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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 속 처녀 지키기-43화 (43/72)

〈 43화 〉 뜻밖의 사건(3)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아니 무슨 군대에 있을 때는 뒤지게 안 가더니 왜 이럴 때만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지?

뭐 어쨌든 나갈 채비를 마치고 나는 은하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똑똑­

"...?"

침대에 엎어진 체 휴대폰을 하고 있던 은하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봤다.

"야. 나 오늘 친구 생일이라서 조금 늦게 올 거니까 밥 알아서 챙겨 먹어라"

"친구 생일? 전에 만났다는 그 친구?"

"응. 대충 자정쯤에 올 것 같으니까 걍 먼저 자도 되고"

내 말에 은하가 자세를 똑바로잡았다.

"여자 친구?"

멈칫­

"..."

감정이 담기지 않은 말이었다.

여자 친구. 은하의 말대로 수아는 내 여사친이 맞았다.

"... 동성이야 미친년아"

하지만 나는 은하에게 이성이 아닌 동성인 친구를 만난다고 거짓말했다.

거짓말을 한 이유는 딱히 없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냥 얘 앞에서 여사친을 만나러 간다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 어차피 얘는 내가 누구를 만나고 오는지 모르잖아'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냥 대충 넘겨 버렸다.

별로 가치가 없으므로 딱히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 그러면 아니라고 말 하면 되지 미친년이 뭐야"

"그럼 뭐 쌍년이라고 대답해주랴?"

은하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 어쨌든 사고 치지 말고 혼자 잘 있어라?"

"... 참나. 내가 어린애냐? 잘 다녀오기나 하슈"

"...."

어린애보다 못한 새끼가 저런 말을 지껄이고 있으니 원.

"... 에휴 그래. 그럼 나 간다?"

뭔가 미덥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이것도 괜한 걱정이겠지 뭐.

그렇게 나는 은하의 배웅 아닌 배웅을 받으며 오피스텔에서 나왔고 택시를 잡아 뮤지컬이 열리는 예술의 전당으로 갔다.

***

"네 수고하세요~"

부르릉­

마침내 목적지인 예술의 전당에 도착했다.

'... 존나 크네'

크고 화려 했다. 지금 시기가 행사 시기라 그런지 주변 곳곳에서도 화려한 불빛들이 넘쳐흘렀고 사람들도 북적북적거렸다.

예술의 전당이야 나도 어릴 때 한 두 번 가 봤기는 했는데... 이곳은 내가 가 본 곳보다 훨씬 크고 건물이 예술적이었다.

'그 뭐야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일단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 시간까진 아직 10분이나 남아 있었으니 시각은 충분했다.

웅성웅성­

"..."

입구에도 사람들은 많았다.

'... 이게 다 그 뮤지컬 보려고 온 사람들인가?'

어린 꼬마 애들부터 시작해 지고 나이 든 노인분들까지. 연령도 참 다양했다.

가족, 친구, 동아리같은 조직들도 듬성듬성 보였지만 역시나 커플로 보이는 남녀들이 제일 많이 눈에 띄었다.

'... 그나저나 수아 얘는 언제 오는 거야?'

주위를 둘러 봤지만 수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또 늦게 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진성아!"

뒤에서 수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이번에는 늦지 않게 도착한 모양이다.

"... 어 왔냐?"

"으응... 오늘도 나보다 일찍 왔네"

"아니야. 나도 방금 도착했어"

"그래? 다행이다. 헤헤..."

방긋 미소를 짓는 수아의 모습을 나는 유심히 바라봤다.

'... 오늘도 예쁘게 입고 왔는데...'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꾸민 수아는 내 기준에서는 매우 예뻤다.

"... 흐음...!"

"응? 왜?"

"... 별거 아니야"

물론 수아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는 여전히 역겨웠다.

하지만 이 역시 내 처지에선 나쁘지는 않았다.

'... 향수 냄새 역하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아마 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수아 역시 향수는 계속 뿌리고 다닐 것이다.

주머니에서 뮤지컬 티켓은 꺼내 들었다.

현재 시각은 7시.

"뮤지컬은... 7시 30분이니까 30분이나 남았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내 말을 들었는지 은하가 한쪽에 놓여져 있는 카페 부스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우리 저기 앞에 있는 카페나 들릴까?"

"... 그럴까? 그런데 극장에서 음료수 가져가면 안되냐?"

"응? 당연히 안 되지. 아마 물만 반입이 가능할걸?"

그렇단다. 영화관처럼 팝콘까진 아니어도 음료수는 반입이 될 줄 알았는데. 이건 또 엄격하네?

"어! 저기 자리 하나 비었다. 빨리 가자 진성아!"

"어어..."

수아의 팔에 이끌린 체로 그렇게 우리는 카페로 갔다.

딸깍­

"빨리 나왔네. 자 여기 받아"

"어 응. 고맙다. 잘 먹을게"

내 말에 수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빨리 보고 싶다... 진짜 꼭 보고 싶은 거였는데 헤헤..."

"..."

"진성이 너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보려는 오리의 사랑이라는 뮤지컬은 말이야..."

자리에 앉은 수아는 열띤 표정으로 신나게 뮤지컬에 관한 이야기를 쫑알거렸다.

그렇게나 좋을까? 나야 뭐 뮤지컬에 대해 관심이 아에 없으니 별 감흥은 들지 않으니까 뭐.

'... 하지만 그래도 얘가 이렇게까지 뮤지컬에 진심일 줄은 몰랐는데'

그동안 무슨 얘기를 하든 간에 늘 차분함을 잃지 않은 수아였지만 오늘 만큼은 완전히 달랐다.

