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뜻밖의 사건(2)
* * *
"... 어휴 진빠지네..."
늦은 밤. 오피스텔 입구를 들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고시원 근처에서 수아랑 헤어지고 택시를 잡아서 오피스텔로 오는 기분은 참... 그냥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띠리릭
"와그작... 어 왔냐?"
그렇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거실에서 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래 다녀왔다"
"근데 어디 갔다 왔냐?"
"... 걍 친구랑 식사하러..."
"그래?"
은하가 과자를 먹으면서 말했다.
나는 잠깐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 새끼 존나 편해 보이네'
편한 복장에 느릿느릿한 몸동작.
세상 편한 자세로 소파에 누워 티비를 시청하는 은하였다.
이거 안 되겠다. 나도 빨리 씻고 옷 갈아입어야지.
빠르게 방으로 들어가 갈아입을 옷을 꺼내 들고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딸칵
촤아아
옷을 모두 벗고 물의 온도를 따뜻하게 맞춘 뒤 곧장 머리를 들이댔다.
그렇게 적당히 몸을 뎁히고 앞에 있는 샴푸에 펌프질을 해 본격적으로 머리를 감기 시작했는데.
쾅쾅!
"...?"
유진성... 나 화장실 존나 급한데...
'... 뭐?'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야 나 지금 방금 샴푸질 했는데"
나 쌀 것 같아... 빨리 좀 해 봐!!
"아니 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말이 끝까지 안 나왔다.
'이 새끼 또 장난 치는 거 아니야?'
쾅쾅쾅!!
야 제발... 빨리 끝내라고!
그러기엔 행동이 너무 진심이었다.
"아니 씨발 왜 갑자기 내가 샤워할 때 지랄이야! 나 화장실 들어오기 전에는 뭐 했는데?!"
... 드라마 때문에 계속 참고 있었는데 너가 곧바로 화장실에 들어갈 줄 몰랐...!! 야야야야야!!! 나 진짜 싼다고 씨발!!!
"..."
저렇게 다급한 목소리 또한 이번이 처음이었다.
서로가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큰거 작은거?!"
"자, 작은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가장 효율적이게 할 수 있는 행동.
따끔
"아얏...!"
머리에 바른 샴푸가 거품 그 상태로 얼굴에 떨어졌다.
역시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 샴푸였다.
'... 일단 그러면 대충 샴푸만 물로 헹구고 나가는 게...'
쾅쾅쾅!
"... 아 알았어!! 샴푸만 닦고 바로 나갈게...!!"
진짜 이게 무슨 낭패인지... 물론 당연히 얘랑 동거하게 되면 민감한 문제가 한두개쯤 있으리라 생각했지만설마 이런 문제가 생길지는 꿈에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하냐고 씨발..!'
촤아아
서둘러 머리에 묻은 샴푸를 물로 행구었다.
그리고 정확히 5초가 지났을 무렵.
덜컥
'... 어?'
"너, 너너 지금 뭐 하는...!"
"... 미안!"
닫혀 있던 화장실 문이 활짝 열리고 은하가 다급하게 화장실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몸을 뒤로 돌리며 소리쳤고 그러거나 말거나 은하는 곧바로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엉덩이를 부착시켰다.
"... 금방 싸고 나갈게..."
"이, 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화장실에 들어온 적은, 그것도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렇게 들어온 적은 살면서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뭐? 금방 싸고 나갈게?'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진짜. 아니 애초에 내가 옷가지를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먼저 말했으면 되는 거 아니었냐고. 누가 봐도 나 샤워해요 라는 티를 내면서 들어갔는데 말이야!
"... 씨발! 빨리 싸고 나가 이 미친년아!!"
"아, 알았어...!"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이런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은하가 빨리 볼일을 끝내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겠지.
그런데 이 새끼... 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거지?
"... 너 뭐야? 왜 안 일어나?!"
"..."
"...?"
아니 왜 침묵하는 거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에라도 쌀 것처럼 얘기하더니?
고개를 살짝 돌려 은하를 노려봤다.
"..."
"..."
은하 역시 조심스럽게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멋쩍게 웃음을 터뜨렸다.
"... 이상하다 왜 안 나오지? 하핳..."
"... 뭐?"
왜 안 나오지? 지금 왜 안 나오지 라고 말한 거야?
뚝
순간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텁
"이상하다.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엄청 마려웠..."
휘욱
"우왓..!!"
이성을 잃은 나는 주변에 손이 되는 물건들을 마구 집어 들어 그대로 은하에게 던졌다.
휙 휘욱
"야야!! 그, 그만던져!! 아프다고!!"
내 모습에 놀란 은하가 손으로 날아오는 물건들을 막았고 나 또한 쉴 틈 없이 샴푸통이나 바디로션등을 던져댔다.
