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수상한 젠가(2)
* * *
젠가는 계속 진행되었다.
게임을 하면서 나와 은하는 참 다양한 벌칙들을 수행하게 되었지만 둘 다 악에 받쳐서 그런지 거부권 따위는 사용하지 않은 체 벌칙들을 수행했다.
"..."
"... 그 너무 쎘나?"
"..."
"... 미안 해. 설마 힘 조절을 너무 안 했나 보네..."
말없이 이마를 어루만졌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것 만큼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은하 역시 자기도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되게 미안 해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고 그렇게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빠르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 아파 씨발'
분명히 딱밤을 맞았는데 왜 손이 아니라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인건지 진짜.
'... 걍 엎어 버리고 잠이나 잘까?'
"... 그만할까 진성아?"
"..."
허탈한 표정으로 젠가를 바라봤다.
포기하기엔 그래도 지금까지 해온 것이 있는데...
"... 됐어. 빨리 뽑기나 해"
"... 쩝 알겠어"
"대신에 이제부턴 조절 좀 하면서 하자. 이러다 괜히 맘상한다"
"오케이. 그렇게 하자"
슬슬 헐렁거리기 시작하는 젠가의 은하가 손을 뻗었다.
"어디 보자... 이번에 내가 뽑은 벌칙은..."
"..."
"..."
"...?"
'뭐야 왜 갑자기 말을 하다 말아'
갑작스러운 침묵에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은하를 바라봤다.
은하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말이다.
"도대체 뭐가 나왔길레 죽상을 짓고 있는 거야?"
"어... 그게... 그러니까 말이야..."
마치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은하는 조심스럽게 내게 젠가를 건넸다.
'... 뭐가 나왔길레 얘가 이러는...'
[5분 동안 상대방을 자기 무릎 위에 앉히기]
"..."
순간 나도 은하처럼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 뭐라고? 상대방을 무릎 위에 앉히기?'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가 은하 무릎 위에 앉히는 게 벌칙이라는 거야?
할 말을 잃어버린 나는 세상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은하를 바라봤다.
"아, 아니야!! 나도 오늘 처음 열어본 거라고!!!"
"..."
"애초에 내가 그런 걸 왜 써놨겠냐고!"
"..."
내 시선에 깜짝 놀란 은하가 자기는 억울한 일이라며 해명을 했고 나 역시 은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하긴 그렇겠지"
'애초에 이 새끼는 이런 짓을 할 년이 아니니까'
"... 그래서 어떡하지 진성아...? 그냥 넘어가고 다른 거로 하나 뽑을까?"
"... 넘어가긴 뭘 넘어가... 꼬우면 거부권 쓰던가"
"..."
내 말에 은하는 아무런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대충 예상은 했지만 아직는 거부권을 쓰기가 아까웠나보다.
"... 그럼 진짜 앉을 거야?"
"... 자세나 똑바로 해 새꺄. 어차피 이것도 벌칙이니까"
애써 장난식으로 말하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하가 있는 쪽으로 몸을 옮겼다.
털썩
그리고 그대로 은하의 무릎 위로 내 몸을 안착시켰다. 마치 의자에 앉듯이 말이다.
"..."
"..."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은하와 함께 있으면서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어색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 진짜 이건...'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앞만 보고 앉은 상태라 은하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자유를 잃은 체 마구 돌아다니는 은하의 두 팔로 봐선 은하도 지금 내 표정과 별반 다를리가 없을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 그... 무겁거나 그러지는 않냐?"
"... 어? 어..."
"... 그래? 그럼 다행히고..."
"..."
"..."
억지로 입을 열었지만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 씨발 젠가라도 뽑자. 어차피 5분은 금방 가니까'
결국 은하의 무릎 위에 앉은 채로 나는 젠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흔들흔들
"..."
이제 슬슬 흔들거리기 시작하는 젠가였지만 나는 손쉽게 젠가를 뽑을 수 있었다.
"... 상대방에게 3분간 어깨안마해주기"
다행히 나름대로 평범한 벌칙이다.
'안마해주기 정도면 나쁘지 않은 벌칙이...'
"... 근데 이 자세로 안마를 하려면 뒤를 돌아야 되는 거 아니야?"
멈칫
"..."
"..."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대 맞은 듯 내 몸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이 자세에서 안마를 하려면 뒤를 돌아 은하를 마주 본 체로 안마를 해야 한다는 건데...'
...
...
'에휴 씨발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냥 빨리 끝내고 말지'
마음을 굳히고 그대로 뒤를 돌아 은하와 마주 보는 자세로 바꾸었다.
"... 진짜 그렇게 하게?"
"그러면 뭘 어떡해 해. 벌칙인데 해야지 뭐..."
진짜 게임하면 할수록 도대체 누굴 위한 벌칙인건지. 오늘 이후론 더 이상 젠가의 손을 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스윽
안마 특성상 가깝게 붙어야 해야 해서 뒤를 돈 자세에서 나는 은하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
"..."
"... 그래도 이건 너무 가깝지 않은..."
"... 닥쳐 개새끼야"
당황스러워하는 은하의 말에 괜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나도 그렇고 은하도 그렇고 막상 이렇게까지 가까이 붙게 되니 서로 되게 부끄러워했다.
'... 동성 친구면 장난이라도 칠 수 있지. 이건 그냥 뭐...'
