
라고 생각했는데.
"진성아 이건 3번 테이블, 그리고 이건 5번 테이블로. 아차차 아까 12번 테이블에서 맥주를 추가해 달라고 했지? 조금만 기다려~"
인정한다. 정말 안일한 생각이었다.
'씨발... 아니 마지막 학기가 끝났으면 어디 좋은 곳이나 갈 것이지 왜 다 여기로 몰려드는 거야?!"
맥주가 가득 담긴 맥주잔을 손에 쥐고 나는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평소에도 사람이 많은 호프집이었지만 이렇게 대학생들이 가득한 경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때문에 서빙을 하면서 나를 아니꼽게 보는 시선들도 많이 보였지만 그래도 뭐 슬슬 관심이 떨어지기 시작했는지 달리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굳이 휴학하지 않아도 되겠는데?'
하긴 별 영양가가 없는 찌라시를 6개월이나 불태웠는데 관심이 꺼지는 게 정상이겠지. 이대로 별 탈 없이 계속 시간이 흐르면 다음 학기 땐 편안한 마음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여기 빈 그릇 좀 치워주세요"
"사장님! 맥주 5개랑 감자튀김 주세요!"
"네네 잠시만요!"
뭐 그건 먼 훗날에 일이고 지금은 내 할 일이나 집중해야지.
딸랑
그렇게 호프집의 분위기가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을 때 또 다른 누군가가 문을 열고 호프집에 들어왔다.
순간 호프집에 있는 모든 시선들이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몰려들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시선을 받은 그 여자는 이런 환경이 익숙했는지 대충 손을 내저으며 아까부터 계속 비어 있던 자리에 착석했다.
"언니! 진짜 오랜만이야!!"
"군대는 잘 다녀오셨어요 누나?"
그리고 여자가 자리에 앉자마자 뜨거웠던 분위기가 단숨에 여자를 주체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신보라. 이성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던 내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여자이다.
나이는 나보다 2살이 많은 선배로 아마 여기 있는 학생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을 것이다.
'... 작년에 학교를 졸업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선 또 얘기가 달라졌나보네'
나 역시 약간의 흥미를 가지고 보라선배를 바라봤다.
역전이 되기 전에 학교에서 여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왔는데 대충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지금도 여신이라 불려지는 듯했다.
보통 자신보다 잘생기거나 예쁜 동성을 보면 질투심을 유발하는 경우가 다반인데 저 여자는 남성에겐 선망의 눈빛을, 같은 여성에겐 존경의 눈빛을 한눈에 받고 있었다.
그만큼 대단한 여자라는 것이다.
"... 다음학기때부터 조교로 들어온다면서요?!"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 가지고..."
"그럼 누나를 일 년 더 볼 수 있는 거네요?!"
"에이... 그러지 말고 너도 졸업하면 대학원으로 들어와~ 내가 잘해 줄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선배에 남자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선배를 바라봤다.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여자가 주도권을 가지는 세상에서 예쁜 외모를 지녀서 그런지 성격이 능글맞게 변한 모양이다.
'... 뭐 내 알빠는 아니니까'
어차피 나랑은 크게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저 선배랑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과거를 모르는 나지만 그래도 내 성격상 저런 여자랑 어울리지는 않았을 것 같은...
쨍그랑
"뭐 이 새끼야...! 뭐가 어쩌고 저째?"
"... 내가 틀린 말 했냐! 너 같은 건 사화에서 매장돼야 된다고!!"
그때 갑자기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한쪽 테이블에서 싸움이 발생했다.
싸움을 하는 두 여자 모두 만취를 했는지 얼굴이 시뻘게진 상태였고 참다 못한 한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주먹을 날리면서 난리가 나게 되었다.
'이런 씨발! 싸울 거면 나가서 싸우지 왜 여기서 싸우는 거야!!'
당황한 나는 곧바로 싸움이 일어난 테이블로 달려가 여자들을 말렸다.
"소, 손님!! 여기서 싸우시면 안 되는..."
"비켜 씨발!!"
우당탕
그런 내가 거추장스러웠는지 한 여자가 나를 뿌리치면서 나는 바닥으로 내팽겨졌다.
그렇게 엉덩이에 욱신거림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갑자기 위쪽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저건...?'
나는 떨어지는 물체에 정체를 뒤늦게 깨닫고 황급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잠시 후.
쨍그랑
"아흐으....!!!"
얼굴 바로 옆쪽에 맥주잔이 깨지면서 작은 유리 파편들이 나를 덮쳐왔다.
