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감기 몸살
* * *
"콜록콜록...!!"
"..."
"콜록! 콜록콜록!!!"
집에서 들리는 기침 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들려왔다.
"... 야 너 진짜 병원 안 가 봐도 돼?"
"... 거참 괜찮다니까. 뭔 감기로 병원을... 콜록콜록!!"
"..."
기어코 병원만은 못 가겠다는 은하를 옆에서 지켜만 볼 수밖에 없던 나로선 답답하기가 짝이 없었다.
역시 놀이동산을 가는 게 아니었는데... 지금 은하의 몸 상태를 보니 감기도 감기인데 몸살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얘가 혹시 병원에 트라우마가 있나?'
괜히 답답한 마음에 이것저것을 생각한 나였다. 뭐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사장님도 걱정하셨잖아. 너 아픈 몸으로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니냐고"
"... 그냥 괜히 하신 말씀이지 아프긴 뭘 아파 내가"
"제발 지랄 좀 하지 말고 이제 인정하라고. 왜 자꾸 이상한 자존심을 세우는 거야"
"... 쓰읍 아니라니까. 콜록콜록!!"
"... 에휴"
참 설득력 있게 말한다.
신나게 기침을 해대는 은하를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가 옷걸이에 걸려 있는 패딩을 꺼내 입었다.
"죽이라도 사올 테니까 집에서 쉬고나 있어. 너무 추우면 보일러 온도 좀 올려놓고"
"훌쩍... 진짜 괜찮다니까..."
괜찮기는 무슨 지금 서 있는 것도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인데.
그리고 뭔 집에 그 흔한 타이레놀 하나가 없는지 가는 김에 약국에 들려 감기약도 같이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대충 30분 정도가 흘렀을까?
띠리릭
한 손에는 죽이 담긴 봉지와 다른 한 손에는 감기약과 감기에 좋다는 유자차를 손에 든 체로 나는 집으로 들어왔다.
"... 어으 존나 춥네 진짜"
짐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서 중얼거렸다.
확실히 날씨가 춥긴 추웠는지 밖에 있다 집에 들어오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은하 얘는... 방에 있나?"
편안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는데 은하가 보이지 않았다.
똑똑
"서은하. 안에 있냐?"
"..."
그래서 은하의 방문을 두드려봤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침묵 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은하가 자는 줄만 알았다.
끼이익
하지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내가 본 것은.
'!!!!'
"야! 야야!! 서은하!!!"
바닥에 엎어진 체로 정신을 잃은 은하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란 나는 빠르게 은하에게 다가 갔다.
"...!"
은하의 낯빛은 되게 어두웠다. 입술은 파랗다 못해 검은색으로 어둡게 변해 있었고 그와 반대로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이 시뻘겠다.
"... 이, 이게 뭔 씨발"
불구덩이 처럼 뜨거운 이마에 나도 모르게 욕설을 지껄였다.
설마 이렇게까지 몸살끼가 심할 줄은 몰랐는데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 또한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어, 어떻게 해야 되지? 119에 신고를 해야 하나?'
벌벌 떨며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냈다.
"... 진성아..."
"...!"
그리고 그 순간 은하가 힘겨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고 화들짝 놀란 나는 급하게 은하쪽을 내려다봤다.
"... 괜한 짓 하지 마..."
내가 뭘 하려는지 다 알고 있다는 눈치로 은하가 말했다.
물론 듣는 내 처지에선 그런 은하의 말에 욱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이게 뭐가 괜한 짓이야 미친년아! 지금 니 상태가 어떤데...!"
"...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툭
"...!!!"
그 말을 끝으로 은하의 의식이 완전히 놓여 버렸는지 더 이상 은하의 입에서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 씨, 씨발 진짜..."
'나 보고 어찌라는 건데 씨발...!'
쓰러진 은하의 앞에서 나는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봤다.
머리는 혼란스러웠고 마음은 복잡하다 못해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을 망설이며 은하와 휴대폰을 번갈아 보던 끝에 나는 이내 결심을 하고 휴대폰 위로 손을 올렸다.
***
보글보글
부엌에서, 낡은 냄비 속에서 물이 끓어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말없이 냄비를 바라봤다.
냄비 속에는 물과 더불어 하얀 손수건이 함께 끓여지고 있었다.
바로 앞에 서 있어서 그런지 기분 나쁜 냄새가 코밑으로 슬금슬금 올라왔지만 딱히 별생각은 들지 않았다.
딱
불을 끄고 미리 준비해 둔 바가지에 물과 수건을 옮겨 담은 뒤 너무 뜨겁지 않도록 약간의 찬물을 부어 온도를 조절했다.
'이 정도면...'
너무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따뜻함.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게 따뜻한 물과 수건이 담긴 바가지를 들고 은하의 방으로 들어갔다.
딸깍
"..."
"..."
