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불안한 만남(2)
* * *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설마 술까지 마시고 들어올 줄이야. 아니 그보다도 이렇게 늦게 들어올 거면 전화 한 통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너는 지금이 몇 시인데...!"
"헤헤헤... 진성이다..."
"아니 웃지만 말고... 아오 진짜 돌아버리겠네...!"
바보처럼 실실 쪼개는 은하에 열불이 났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런 은하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 뭐라고 말을 못 하는 나였다.
와락
"우, 우와앗!! 지금 뭐하는 거야 미친 새끼야!!"
"에헤헤... 진성이 냄새 좋다..."
"야야...! 무겁다고!!"
"헤헤헤...."
그러던 중 갑자기 은하가 나를 껴안았다.
당황한 나는 억지로 은하를 떼어냈고 지독한 술 냄새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살짝만 안겼을 뿐인데 내 옷에서도 술 냄새가 나잖아!'
이건 무슨 옷에 술을 부은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냄새가 나는 건지 진짜.
"헤헤... 아 맞다! 너 주려고 사온 게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실실거리던 은하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는지 주머니 뒤지기 시작했다.
"짜잔! 받아...!"
"이건..."
'... 호빵이잖아?'
은하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다름이 아닌 호빵이었다.
"이걸 왜 나한테...."
"... 집에 오는데... 너무 추워가지고 하나 사 먹었는데... 호빵이 맛있었는데... 갑자기 너 생각이 나가지고 하나 포장했는데..."
"..."
이게 뭔 개소리지? 나랑 호빵이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왜 내 생각이 나는 거야?
"... 그래 고맙다. 잘 먹을게"
은하에게 포장이 된 호빵을 건네 받았다.
아무렴 뭐 어쩌겠는가. 그래도 일단 날 위해 사 왔다는데 고맙게 받아야겠지.
"으응... 혹시 다 식었으면 데워 먹어... 식으면 맛없어 호빵은..."
"알겠으니까 빨리 들어가 자기나 해. 말이 얼마나 꼬이는 거야 얘는"
"헤헤헤...."
거실에서 멀뚱히 서 있는 은하를 억지로 방에 데려갔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돌아오면 단단히 주의를 주겠다고 다짐한 나였는데... 또 이렇게 마음이 풀려 버렸다.
'... 물어보는 거야 뭐 내일 물어보면 되니까;
"... 쯧. 뭐가 그렇게 좋다고 방실거리냐?"
"헤헤... 너가 있잖아..."
"... 에휴 진짜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술이 문제라니까.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적당히 좀 마시라고 해야겠네'
두꺼운 패딩을 벗기고 계속 실실 거리는 은하를 나는 강제로 눕혔다.
마음과 같아선 씻고 자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 은하의 상태로는 힘들 것 같아 이대로 냅두기로 했다.
"... 오늘은 자고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하자"
"..."
"... 벌써 잠들었나 보네"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는지 은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펄럭
엎드려 자는 은하를 일자로 눕히고 나는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은하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방을 나왔다.
철컥
"... 어휴 술 냄새. 또 샤워 해야겠네..."
코 밑에서 풍겨 오는 술 냄새에 나는 갈아입을 옷을 챙기러 방으로 들어갔다.
'... 그런데 진짜 왜 취한 거지? 내가 알기론 진아 걔 술 엄청 못 하는데?'
안 그래도 술을 못 하는 얘인데 더군다나 은하는 주량이 강한 거로 알고 있는데 이게 도통 어떻게 된 일인지 참.
생각하면 할수록 내 머리만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 내일 물어보면 다 알게 되겠지"
시간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옷까지 모두 갈아입은 뒤 나는 뻐근함을 느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자기 전에 물이나 한잔 마시고 자는 게...'
뚝
"..."
자연스럽게 냉장고로 발걸음을 옮기다 아까 은하가 건네줬던 호빵을 발견했다.
내 생각이 나서 구매했다는 호빵. 순간 나도 모르게 호빵에 손을 뻗었다.
바스락
'... 아직 따뜻하네'
식으면 데워 먹으라는 은하의 말이 떠올랐지만 호빵은 아직 따뜻했다.
스르륵
비닐봉지를 뜯고 안에 있는 호빵을 꺼냈다.
그리고 한점 크게 뜯어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 맛있네"
호빵을 달고 맛있었다.
뭐 특별한 재료가 들어간 것도 아닌 평범한 편의점 호빵이었는데 오늘따라 이 호빵이 되게 맛있게 느껴졌다.
작은 호빵을 모두 먹어 치우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
이튿날.
보글보글
얼큰한 냄새가 주방을 진동했다.
"후르릅"
"어우... 좋다"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콩나물국에 청양고추를 팍팍 넣어서 그런지 맛이 기가 막혔다.
"이 정도면 마무리된 것 같고... 이제 슬슬 은하를 깨워야겠는데..."
아침 식사 준비를 마치고 나는 은하의 방으로 갔다.
철컥
"..."
침대에선 은하가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야야. 일어나 아침 차려놨어"
"... 으으"
내가 은하를 흔들면서 부르자 아직 술이 덜 깼는지 은하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엎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촤악
"..."
강제로 이불을 뺐어 버리자 얼굴을 잔뜩 찌푸린 체 은하는 칭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 머리가 깨질 것 같아..."
"허이구. 그럼 그렇게 처마셨는데 당연히 깨져야 정상이지. 콩나물국 끓였으니까 어서 나와서 해장이나 해"
"..."
