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수상한 젠가
* * *
[서희야! 그걸 못 맞추면 어떡하니!!]
[아하하... 그러게요...]
잠깐의 사건(?) 일어나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나와 은하는 조용히 티비를 시청했다.
"..."
"..."
물론 말만 티비를 보고 있다는 것이지 사실은 그냥 둘 다 멍 때리고 있었다.
'... 이상하다. 분명 인터넷에선 이런 방법이 이성의 화를 푸는 데에 효과적이라고 했는데...'
슬그머니 은하를 곁눈질 했다.
표정이 무슨 엄청난 충격에 빠진 듯한 표정이었는데 이거야 원 저 새끼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인터넷이 거짓인건지 도통 알아차리지를 모르겠다.
"... 유진성"
"... 응?"
어쨌든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생각보다 많이 심심했는지 은하가 불편한 분위기를 먼저 깨고 입을 열었다.
"존나 지루한데 우리 보드게임이나 한판 할래?"
"... 보드게임?"
갑자기 웬 보드게임? 아니 그리고 혼자 사는 놈이 집에 보드게임이 있어?
"... 그래 뭐. 무슨 보드게임인데"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내 말에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 봐. 가져올 테니까"
"... 뭐 또 이상한 거 아니지?"
"응? 전혀 아닌데? 너도 잘 아는 게임이야"
그러고선 자기 방으로 들어간 은하였다.
'나도 잘 아는 게임이라고?'
난 어릴 때 보드게임을 몇 번 해본 적이 없는데? 혹시 체스나 장기 같은 판게임인가? 아니면 카드 게임?'
짧지만 지금까지 내가 해봤던 보드게임들을 떠올리며 나는 은하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어으... 이게 침대에 밑에 있을 줄은 몰랐네"
은하가 투덜거리며 손에 무언가를 쥔 체 거실로 돌아왔다.
'뭐야? 체스판이나 트럼프가 아니잖아?'
대충 2L 물병 크기에 종이 상자에 나무 막대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져 있는 그림
"... 그거 혹시 젠가냐?"
"응? 엉. 예전에 아는 언니한테 집들이 선물로 받은 건데..."
은하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이 아닌 젠가였다.
"... 직접 제작한 특별 젠가라는데 나도 오늘 처음 개봉해 보네"
"이걸 직접 만드셨다고?"
'손수 나무를 깍고 다듬어서 말이야?'
세상에 생일선물 하나 해준다고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하다니. 이 새끼는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나? 주위 인맥들이 다들 왜 저래?
"뭐래? 그 언니가 무슨 기술이 있다고 이걸 만들어? 그냥 기존에 있는 젠가를 사가지고 나무 막대에다 벌칙을 적어 놨다고 말한 건데"
"... 아 그래?."
어이없어해하는 은하에 나는 머쓱함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와르르
은하가 젠가 박스를 엎었다.
"... 그러니까 여기 막대에 벌칙이 적혀 있다는 거지?"
"응. 뭐가 적혀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나는 바닥에 어지러져 있는 젠가중에서 하나를 집고 막대에 적힌 글씨를 읽었다.
"어디 보자... 상대방에게 딱밤 때리기? 대충 이 정도 벌칙인 것 같네"
"그러냐? 그럼 다행이네. 그래도 벌칙은 미리 보면 재미없으니까 일단 쌓아 놓자"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젠가를 모두 쌓아 버렸다.
"이것도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뭐라도 걸고 할까?"
은하가 팔을 뻗으면서 말했다. 이 새끼는 뭔 젠가하나 하는데 스트레칭을 하고 지랄이야?
'... 뭐 나야 나쁠 건 없지'
"좋아. 그래서 뭘 걸건데?"
"... 리모컨 2주 독재권 어때?"
"... 리모컨 2주 독재권...?"
그 말에 나는 눈빛을 반짝였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나와 은하는 티비를 시청하는 성향이 조금 많이 달랐다.
대충 말해서 은하는 스포츠 관련 프로그램을 선호하고 나는 예능 관련 프로그램을 선호한다.
그런데 이게 또 반대로 은하는 예능을 싫어하고 나는 스포츠 방송을 싫어해서 쉬는 날 우리는 늘 리모컨을 가지고 다투어 됐고 결국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기로 결정했지만 서로 영 만족스러워하지는 않았다.
"너 그 말 후회 안하는 거지? 나 이거 진짜 끝까지 갈 거다?"
"허이구 나는 살면서 후회 따위는 해본적이 없는 여자야"
"좋아. 대신에 어떤 벌칙들이 있을지 모르니 서로 거부권은 하나씩 갖고 시작하기로 하자"
"그래 그럼... 역시 아무리 여성스럽다곤 하지만 결국엔 너도 남자나 보구나. 거부권 같은 것도 말할 줄 알고"
"... 하여간 저놈의 지랄은 어떻게 낫지를 않아요"
시작도 하기에 앞서 유치한 기 싸움을 버리는 나와 은하였다.
하여간 서로 간의 자존심도 무지막지하게 강해가지곤. 아무래도 이 게임. 누구 하나는 끝장이 나야 될 것 같다.
"... 그럼 마지막으로 정리해서 설명한다? 젠가를 쓰러뜨리면 바로 지는 거고 단 한 번의 거부권이 있으나 그 이후에 나무막대에 적힌 벌칙을 시행하지 않으면 지는 거다. 받아들이는 거지?"
"아유 알겠으니까 빨리 시작이나 하자고~"
"..."