"헉... 헉..."
마침내 더 이상 던질 물건이 떨어지게 되자 나는 샤워 호스를 빼서 물을 찬물로 맞춰 놓은 뒤 그대로 은하를 향해 겨냥했다.
"아악!!! 지금 뭐하는 거야!!! 옷 다 젖잖아!!"
"@*^@!!!"
"뭐라는 거야 씨발!!"
옷이 젖든 말든 간에 나는 계속 은하를 향해 물을 발사했고 마침내 은하가 화장실에서 나가서야 일이 그렇게 종료가 되었다.
"하아... 하아..."
숨을 가쁘게 들이 마시며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순식간에 화장실이 난장판이 되버렸다.
바닥에는 샤워용품들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고 미리 꺼내 놨던 수건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이런 화장실에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짓거리가 나왔다.
"... 씨발"
작게 내뱉은 한마디가 지금에 나의 심정을 대신해 주는 것 같았다.
**
시간이 흐르고.
[~해서 오늘 알아볼 것은 바로...!]
"..."
"..."
"..."
"..."
어색하다못해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나와 은하는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같은 소파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있지는 않았다.
은하는 맨 왼쪽 자리에 위치에 있었고 나는 그 반대인 오른쪽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거리감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은하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은하 또한 내가 저지른 행동 때문인지 약간의 불만감이 있어 보였다.
물론 불만의 크기는 완전히 달랐지만 말이다.
내가 80정도 화가나 있다면 은하는 대충 10정도로?
때문에 은하가 내 눈치를 보는 입장이었고 나는 그런 은하를 무시하는 그런 입장이었다.
[... 어머! 이게 그렇게 여자에게 좋다고요?]
[그러어엄! 이것이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보약이여! 이거 하나만 먹으면 그날 밤은...]
"..."
"..."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럴 수는 없었다.
"... 서은하"
흠짓
"... 어, 어?"
내가 차분하게 은하를 부르자 은하가 화들짝 놀라하며 나를 돌아봤다.
"잘못했지?"
"... 으응..."
"우리가 아무리 편한 사이라도 아까 전에 상황은 솔직히 선을 넘은 거야. 우린... 어른이잖아. 그것도 이성이고 말이야"
"..."
내 말에 은하가 고개를 푹 거리며 숙였다.
시무룩한 표정과 풀이 죽은 어깨.
'... 꼭 토라진 강아지 같네'
... 아니 진지한 분위기에서 나란 놈은 뭔 생각을 처하는 거야?
"... 어쨌든 다음부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서로 주의하자"
"알겠어. 미안하다..."
"... 그래. 나도 물 뿌린 거 미안해"
은하가 사과를 했고 나 또한 은하에게 사과했다.
감정을 묵히는 일은, 그것도 같은 한 집에 살면서 풀지 않고 참아내는 일은 나중에 큰 화를 부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건 빨리빨리 풀어 버려야지'
인간관계든 일이든 뭐든지 빨리빨리 해결하는 게 최선의 방도이다.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말이다.
어찌 됐건 이렇게 서로 화해도 했고 나도 이만 기를 가라앉히는 게...
부스럭
"...?"
부스럭 부스럭
'... 얘 좀 봐라?'
그때 갑자기 옆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맨 끝에 자리했던 은하가 어느새 중간에 앉혀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눈빛으로 은하를 바라봤는데... 참나. 갑자기 딴청을 피우는 척을 하며 은하는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흐음..."
'... 새끼가 귀여운 짓만 골라 하네'
그렇게 은하에게서 시선을 때자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어느새 바로 옆자리까지 엉덩이를 옮긴 은하였다.
"... 뭐 하냐?"
"어...? 그냥 이쪽이 더 티비가 잘 보여서..."
"..."
"... 힣"
은하가 내게 바보 같은 미소를 지어줬다.
참 모습과 맞지 않게 은하의 미소는 순수로 가득한 미소였다.
벌떡
"...?"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은하가 깜짝 놀라하며 나를 바라봤다.
"... 어어? 왜 갑자기 일어나...? 설마 화 안 풀린 거야...?"
"... 뭐래. 내가 방금 말한 걸 넌 뭘로 처들었냐?"
"그럼 왜...?"
의아해 하는 은하의 모습에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옷이나 입어 새꺄. 담배나 태우러가자"
"... 어어?"
"참고로 나 담배 다 떨어졌으니까 니가 내꺼까지 챙겨라? 알았지?"
그 말을 끝으로 옷을 입기 위해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철컥
... 아오 뭔 맨날 내 담배만 처피우냐!!
"... 풋!"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거실에서 은하가 한탄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저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