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뜻밖의 사건
* * *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주문하시겠어요?"
"아... 조금 이따 일행이 같이 오면 그때 주문할게요"
"아 알겠습니다~"
환한 불빛과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느 유명한 돈가스 집이었다.
"하아..."
나도 모르게 계속 물을 들이마셨다.
오늘은 수아와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수아말로는 내게 건네줄 물건이 있다는 데... 그럼 택배로 보내면 되지 뭘 굳이 만나서 건네주겠다는 건지.
에휴 뭐 어쩌겠는가. 만나자면 만나야지 괜히 또 그런 말 했다간 이상한 오해를 잡힐 수 있으니 뭐.
'... 그나저나 얘는 언제 오는 거야?'
휴대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식당에 온 지 약 10분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뭐 오다가 사고라도 난 건가?
"...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다시 한번 컵에 물을 따르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정말 나쁜 말이었지만 그만큼 지금 이 자리가 내게 있어선 되게 거북스럽고 불편한 자리였다.
"진성아...?"
그렇게 내가 계속 물만 마시고 있을 무렵 뒤에서 그렇게 듣고 싶지 않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왔나 보네'
"어 왔..."
수아에게 인사하려고 뒤를 돌았다.
멈칫
그리고 수아의 모습을 보고 몸을 굳어졌다.
"... 조금 꾸며입고 나왔는데... 괜찮으려나 헤헤..."
"..."
숨이 멎는 듯했다.
수아에 계속 부정적인 생각을 해온 나였지만 지금은 하나의 생각 밖에 떠오르지가 않았다.
'... 예쁘네'
예뻤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말 예쁘게 차려 입고 나왔다는 게 옳은 말일 거다.
평소 수수한 옷을 즐겨 입는 수아가 이러게 차려 입고 나오니... 그냥 예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저기 그렇게 보는 건 조금 그런데..."
"어어...? 어... 미안..."
"내가 조금 늦었지...? 미안해 오다가 길을 잘못 들려 가지고..."
"... 으응. 그래..."
"헤헤... 배고프겠다. 일단 주문부터 하자"
그러면서 수아는 자연스럽게 벨을 눌러 종업원을 불렀다.
나는 수아를 멍하니 바라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기분이 이상한 내가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다.
'...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분명히 내가 아는 수아가 맞는데. 그때 내게 살벌한 고백을 했던 수아가 맞는데.... 왜 역겹지 않은 거지?
"진성아 너는 뭐 시킬거야?"
"으응...? 어... 나는 그냥 일반 돈가스로..."
"부담 갖지 말고 먹고 싶은 거 시켜. 내가 사주기로 했잖아"
수아가 내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지랄났네 진짜'
그동안 내가 피해 다닌 건 도대체 뭔데 그럼.
무슨 마법에 걸린 것도 아니고 그냥 안 꾸미던 얘가 살짝만 꾸몄을 뿐이잖아. 그런데 왜 마음이 이렇게 바뀌는 거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 씨발.
'그냥 내가 병신인 건가?'
"... 해 진성아?"
"... 어어?"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 갑자기 말도 없어지고 말이야... 응?"
"..."
수아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벌떡
더 이상은 안 되겠다.
"...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어?"
"음식 나오면 그냥 먼저 먹고 있어"
화장실에서 세수라도 해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뒤쪽에서 들리는 수아의 목소리가 대충 무시하고 그렇게 나는 다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끼릭
촤아아
"..."
시원하다 못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찬물이 쏟아졌다.
손으로 한 손 가득 찬물을 담아 거칠게 얼굴에 닦았다.
"아으으..."
절로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만큼 정신 또한 바짝 차려졌다.
'... 알고 있잖아. 수아는 수아라는 걸. 너무 외향적인 면에 속지 말자 진성아. 이미 은하를 통해서 많이 깨달았잖아'
그래. 지금은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다.
그날 내가 들었던 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고 위험을 알면서도 당하는 건 정말 등신 같은 짓이다.
'... 이제 슬슬 나갈까?'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느낌이다.
혼란스러웠던 머릿속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됐고 괜히 이상한 의심을 받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휴지로 대충 얼굴에 있는 물기를 닦고 나는 화장실에서 나와 테이블로 돌아갔다.
"응? 진성아 왔어?"
"... 벌써 나왔네.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고 있지"
"에이... 그래도 같이 먹어야지~"
... 착하기도 하셔라. 일단 음식이 나왔으니 자리에 앉아서...
"...?!"
'이게 무슨 냄새지?'
그때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내 코를 찔러왔다.
독한 향수 냄새. 인위적일걸 싫어하는 내가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는 것이 향수인데 그 냄새가 갑자기 이 자리에서 나기 시작했다.
'누구지? 누가 향수를 뿌린 거야 씨발'
왜지? 아까는 안 났는데 왜 갑자기 앞쪽에서 향수 냄새가 나는... 잠깐만 앞쪽이라고?
"... 진성아 갑자기 왜 그래?"
"... 아니 그냥... 혹시 나 없는 사이에 향수 같은 거 뿌렸어?"
흠짓
"어, 어...? 이상해? 그래도 너가 좋아하는 냄새로 뿌려봤는데 헤헤..."
"..."
이게 내가 좋아하는 냄새라고? 이런 냄새를? 왜?
아니 냄새를 떠나서 애초에 나는 화학적인 냄새 자체를 싫어하는데?