대충대충 거리는 은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지만 억지로 화를 억누른 나였다.
"... 좋아. 그럼 나 먼저 시작한다"
그렇게 나는 첫 번째 젠가를 뽑았다.
'어디 보자. 뭐라고 적혀 있으려라나....'
"... 상대방에게 5분 동안.... 존댓말 하기...?"
"푸흡!!!"
내 말에 은하의 웃음보가 터졌다.
'... 존댓말을 하라고? 저 병신에게?'
세상에 설마 처음 부터 이렇게 힘든 벌칙이 나올 줄 상상도 못 했는데.
"아 진짜... 존나 재밌네...!"
"..."
"싫으면 거부권 쓰던가"
은하의 말에 은하를 노려봤다.
이거 뭐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나밖에 없는 거부권을 처음 부터 쓸 수도 없으니 원.
'...'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고민 끝에 결국, 나는 거부권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 정확히 5분만이다"
"... 뭐라고? 5분만이다... 라고?"
"..."
'씨발'
"... 5분만이예요..."
내 딴에선 이를 악물고 말을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내 말에 은하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마치 아랫 사람을 대하 듯이 조곤조곤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진성이 처신 잘하자?"
"... 네"
"설마 지금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린 건 아니겠지?"
"... 아니예요..."
요즘 들어 내 인내심이 큰 폭으로 늘어나는 기분이다.
"자 다음은 내 차례지?"
유심히 젠가를 둘러보던 은하는 가운데에 박힌 나무 막대를 뽑았다.
"어디 보자... 양치하고 귤 3개 먹기?"
멍하니 막대에 적힌 벌칙을 읽던 은하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 그런데 집에 귤이 없지 않..."
"내가 저번에 죽을 사러 가면서 귤 한봉지를 사 왔거든...!! 요..."
"..."
"... 그러니까 기다...리세요. 귤이랑 칫솔 치약 가져올 테니까"
은하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나는 재빨리 냉장고에서 귤과 화장실에서 칫솔과 치약을 가져 왔다.
그날 유독 과일가계에 있는 귤이 맛있어 보였는데... 이게 여기서 작용을 하다니.
'저 귤 존나 셔가지고 전부 버릴 생각이었는데. 넌 이제 뒤졌다'
우중충했던 마음에 마치 해가 뜬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 찾아왔다.
"... 아니 근데 왜 하필 3개야. 존나 뜬금없네"
"왜 뜬금이 없어. 보통 귤을 먹을 땐 한 번에 3개씩 까서 먹지 않나?"
"..."
"... 요?"
은하가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래서 뭐 지가 어쩔 건데? 꼬우면 거부권을 쓰던가.
"... 에휴. 한다. 해"
역시나 거부권은 사용하지 않을 모양이었는지 은하는 칫솔에 치약을 짜고 이빨을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빨을 닦으면서 귤을 까기 시작했는데 보니까 하나씩 먹는 게 아니라 세 개를 한꺼번에 다 넣을 생각인가 본데... 아주 그냥 지가 알아서 지 무덤을 파는구만.
'뭐 나야 상관없지만 말이야'
그렇게 이빨을 다 닦고 다시 거실로 돌아온 은하는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는지 귤 세게를 모두 집었다.
'하긴 귤도 그리 크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할만도 하겠지'
나 또한 그런 안일한 생각에 통으로 씹어 먹다 개고생을 했으니 뭐.
"아 그리고 무슨 씹지도 않고 삼키거나 그런 양아치스러운 짓은 당연히 안 하겠지... 요?"
"... 참나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내가 너냐 시꺄?"
"..."
이 쌍년이 끝까지 지랄을 하네.
"... 그럼 먹는다?"
잠시 귤을 바라보다 이내 마음의 준비를 끝냈는지 은하가 귤 세 개를 몽땅 입안에 털어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구강운동하기 시작했는데.
"...!!!!!"
반응이 바로 왔는지 은하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지게 되었다.
"어어?! 뱉거나 그러면 다시 먹어야 돼요?"
"프, 프허헉!!!"
"쓰읍...! 입은 좀 다물고 먹어라... 요"
그냥 귤만으로도 신맛 때문에 먹기가 힘들 텐데 이빨까지 닦고 먹었으니 아마 지금쯤 은하의 입속에선 잔치가 벌어졌을 것이다.
'아... 스트레스가 한 방에 해소가 되네'
물론 보는 내 처지에선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말이다.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은하의 모습은 진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정말 속이다 후련하네'
"... 으으.."
"다 먹었냐?"
5분이 지나서 더 이상 존댓말은 하지 않았다.
"독한 년. 그걸 기어코 다 처먹네"
"... 으으... 이빨이 뽑힐 것 같아..."
"쯧. 엄살 부리기는"
"... 닥치고 빨리 뽑기나 해..."
은하가 으르릉거리며 말했다.
이번에 제대로 쓴맛을 봤는지 독기가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은하였다.
'... 이거 이러다가 진짜 뭔일 나는 거 아니야? 너무 과해지는 것 같은데'
"... 진정하고 게임은 게임일 뿐이잖아? 괜히 서로 나중에 원망하거나 그러기는 없도록 하자"
"... 알겠으니까 뽑기나 하라고"
과도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은하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지만 은하는 내 말을 대충 받아 버리고 오로지 젠가에만 시선을 집중시켰다.
"... 그래 뭐. 일단 뽑을게"
은하의 말이 영 미덥지 않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젠가 쪽으로 손을 뻗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