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뜻밖의 사건(4)
* * *
띠리릭
집에 돌아왔다.
"..."
빛이라곤 한점도 없는 어두컴컴한 집안. 나는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 은하는 자고 있으려나?'
현재 시간이 12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니 아마 은하는 자고 있을 것이다. 보통 은하는 11시쯤에 잠에 드니까말이다.
'나도 빨리 씻고 자야...'
"유진성"
'...?'
"으어우어어!!!"
그때 갑자기 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딸칵
'으윽...!'
불이 커졌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 시야에서 점점 은하로 추정되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 뭐야? 무슨 귀신 본 듯한 표정을 짓고 난린데?"
"..."
은하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 너 지금 뭐 하냐? 왜 불을 다 끄고 있는 건데?"
"그냥 너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
"... 뭐 별다른 이유는 없어"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거리는 은하였다.
상황을 이해 못한 나는 멍하니 은하를 바라봤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일이라도 있냐?"
"응? 그런 거 없는데?"
"아니 그럼 왜 야밤에 이런 짓을..."
"그냥 놀래키고 싶어서 한거라니까?"
"..."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는 은하에게 뭐라 반항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내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 그래 알겠다. 처음이니까 넘어가는 거지 다음부턴 이지랄 하지마라?"
"엉~ 그래도 반응이 좋으니까 나름대로 뿌듯함이 있네"
"..."
'진짜 개지랄이네'
갑자기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어서 빨리 씻고 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려왔다.
"... 응? 야 유진성"
"...?"
"너 친구 만나고 온 거 아니야?"
"... 어 왜?"
"... 그런데 왜 여자 향수 냄새가 나냐? 너 나한테 남자 친구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
멈칫
"... 어?"
여자 향수 냄새? 설마 수아가 사용한 향수를 말한 거야?
'... 씨발 향수가 옷에 베었나보네'
"너 혹시 거짓말 했냐?"
"저기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아니 그리고 씨발 이거 페로몬 향수잖아. 너 도대체 누굴 만나고 온 거야?"
은하의 말에 나는 답하지 못했다.
"..."
"..."
잠시 우리 둘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은하는 눈을 게스름하게 뜨며 나를 바라봤고 반대로 나는 은하의 눈빛을 피하기에 급했다.
"... 그래 뭐 내가 신경 쓸 이유는 아니지"
"아니 서은하..."
"나 먼저 자러 간다"
"야야...!"
쾅
"..."
그렇게 은하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 씨발"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가 왜 거짓말을 했지? 아니 그건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왜 은하의 말에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은 거지?
'진짜 뭐하는 거지 나는?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에게 배려와 존중을 해주자고 은하에게 말했는데... 씨발 이제 어떡하지?'
가슴이 답답했다. 나도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내가 저질러 놓고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게 뭔 개소리야 진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은 체로 나는 멍하니 은하의 방문을 바라봤다.
'... 지금이라도 은하에게 용서를 비는 것이...'
"..."
하지만 생각은 생각에서 멈췄을 뿐 내 발길이 은하의 방 쪽으로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아침이 밝아왔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나는 냉장고를 뒤적거리며 아침 식사 준비했다.
오늘 조식은 김치찌개와 베이컨 구이. 특별히 은하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구성을 해놨다.
'반찬도 꺼내 놓기만 하면 되고 이제 은하를 깨워야 하는데...'
"..."
은하의 방문 앞에 섰다.
그리고 잠깐의 망설임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향해 손을 올렸다.
똑똑
"... 크흠! 저기 서은하? 아침밥 차려놨는데..."
벌컥
내가 문을 두드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은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은하는 매우 피로해 보였다. 늘 아침마다 서글서글한 모습으로 나를 반겨 주는 은하가 아닌 굉장히 낯설여 보이는 은하가 내 앞에 서 있었다.
"..."
"..."
"어... 좋은 아침...?"
"..."
어색함을 뒤로하고 인사를 건넸건만 그런 내게 돌아온 것은 냉소적인 무시였다.
벌써 시작이 좋지 않은 기분이다.
어쨌든 그렇게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달그락
"..."
"..."
식사는 조용히 이루어졌다.
은하랑 이렇게 조용한 식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원래였다면 이건 맛있네, 요건 조금 짜지만 그래도 맛있네, 이건 되게 쓴데 그래도 너가 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먹을만은 하네 라며 택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은하였는데... 조용히 식사에만 열중을 하니 괜히 나만 답답한 기분이었다.