방안은 조용했다. 그리고 그 조용한 방안 침대에서 은하가 쥐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미리 준비한 간의 의자 위로 물과 수건이 담긴 바가지를 올려놨다.
그리고 따로 준비한 의자에 앉아 물에 젖은 수건을 짜기 시작했다.
촤르륵 촤르륵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하게 들려왔다.
자는 은하 때문에 불을 켜지를 못 해 없었기에 유독 물 떨어지는 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들려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더 이상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없을 정도로 수건을 짜고 젖은 수건을 은하의 이마 위로 올리려던 순간.
멈칫
"... 허참. 나 뭐 하냐? 찬물로 젖은 수건을 올려야지 병신아"
뒤늦게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은하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나도 지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가 보다.
따뜻하게 뎁혀진 수건을 들고 나는 방을 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찬물을 틀어 수건을 차갑게 적셨고 물까지 다 짜놓은 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텁
조심스럽게 수건을 접어 은하의 이마 위로 올렸다.
갑작스러운 찬물에 놀랐는지 은하는 잠깐 움찔거렸지만 그것에서 멈췄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
간의 의자에 앉은 채 나는 멍하니 은하를 내려다 봤다.
쥐 죽은 듯 잠을 자는 모습. 늘 봐 왔던 은하의 모습이 오늘처럼 이렇게 약해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 왜 아프고 그러냐..."
'사람 마음 짜증 나게'
갑갑한 마음에 문득 담배가 마려웠다. 하지만 괜히 환자 앞에서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기엔 조금 뭐한 감이 있어 생각은 생각에서 그치게 되었다.
알바는 일단 이번 주는 모두 쉬기로 했다. 사장님도 은하가 아프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 은하를 간호해야 하는 내 입장도 고려해 주셔서 나 또한 은하와 함께 이번 주를 쉬게 되었다.
물론 월급에서 이번 주 급여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 얘기하셨지만 그래도 참으로 감사한 분들이 아닐 수가 없었다.
대학이야 뭐 병원에 가서 소견서를 뽑아오면 되니 상관은 없고 내가 수업을 갈 때가 조금 걱정인데... 에이 무슨 문제가 있으면 은하가 알아서 전화 하겠지. 애초에 내일 수업도 전부 오전 수업이니 뭐.
"... 벌써 찬물이 다 빠졌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차가웠던 수건이 금세 뜨겁게 데워졌다.
이마에 올려진 수건을 집어 새로 찬물을 담은 바가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촤르륵 촤르륵
다시 한번 물 떨어지는 소리가 방안에서 들려왔다. 나는 열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수건을 적셔 은하에 이마 위로 올렸고 다행히 그런 내 노력이 통했는지 불구덩이 처럼 뜨거웠던 은하의 이마가 이제는 따뜻한 정도에 온도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
그렇게 열심히 은하를 간호하는 도중 어느새 창밖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밤을 새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나였는데 그만 은하를 간호하며 하룻밤을 전부 새버린 것이었다.
'... 이제 온도도 정상으로 내려갔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쭈욱 위로 올리며 뻐근한 몸을 움직였다.
몸은 피로 했지만 정신도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답답했던 마음이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 수업까지 2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지금 상태에서 잠을 잤다간 일어나지 못할 것 같으니 간단하게 밥이나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방을 나갔다.
'대충 아침은 라면으로 해결하고 혹시 모르니까 죽도 뎁혀 놓을까?'
냄비에 물을 올리고 냉장고에서 어제 사놓았던 죽을 꺼냈다.
"... 아니면 그냥 나가기 전에 끓여 놓을까?"
괜히 지금 끓였다간 다시 식을 것 같았다.
물론 은하가 언제 일어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기왕에 먹을 거 따뜻하게 먹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일단 죽은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은하 저 새끼 성격상 무조건 데우지 않고 처먹을 거야'
그러니 나가기 전에 끓여 놓는 것이 제일 바람직한 행동일 것이다.
빠르게 라면을 먹고 설거지 까지 마친 뒤 갈아입을 옷과 함께 화장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
호스에서 뿜어지는 따뜻한 물에 쌓여 있던 피로가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서 있다간 이대로 잠이 들 것 같아 억지로 샤워를 끝내고 새옷으로 갈아입은 뒤 나는 다시 은하의 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 어?"
방으로 들어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침대에 누워 있던 은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야. 얘 어디 갔어?'
깜짝 놀란 나는 멍하니 침대로 다가갔고 침대에는 젖은 손수건만 있을 뿐 은하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덥썩
'...?!'
그렇게 내가 당황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나를 힘겹게 껴안았다.
"... 미친 새끼... 나 하나 간호해주려고 밤까지 샌거야?"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내뱉어졌다.
"... 야 너 괜찮아?"
"... 덕분에"
내 어깨 위로 노란색에 머리카락이 덮여졌다.
참으로 밝은 노란색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