지금 당장 저 반짝 거리는 눈빛만 보더라도 저 수아는 내가 알던 수아가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 어 이제 들어가나 본데? 저쪽이 우리가 보려는 뮤지컬 극장 아니야?"

"...!"

마침내 입장 시간이 다가왔다.

내 말에 아직 음료가 남아 있던 수아는 한 번에 남은 음료를 모두 마셔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진성아!"

"..."

참 오늘 여러모로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주는 수아였다.

우리는 수많은 인파들과 함께 극장으로 들어갔다.

"... 와"

'존나 크네'

극장은 크고 어두웠다. 무대에선 무슨 연기 같은 게 모락모락 피어나기도 했는데 뭔지는 잘 모르겠다.

"C열이... 아 이쪽이야 진성아!"

"어 응..."

"우와... 자리 진짜 좋다...! 헤헤"

우리의 자리는 좌석 정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VIP석이라길레 나는 따로 자리가 마련이 되는 줄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 그래도 확실히 좋기는 하네'

자리에 앉고 앞에 있는 무대를 바라봤다.

저 커다란 무대가 한눈에 다 들어올 정도였으니 역시 VIP석은 VIP석인인가 보다.

아무튼,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갑자기 무대의 불이 켜지더니 드디어 뮤지컬이 시작이 되었다.

[...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내가 말했잖소. 나는 언제나 그대의 곁에서...]

공연이 시작되고 약 20분가량이 흘렀을 때다.

화려한 노래와 파격적인 연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무대 위에 배우들은 열심히 자신들의 연기를 펼쳐 나갔다.

"하아암...."

'... 졸린데'

하지만 나랑은 맞지 않은 모양이다.

힐끗­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수아를 바라봤다.

"..."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체 공연을 보고 있는 수아였다.

얼마나 뮤지컬에 집중을 했는지 내 쪽은 처다도 보지 않았다.

이게 그렇게 재미있을까? 난 그냥 졸립기만한데...

'게다가 이거 200분짜리 뮤지컬이잖아 씨발...'

이제 막 20분이 흘렀으니 앞으로 3시간이나 더 남았다는 것인데... 솔직히 나는 남은 3시간을 온정신으로 버틸 자신이 없었다.

♪♬♩♬♬♪♪­

'아...'

때마침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주인공이 혼자 독백으로 자기 마음을 생각하는 장면.

"..."

잠을 자기에 딱 좋은 씬이었다.

'... 이건 예의가 아닌데...'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내 눈은 슬그머니 감겨졌다.

옆에서 수아의 향수 냄새가 내 머리를 어지럽히긴 했지만, 그래도 잠은 솔솔 왔다.

결국 노래를 자장가 삼아 나는 천천히 잠에 빠지기 시작했고 어느덧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 성아..."

"..."

"... 진성아!!"

"어어...?!"

"일어나. 뮤지컬 끝났어!"

"... 어?"

벌써 3시간이 지나갔다고? 방금 막 눈을 감은 것 같았는데?

수아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정말로 뮤지컬이 끝났는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을 나가는 추새였다.

"많이 피곤했구나? 공연 내내 잠에 빠질 줄은 몰랐는데"

"... 아하하..."

뒤늦게 몰려오는 무안 함에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그래도 수아 얘는 나름 즐겁게 본 것 같네'

머리를 긁적이면서 수아를 바라봤다.

뮤지컬을 보지 않은 나와는 다르게 수아는 되게 여운이 있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진짜 너무 좋다... 이런 뮤지컬을 내 인생에서 또 볼 수 있을까..."

"..."

"특히나 마지막에 로잘리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는 장면은 정말인지..."

... 뭐 어쨌든 되게 재미있었나 보다.

"... 이제 우리도 나갈까?"

"... 어? ... 그래 나가자. 벌써 12시가 다 돼 가네"

결국, 내가 강제로 여운을 끊어 줌과 동시에 그렇게 우리는 극장을 나왔다.

예술의 전당을 나가고 우리는 외곽 근처에 위치한 벤츠에 잠시 앉았다.

"여기 받아"

"어으 따뜻하네... 고맙다"

"아니야 헤헤..."

수아가 내게 자판기에서 뽑은 코코아를 건넸다.

작은 종이컵 안에 담긴 코코아는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녹여줬다.

"..."

"..."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또한 조용히 코코아를 마셨다.

'아 그러고 보니...'

"... 저기 잠깐만 기다려 봐"

"...?"

그때 뭔가가 생각난 나는 반쯤 마신 코코아를 옆에 내려놓고 주머니를 뒤졌다.

바스락­

'여깄네'

그리고 내가 찾고 있던 물건이 손에 쥐어지며 나는 그 물건을 수아에게 건네줬다.

"조금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 어?"

내 말에 수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수아에게 건넨 물건은 포장지로 싸여 있는 작은 선물이었다.

되게 얼떨덜한 표정으로 내 선물을 받은 수아는 곧바로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 우와 이거 뭐야?"

포장지 속에서 나온 물건은 다름이 아닌 팔찌였다.

"... 뭘 선물해 주면 좋을까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다. 혹시 마음에 안 들면 말해. 나중에 다시 선물해 줄게"

"아니야!! 진짜 마음에 들어...! 고마워 진성아..."

"... 고맙기는 무슨..."

괜히 부끄러워지는 나였다.

물론 수아가 사이코패스끼를 가졌다곤 하지만 그래도 지낸 정이 있는데. 생일은 당연히 챙겨 줘야 되는 게 아닐까? 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 예쁘다 헤헤..."

"..."

헤벌레 미소를 지으며 수아가 손목에 팔찌를 꼈다.

저렇게 좋아해 주는 모습을 보니 나 또한 저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

...

...

문득 담배가 마려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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