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불안한 만남
* * *
"이게 쓰러지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진 젠가에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와아! 그럼 내가 이긴 거지?"
"... 그래. 니가 이겼다 임마"
순수하게 기뻐하는 은하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젠가 하나에 이렇게 즐거워 할줄이야'
물론 당분간 리모컨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이 뼈아프기도 했지만 은하의 미소를 보니 나 또한 즐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스윽
"나 화장실 좀"
"응? 어 알았어. 젠가는 내가 알아서 치울게"
신나게 젠가를 정리하는 은하를 뒤로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 이상하다. 어디있는 거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니 은하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열심히 바닥을 뒤지고 있었다.
"진성아 혹시 젠가 못 봤냐? 하나가 모자라네"
"... 내가 어떻게 아냐? 쓰러질 때 어디 구석에 들어간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
은하의 말에 젠가가 담긴 상자를 바라봤다.
역시나 맨 윗층에 젠가 하나가 비어 있었다.
"... 혹시 너가 숨겼다던가 그런 거 아니야?!"
"...?"
강아지 마냥 바닥에 엎드린 체로 말하는 은하에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뭔 개소리야. 내가 무슨 이유로 그걸 숨겨"
"... 아무래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는데..."
"지랄하지 말고 아니 그보다도 그렇게 바닥에 바짝 엎드리면 어떡해! 옷에 먼지 다 타잖아 미친년아!"
하여간 순수와 바보는 정말 한끗 차이인 것 같다.
엎드려 있는 은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젠가는 그냥 내비두라고 말했다. 어차피 이제 쓰지도 않을건데...
뭐 어쨌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 뒤에서 젠가 좀 같이 찾아 달라는 은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체 하고 침대 위로 몸을 내던졌다.
털썩
"..."
잠깐 몸을 뒹굴 거리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에 딱딱한 나무 막대가 내 손안에 잡혀졌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은하가 계속 찾고 있던 마지막 하나의 젠가였다.
"하아... 미치겠네"
한숨을 내쉬며 젠가를 만지작거렸다.
이 젠가는 내가 젠가를 무너뜨릴 때 뽑은 그 젠가였다.
아까 젠가를 뽑을 때 나는 젠가가 완전히 뽑히기도 전에 젠가의 적힌 벌칙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벌칙을 읽자 마자 억지로 힘을 줘서 젠가를 무너뜨려 버렸다.
한마디로 젠가가 무너진 이유는 엄연히 내가 일부러 무너뜨린 것이었고 나는 젠가를 무너뜨린 것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 도대체 뭔 생각으로 이딴 벌칙을 적어 놓은 거야"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젠가의 적힌 벌칙을 읽었다.
[상대방에게 찐하게 키스하기~]
'이건 벌칙 젠가가 아니라 그냥 커플젠가잖아 씨발'
벌칙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젠가를 무너뜨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젠가의 적힌 벌칙은 은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은하는 지금도 계속 젠가를 찾고 있는 중이었지만...
"... 나중에 은하 없을 때 몰래 제자리에 돌려 넣던가 해야지"
그래도 생일선물로 받은 건데 버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
철컥
어디에 숨길지 고민하다 젠가를 옷장 서랍에 집어넣었다.
물론 은하가 거리낌 없이 내 방에 들어 올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젠가를 넣고 그 위에 손수건을 올려놓았다.
[유진성 나 좀 도와달라니까~]
"... 에휴"
칭얼거리는 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니까 그 한 조각을 찾을 때까진 거실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대충 같이 찾는 척을 하다 밥이나 먹자고 둘러대야겠다.
***
인근의 위치한 부대찌개집.
달그락달그락
요란하게 숟가락을 놀리며 밥그릇을 비우는 진아를 나는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 천천히 좀 먹어라. 뭐 누가 쫓아온대냐?"
"우걱... 원래 빨리 먹어야지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거 몰라...?"
"..."