"..."
"..."
서로 코앞에 있는 거리였지만 우리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냥 지금의 상황이 불편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 빨리 안마나 끝내자'
어차피 그러면 시각은 다 지나갈 것이다.
텁
움찔
침을 꿀꺽 삼키고 은하의 어깨 위로 두 손을 올렸다.
잘못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손이 은하의 어깨에 닿으면서 은하가 아주 살짝 움찔거린 것 같았다.
'... 근육이 엄청 뭉쳐 있네? 뭐 이리 단단한 거야'
은하의 어깨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하긴 주방일이 쉬운 게 아닌데 그렇게 쉴 틈 없이 일하다 보니 어깨가 뭉쳐질 만도 했다.
원래는 어색함을 없애려고 장난식으로 안마를 하려 했는데 이거 아무래도 제대로 해야 될 것 같다.
"... 후우 시작한다?"
그렇게 나는 손에 힘을 주고 안마하기 시작했다.
꾹꾹
"..."
"..."
불편한 침묵 속에서 내 손만 바쁘게 움직여갔다.
"... 뭐 아프거나 그런 건 없냐...?"
"... 으응"
"... 어우 근데 어깨가 뭔 이렇게 뭉쳐 있냐... 안마기라도 하나 살까?"
"안마기는 무슨..."
처음 1분 동안은 부끄럽다는 감정밖에 들지 않았는데 슬슬 손이 아파지기 시작하니 나중에 가선 힘들다는 생각만 들어졌다.
마침내 길고 길었도 3분이 끝나고 은하의 벌칙 시간도 지났기 때문에 나는 은하의 품에서 벗어나왔다.
"아이고 힘들다..."
"... 벌칙이긴 한데... 그래도 안마 해 줘서 고맙다 진성아"
"... 에휴. 그나저나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둘다 거부권은 쓰지 않을 것 같은데 그냥 지금부터 없는셈 치고 하자"
"... 난 상관없어. 그럼 나 뽑는다?"
"이번엔 좀 무너져라..."
하지만 내 바람이 무색하게 은하는 정말 간단하게도 젠가를 뽑았다.
"... 나중에 자식을 낳는다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중 누구를 낳고 싶은지"
"... 이게 왜 벌칙이야?"
어이가 없네. 나는 씨발 딱밤도 맞고 안마도 하는 별의별 좆 같은 것만 나왔는데 왜 이 새끼는 이런 벌칙만 걸리는 거지?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운이 지지리도 없는 건지... 뭐 어쨌든 젠가의 적힌 글자를 읽고 은하는 고심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 음 나는 낳게 된다면 남자아이를 낳고 싶어"
"왜. 니 닮은 딸은 너가 감당하지 못할까 봐?"
그 말에 은하가 눈을 크게 뜨면서 나를 바라봤다.
"... 점쟁이냐? 그걸 어떻게 알았냐"
"..."
에휴 저 등신. 생각이 단순하기만 해가지곤...
"왜 그렇잖아. 날 닮은 딸보다는 그래도 널 닮은 아들이 훨씬 낫겠지"
"..."
"그리고 딱히 정해 놓지는 않았지만, 기왕 많이 낳고 싶네. 자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
은하의 말에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근데 왜 전재가 너랑 내가 낳는 아들이냐?"
"... 어?"
"벌칙에 그런 말은 적혀 있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
"..."
"..."
내 말에 은하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어졌다.
"아, 아니 나는 지금까지 서로에게 벌칙을 행해가지고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건데..."
"... 건데?"
"... 전재가 없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은하가 엄청 당황해 하면서 말했다.
나는 눈을 게스름하게 뜨며 은하를 바라봤고 은하는 무슨 죄를 지은 것 마냥 어쩔 줄을 몰라했다.
"... 뭐 알았어. 그럴 수도 있는거지"
"... 혹시 기분이 나빴다거나 그런거라면..."
"기분이 나빴다는 건 아닌데... 그냥 조금 그렇네"
이정도 일로 사과까지 하기에는 심하지.
솔직히 별 생각은 없었다. 나 역시 은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근데 내가 아니어도 딸만 낳고 싶은거냐?"
"... 그, 그렇지! 아하하..."
"...?"
은하가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이거 뭔가 조금 느낌이 이상한..."
"그, 그러면 너는! 아이를 낳는다면 어떤 아이를 낳고 싶은데...!"
"..."
'이 새끼가 갑자기 말을 돌리네?'
이거야 원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가지고 제대로 판단이 안되네.
아무렴 뭐 어떻겠는가 나랑은 별 상관이 있는 일도 아닌데. 내가 진짜 은하랑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아니고 대충 넘어가 주는게 맞는거겠지.
"나는 뭐... 딸이든 아들이든 다 상관 없는데?"
"... 그러면 몇 명까지 낳고 싶냐?"
"... 딱 두 명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
"... 그래?"
"난 자식 보다는 내 배우자를 더 생각하는 편이여가지고"
"... 아"
내 말에 은하가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청 감동을 받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 알았어. 일단 넘어가고 이제 나 뽑는다?"
"... 응"
갑자기 고분해진 은하를 뒤로하고 나는 젠가를 뽑았다.
와르륵
그리고 내가 젠가를 뽑음과 동시에 젠가가 무너져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