'... 그러면 내가 먼저 대화를 여는 게...'
탁
"잘 먹었어"
"어? 어어..."
"아침에 약속이 있어가지고 나 먼저 씻을게"
대화는 무슨.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밥그릇을 비운 은하는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
나도 빠르게 식사를 마무리했다.
그 뭐야 평소에 화를 잘 안내던 사람이 화를 내면 엄청 무섭다고 했던가? 지금 은하의 모습이 딱 그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 하아 씨발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지? 무릎이라도 꿇어야 되나?'
물론 내가 잘못은 한 건 맞지만 그래도 거짓말 한 번에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사과는 당연한 얘기이고 은하가 내 사과를 받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야 하는데...
"하아... 왜 거짓말을 해가지고"
생각하면 할수록 내 입속에선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편으로는 이게 이 정도까지 갈 문제인가 라는 의구심도 조금씩 들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뭐라 따질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억지로 눌러냈다.
벌컥
'...!'
그러는 사이 은하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저기 서은..."
쾅
은하가 나오기를 기다렸던 나는 잽싸게 은하를 불렀지만 은하는 나보다 더 재빠르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
다시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은하와 대화를 나누긴 해야 하는데 은하가 노골적으로 나를 피하는 모습이고 그러면 여기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짜.
하지만 저렇게 계속 피하기만 한다면 결국, 나만 나가리가 되는 건데 그냥 억지로라도 팔을 붙잡고 얘기하는게...
벌컥
그러는 사이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은하가 방에서 나왔다.
'...?!'
"... 좀 비키지? 나 나가야 되는데"
정말로 외출을 할 예정이었는지 옷을 싹 갈아입은 은하는 나를 슬며시 옆으로 밀어내고 빠르게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야야 잠깐...!"
"나 오늘 집에 늦게 들어올 것 같으니까 식사는 알아서 해결해라"
은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얼굴은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말한 것 같았다.
엄연히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었지만 내 반응은 듣지도 않고 그렇게 은하는 문고리 손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은하가 현관문을 열려는 찰나에.
텁
"...?"
"얘기 좀 하자고 제발... 잠깐이면 되니까..."
"..."
온 힘을 다해 몸은 던진 내가 은하의 팔을 잡았다.
"... 일단 늦었으니까 나중에 얘기하..."
"야이 씨발!! 내가 그렇게 싫냐?"
"... 너 지금 뭐라고..."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내가 잘못한 건 맞는데 적어도 사과를 할 기회는 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
결국 저질렀다. 그것도 한껏 빌어도 모자랄 참에 욕까지 내뱉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화도 화지만 내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
은하가 냉담하게 나를 노려봤다.
나 또한 여기서 물러서면 정말 답도 없다는 걸 알았기에 은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 그래 좋아. 말해 봐"
"...!"
"사과까지는 기대도 안 했는데... 그렇게 사과해야겠다고 하니 뭐. 대신에 5분 내로 말해. 나도 나가야 되니까 말이야"
"무, 물론이지! 어... 일단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한 것은 말이지..."
그렇게 현관 앞에서 난데 없는 고해성사가 이루어졌다.
나는 솔직하게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를 은하에게 말했고 분위기에 휩쓸려 작디 작은 장난질을 한 것까지도 모조리 고백했다.
음식을 할 때 괜히 은하 쪽으로 야채를 많이 덜어 줬다 던지, 빨래하면서 나온 5000천 원을 몰래 슬쩍 했다는지 정말 별의별 얘기들이 내 입속에서 다 나왔다.
"그리고 또... 어..."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더 이상 얘깃거리가 떨어진 나는 조용히 은하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게 끝이야?"
"어...? 아니 더 있긴 한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말꼬리는 점점 길게 늘어져갔다.
'... 아니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지? 나는 그냥 진정성 있는 사과하고자 했을 뿐인데...'
"끝났나보네. 더 이상 말도 없고 말이야"
"..."
은하의 말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숨 막히는 침묵이 일어났고.
"... 풋!"
"...?"
"푸하하하!!! 진짜 존나 재밌네!!!"
'... 어?'
그 침묵은 전혀 뜬금없는 은하의 웃음소리로 인해 깨어지게 되었다.
은하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너무 웃겨서 눈물이 다 나오네 진짜..."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으로 닦으며 은하가 중얼거렸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멍하니 은하를 바라봤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서늘했던 은하의 눈빛과 말투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
뭔가가 잘못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