"원래 빨리 먹는 게 제일 맛있게 먹는 방법이야... 오빠는 그것도 모르면서"
'그건 또 뭔 좆 같은 논리야'
나 참 어이가 없어가지곤. 어쨌든 그래서 내가 왜 갑자기 진아랑 밥을 먹게 됐냐면 얘가 3일 뒤에 논산을 간댄다. 논산 훈련소로 말이다.
'... 적어도 그런 건 한달 전쯤에 얘기해야지.'
오늘 아침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마지막으로 밥 한 끼를 사달라고 하는데 이거야 뭐 안 사줄 수도 없고 그래서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다.
"... 말할 거면 일찍 말하지. 3일 전이 뭐냐 그래도"
"우물... 그게 내가 깜빡 잊어버려 가지고 말이지..."
"... 에휴. 어차피 내 알빠는 아니니까 잘 다녀오고... 뭐 어떻게 나중에 면회라도 가주랴?"
나 군대 있을 때는 진아가 면회도 오고 그랬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손수 만든 도시락을 챙겨 와서 같이 먹고는 했는데... 문득 예전의 진아가 그리워졌다.
'지금은 뭐...'
내 주위에서 저렇게 무식하게 밥을 처먹는 것은 진아가 유일했다.
전투적으로 밥을 먹던 진아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 굳이?"
"굳이는 뭘 굳이야. 니 성격상 나중에 내가 면회하러 찾아가면 좋다고 반길 것 같은데"
"...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허이구 두고 봐라. 나중에 내가 면회가면 지금 하는 말이 다 이해가 될 테니까"
나 역시 진아처럼 처음엔 별생각이 안 들었지만 막상 면회를 오니 얼마나 반가왔는지.
지금은 얼빠져 있지만 얘도 나중에 정식으로 군대에 들어가면 내가 한 말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 그럼 나 오빠 사진 좀 팔아도 돼?"
"...?"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은 해 줄 수 있는 거겠지?"
밥을 먹다 말고 은하가 눈을 게스름하게 뜨면서 말했다.
"내 사진을 판다고?"
"엉. 인터넷에서 보니까 오빠나 남동생 있으면 군생활이 편해진다는데"
"..."
"허락한 거지? 물론 번호를 주거나 그런 건 하지 않을게"
이건 뭐 철이 없는 건지 아니면... 아니다. 그냥 철이 없는 게 맞는 것 같다.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진아를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 에휴 니 알아서해라. 대신에 모르는 번호로, 그것도 너를 통해서 연락했다는 말이 나오면 넌 나한테 죽는다?"
"걱정 마. 내가 미친년도 아니고 왜 생전 모르는 여자에게 오빠 번호를 주겠어?"
'너라면 진짜 그럴 것 같아서 그러는 말이야 이 미친년아'
"... 에잇 진짜. 왜 여자만 군대에 가고 남자는 군대에 안 가는 건데... 오빠 같은 사람도 군대에 가야 되는데"
'난 이미 갔다 왔어 씨발!'
진짜 누누이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군대를 최대한으로 미루는 건데... 괜히 1학년 마치고 바로 군대에 가가지곤.
입이 근질 거렸지만 뭐 어쩌겠는가 여기서 내가 군대 얘기를 꺼낸다고 해도 진아는 듣는 척도 하지 않을 텐데. 그냥 대충 무시하는 게 정답이겠지.
"... 다 먹었으면 이제 그만 일어나자"
"으으... 너무 많이 먹었나? 속이 조금 더부룩하네..."
진아가 몸을 굼뜨게 움직이며 겉옷을 입었다.
'그렇게 처먹었는데 당연히 더부룩해야지'
"... 그럼 후식은 안 먹어도 되는 거지?"
"무슨 소리야. 밥 배 후식배 따로 있는 거 몰라?"
"..."
"보니까 내가 오기 전에 빙수집을 하나 봤는데..."
어휴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딸랑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뭔 이 날씨에 빙수를 먹어. 그냥 커피나 마시지"
"원래 빙수는 겨울에 먹어야 맛있는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속이 더부룩하다며 인상을 찌푸리던 얘는 어디에 가고 왜 또 거지새끼가 내 앞에 있는 건지.