힘겹게 의자에 앉은 은하는 비몽사몽 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으음...! 맛있다...."
"... 천천히 먹어 임마. 많이 끓였으니까 부족하면 더 갖다줄게"
다행히 콩나물국이 입에 맞았는지 은하는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게 밥을 먹고 있는 은하를 잠깐 흐뭇하게 바라보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나저나 어제는 왜 이렇게 늦게 왔냐? 늦을 줄 알았으면 전화라도 한통하지"
"... 으응?"
"혹시 진아랑 술 마셔서 늦게 들어온 거야?"
내 말에 은하가 멀뚱히 나를 쳐다봤다.
"술을 마시긴 마셨는데... 니 동생 술 되게 못 마시더라? 무슨 양주 두입 먹고 바로 취해 버리던데?"
역시나 둘이 술을 마시기는 했나보다.
"... 그래? 어제 걔랑 뭔 얘기 했는데"
"우물우물... 별건 아니고... 그냥 나랑 너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했고... 그보다도 니동생 이름이 진아였나? 진아 걔 너 엄청 걱정하더라?"
"... 뭐?"
갑자기 이건 또 뭔 소리야?
"막 취하니까 너에 대해서 별의별 얘기를 다 하던데?"
"... 무슨 얘기?"
은하는 자신이 진아에게 들은 말을 내게 털어놓았다.
나는 묵묵히 은하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은하의 말을 들을수록 내 입은 점점 더 벌어져갔다.
"지랄하지 마. 진아가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엉... 보기보다 얘가 많이 착하더라. 오빠도 그렇게 생각할 줄 알고"
"..."
"진짜라니까? 내가 귀여워서 동영상으로 찍어 놓은 것도 있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은하는 어떤 동영상을 틀어놓고 내게 건넸다.
[... 그러니까요... 저희 오빠가 말이예요....]
"..."
동영상은 1분도 안 되는 매우 짧은 동영상이었지만 은하의 말을 증명하는데엔 충분하고도 남을 내용이었다.
"... 잠깐만. 이건 그렇다 치고 너는 왜 늦게 들어온 건데?"
"응? 아 그게 진아를 보내고 나도 돌아가려고 했는데 우연히 아는 언니를 만나가지고..."
"..."
"뭐 어쩌다 보니 한잔하게 됐지. 미리 연락을 했어야 하는데... 미안 해"
밥과 국을 깨끗하게 비우고 부족했는지 숟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은하에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국과 밥을 다시 담아줬다.
"헤에... 콩나물국 맛있네. 너 이거 장사해도 되겠다"
"... 제발 마음에도 없는 소리 좀 하지 말고 다 먹었으면 그릇은 설거지통에 가져다 놔라"
다시 식사하기 시작한 은하를 내비두고 나는 멍한 기분으로 방에 들어왔다.
"..."
'진아가 정말 그런 말했다고?'
"... 이참에 전화나 해볼까...?"
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마 걔도 지금쯤 숙취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을 텐데...
통화음이 연결 되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입가가 씰룩 거렸지만 딱히 내색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 여보세요...]
"일어났냐? 둘이 술 마셨다며"
[... 아 왜 또...]
역시나 진아 또한 숙취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지 말에 힘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 혹시 뭐 이상한 얘기나 그런 거 한 거 아니지?"
[... 왜. 뭐 내가 언니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궁금해?]
"궁금하지. 괜히 이상한 말했을지도 모르는데"
[... 프흐흐. 내가 어떤 말했을까나~ 언니에게 엄청난 말을 하기는 했는데]
"..."
새끼가 귀엽기는. 전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짜증부터 올라왔는데 이제는 뭐 나도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진아야"
[... 응?]
"너 은하랑 술 마시면서 울었다면서. 내가 너무 좋은데 오빠는 그런 걸 몰라준다고"
[...]
조용히 말하는 내 물음에 진아는 침묵했다.
[뭔 개소리야. 내가 오빠를 왜 좋아해?]
"... 개소리라고?"
[오빠도 참. 그렇게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나를 맥이고 싶은 거야? 에휴. 그래 뭐 이 착한 내가 다 이해해 줄게]
태연스러운 목소리로 진아가 대답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 초등학교 운동회 날. 너가 아파서 양호실에 있을 때 말이야 그때 내가 아이스크림을 얻어와서 양호실로 들어왔는데..."
뚝
얘기를 하던 중 갑자기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
당황하지 않고 나는 침착하게 재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원이 꺼져 있어 삐소리 후...]
하지만 통화를 끊으면서 아예 휴대폰을 꺼놨는지 더 이상 진아와 전화할 수가 없었다.
"... 풋"
"푸하하하!!!"
설마 했던 반응에 결국 꾹 참고 있던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 은하의 말이 정말 사실이었다니'
나를 위해 울음을 터뜨리고 누구보다도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틱틱 거렸다는 사실까지'
귀여웠다. 내가 바뀌기 전 진아에게 느꼈던 그런 귀여움이 아닌 색다른 귀여움이 느껴졌다.
역시 아무리 사람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동생은 동생이나보다.
"... 프흐흐! 그렇지 않아도 숙취 때문에 엄청 고생하고 있을 텐데"
이거야 원. 오빠로서 동생에 아픔을 내버려 둘 수 없으니 이렇게 된거 용돈이나 넉넉하게 보내줘야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