쪼개진 유리 파편들이 팔에 박히면서 피가 물감처럼 새기 시작했고 손으로 얼굴을 막았지만 온전히 막기엔 무리였는지 뺨에서 따뜻한 액체가 주르륵 떨어지기 시작했다.
쾅
"... 이런 개새끼들이 여기가 싸움판인 줄 아나!!"
뒤늦게 주방에서 나온 사장님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두 여자를 진압했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는 듯했다.
'... 씨발. 진짜 별의별 꼴을 다 겪어보네'
팔과 얼굴에서 자잘한 따가움이 느껴졌다.
일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오늘은 정말인지... 기분이 더러워도 이렇게 더러울 수가 없었다.
스윽
"...?"
"괜찮아요?"
한숨을 내쉬며 착잡한 마음으로 팔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내게 휴지를 건넸다.
"유리 파편이 얼굴 쪽으로 튄 것 같은데... 우선 그걸로 피좀 닦으세요"
"아... 감사합니다"
그 사람은 보라선배였다.
보라선배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멍하니 선배의 손을 바라보다 뒤늦게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일단 선배에게 받은 휴지로 조심스럽게 얼굴에서 떨어지는 피를 닦아냈다.
"으윽...!"
'존나 따갑네 씨발!'
차마 상처 부위에는 손을 댈 수 없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파편이 더 깊숙이 박히면 큰일 날 일이니.
"그렇잖아요. 남자는 얼굴이 생명인데"
"... 네?"
"팔만 박혔더라면 모를까 얼굴 쪽에도 유리가 박힌 것 같은데... 이거 병원이라도 가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
보라선배의 말에 나는 황당함을 느끼며 선배를 바라봤다.
선배의 눈에 악의적인 감정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즉, 순수한 마음으로 그런 말했다는 것이다.
'이게 지금 무슨...'
당연히 나로선 어이가 없었지만 워낙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그냥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보라선배는 마지막까지 병원에 꼭 가보라며 예쁜 미소를 지은 체 자리에서 벗어났다.
"... 하이고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네..."
보라선배가 떠나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호프집을 둘러보았다.
한쪽에선 사장님이 싸움을 일으킨 두 여자를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감시하며 경찰을 기다리고 있었고 뒤늦게 주방에서 지쳐 보이는 모습으로 은하가 나를 바라봤는데.
'뭐, 뭐야...?! 저 누구 하나 죽여 버릴 것 같은 눈빛은'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뜬 은하가 주위를 둘러보고선 세상 무서운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 뭐냐? 너 왜 이런 꼴이 됐냐?"
"...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씨발. 너는 사람 얼굴에 유리 파편이 박혀있는 게 별거 아닌 거라고 생각하냐? 너 병신이야?"
"병신이라니..."
은하의 말에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상하게도 당한 건 나인데 화는 은하가 나보다 더 난 것처럼 보였다.
"... 일단 병원에가자. 이 꼴로 더 이상 일은 못할 것 같네"
"뭘 이런걸로 병원에 가. 나 진짜 괜찮다니..."
"아가리 닥치고 내가 사장님께 말해둘 테니까 옷이나 갈아입어"
그렇게 나는 반 강제적으로 은하와 함께 호프집에서 나왔고 생각을 해보니 지금 시간에 문을 여는 병원이 없어 일단은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은하의 손에 이끌려 집에 있는 응급물품을 이용해 간이 치료를 받게 되었다.
"아씨...! 따가워!!"
"... 그럼 뭐 상처를 소독하는게 따갑지 시원하겠냐?"
"넌 뭔 말을 해도 그딴식으로 하는...! 아이씨! 살살 좀 하라고!!"
그렇게 마지막 상처까지 모두 소독을 하고 상처 부위에 밴드를 붙여서야 치료는 끝이 나게 되었다.
'... 아으 존나 답답하네'
얼굴에 밴드만 몇 개를 붙인건지.... 참으로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밴드를 떼어낼 수도 없었다.
"오늘은 간이 치료니까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고 내일 병원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자"
"굳이 병원에 안 가도 될 것 같은데..."
"지랄하지말고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랑 같이 병원에 갈거니까 뭐 하여튼 도망가기만 해봐. 지구 끝가지 따라가서 잡아 낼 테니까"
"..."
뭔 말을 해도 저렇게 하는건지 원.
은하의 말에 나는 조용히 밴드 주위를 만지작 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