하여튼 이런 사제 음식도 나중 가면 못 먹을 테니 미리 마음껏 먹어두는 편이 낫겠지.
"... 유진성?"
"...?"
그렇게 어딘지도 모르는 빙수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 뭐냐 너? 아침에 무슨 약속있다고 일찍 나가지 않았어?"
"그 약속이 파토가 나가지고 집에 돌아가는 길인데..."
은하가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진아를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진중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런데... 쟨 누구냐? 여자 친구?"
"뭐래 씨발. 그런 끔찍한 소리 좀 하지 마"
"아니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면 되지 욕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발끈하자 괜히 풀이 죽어서 시무룩해 하는 은하였다.
"혹시 저 언니가 오빠가 말한 그 양아치 언니...?"
진아의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친동생이야. 쟤는 내가 말했던 그 동기이고"
"아... 동생이였어? 진작에 말하지..."
"... 니가 말할 틈도 없이 여자 친구냐고 들이댔잖아"
"넌 뭐 워낙 근처에 여자가 없으니까 그랬지"
은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아무튼 갈길 가고 나중에 보는 걸로..."
"언니!"
"...?"
"오빠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자기 동기 중에 굉장히 예쁘고 자기 스타일이라는 언니가 있다고!"
'... 뭐, 뭐라고?'
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언제 저런 말을 했어?!
진아의 입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 그래...? 진성이가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네! 사실 오빠가 눈이 굉장히 높은 편인데 그런 오빠가 언니에게는 첫눈에 반했다고 하는데..."
"뭔 개소리야! 내가 언제 쟤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말했어?! 너 왜 갑자기 이야기를 지어나고 난리야!"
"에이... 오빠도 참. 부끄러워하기는..."
"아니 씨발 부끄러운 게 아니라... 허참!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가지곤!"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내가 진아의 말을 해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진성아... 그런 거였어...?"
"뭘 그런 거야 이 미친년아! 너까지 왜 이러는데!!"
게다가 눈치 없이 감동했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은하까지 정말. 답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오빠. 오빤 그냥 먼저 가. 난 이 언니랑 대화 좀 하다 들어갈 테니까"
"아니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왜? 혹시 진짜로 이 언니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서 그런 거야? 아니면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이유가 없는데?"
먹잇감을 사냥하는 맹수마냥 진아가 나를 노려봤다.
그런 진아의 눈빛의 나도 모르게 흠짓한 나는 대답하지 못했고 진아는 바보처럼 헤벌레 거리는 은하에게 시선을 거두며 인심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자. 가요 언니. 제가 오빠에 대해서 궁금하거나 그런 점이 있다면 다 말해 드릴게요"
"너 가면 뒤진다. 분명히 말했다. 너 가면 뒤질 줄 알아라"
"에이... 저거 다 개폼이예요. 울 오빠 말은 저렇게 해도 마음은 여려서 시간이 지나면 전부 이해해 주실 거예요"
"제발 말 같지도 않는 소리 좀 작작하고...! 그만 니 갈 길 가라고 서은하!"
저 미치광이 동생이 은하를 데리고 무슨 개짓거리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간절한 말투로 은하에게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마. 그래도 니 동생인데 뭐 별일이야 있겠어?"
"그럼요 언니. 설마 제가 뭐 이상한 짓거리라도 벌이겠어요? 그것도 오빠가 좋아한다는 분께?"
그렇게 은하는 기어코 진아를 따라가 버렸다.
심지어 내가 따라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택시 까지 타는 둘이었으니 본의 아니게 길거리에서 혼자 남겨진 나는 멍한 눈빛으로 둘이 사라져 버린 곳을 응시했다.
"씨발 진짜... 왜 이렇게 되는 건데...."
'이제 어떡해 해야 되지? 진아라면 또 무슨 이상한 개짓거리를 부려놨을 거 같은데...'
뒤늦게 불안감이 나를 찾아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어떻게든 돌아오면 진아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알아내야겠지'
그리고 그날 은하는 새벽 늦게, 그것도 술에 만탕 취한 체로 집에 돌아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