'설마 과거에 나는 향수에 별로 관심이 없었었나?'
그렇다면 수아의 행동도 이해가 가는데... 문제는 내가 수아가 알던 내가 아니라는 거잖아.
"... 별로야? 역시 하지 말까?"
"... 아니야. 괜찮네..."
'으윽...! 냄새 한번 지독하네!'
덕분에 다시 한번 정신이 번쩍 들게 되었다.
"... 앞으로 계속 그거 뿌리고 다녀... 냄새 좋네..."
"정말? 다행이다...! 나 이런 건 처음 뿌려 봐서 조금 걱정이 많이 됐거든..."
수아의 말에 나는 억지 미소로 화답을 해줬다.
처음으로 예쁘장하게 꾸민 수아의 모습에 크게 흔들린 나였지만 향수로 인해 수아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수아랑 만나면 무조건 향수를 뿌리고 오라고 말해야겠네'
이런 걸 운이 좋다고 말해야 하는건지 뭐 어쨌든 예상치도 못한 상황은 또 다른 예상치도 못한 상황으로 그렇게 해결이 되는 듯했다.
"내 것도 덜어 줄까?"
"... 아니 난 이걸로 충분해서..."
물론 향수 때문에 식사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런 냄새 속에서 돈가스라니. 상성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때문에 돈가스는 3분의 1정도밖에 못 먹었고 수아가 같이 시킨 피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여기 피클 좀 리필해 주세요"
대신에 야채피클은 무진장 많이 먹었다.
***
"으으...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네..."
"... 그러게 말이야"
우여곡절 끝에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거리로 나왔다.
여기서 후식으로 카페를 가자고 제안한 수아였지만 내가 속이 안 좋다는 핑계를 돼서 그냥 집까지만, 전에 살던 고시원까지 수아가 데려다주기로 했다.
"우와 저 사람 좀 봐. 이 날씨에 반팔 반바지를 입고 다녀!"
"..."
'설마 이 새끼가?'
혹시나 해서 수아가 말한 사람을 바라봤는데 다행히 처음 보는 여자였다.
"... 근데 너 뭐 나한테 전해 줄 물건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으응? 아 맞다!"
내 말에 수아가 자리에서 멈춰 서며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웬 봉투 하나를 꺼내서 내게 건넸는데...
"... 이게 뭐야?"
"나도 몰라. 사실 너랑 전화하기 전에 진아랑 잠깐 만난 적이 있었거든?"
진아? 여기서 갑자기 걔 이름이 왜 나와?
"나한테 이 봉투를 건네주고 절대 열어 보지 말라고 말하면서 너한테 건네주라고 하던데?"
"... 진아가?"
으음... 뭔가 느낌이 불길하다. 이럴 거면 직접 만나서 주는 게 더 효율적이지 왜 하필 수아를 통해 물건을 건낸 거지?
'분명 무슨 이상한 짓거리를 해 놓은 것 같은데...'
대충 눈치를 보니까 수아도 정말 모르는 것 같고 그럼 일단 까보고 생각해 볼까?
뚜둑
"...?"
그렇게 봉투를 뜯었는데... 이게 웬걸. 봉투 안에는 무슨 티켓처럼 보이는 종이 두장과 진아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포스트잇 한 장이 담겨져 있었다.
티켓은 일단 뒤로 하고 나는 빠르게 포스트잇에 적힌 글씨를 읽어나갔다.
{오빠! 나한테 고마워해야 되는 거 알지? 내가 그거 구하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진짜 이런 동생을 가진 남자는 오빠밖에 없을 거야. 아무튼 이번에는 꼭 좋은 소식이 있길 바래. 어차피 오빠에겐 수아 언니만한 여자도 없잖아? 안 그래? ㅋㅋ to 진아}
"..."
편지를 모두 읽었지만 나는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왜 수아랑 좋은 소식이 있길 바라는 건데?'
"잠깐만. 그럼 이거는..."
그제서야 나는 진아가 보낸 티켓을 자세하게 들여다봤다.
"... 오리의 사랑? 이게 뭐야?"
"뭐? 그게 엄청 유명한 뮤지컬 아니야?"
내 말에 수아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 뮤지컬?"
"어. 한달 전에 티켓팅이 모두 끝나서 이제는 못 구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심지어 VIP석이네? 이걸 어떻게 구한 거지?"
"... 이걸 왜 나한테..."
뮤지컬이라니. 난 뮤지컬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아니 그보다도 이건 뭐 나랑 수아랑 같이 보라고 두장을 보내준 거야?
"... 저기 진성아"
갑자기 수아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나 이거 꼭 보고 싶은 뮤지컬이었는데... 암표를 구해도 정말 말도 안 되는 가격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뮤지컬이야 이건"
"... 그, 그래?"
"심지어 VIP석은 암표로도 못 구하는 자리야... 같이 보러 가자. 응?"
"..."
특유의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는 수아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씨발. 어떡하지? 마음과 같아선 거절을 하고 싶은데...'
하지만 그러기엔 명분이 부족했다. 물론 그날 다른 약속이 있다고 거절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 이거 내 생일날짜잖아?"
"...?"
"이걸 어떻게 맞춘거지? VIP석에 날짜까지 맞춰서 티켓을 구했다고?"
뒤이어 들려오는 수아의 말에 차마 그날 선약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진성아..."
"..."
수아의 눈동자에서 당황해 하는 내 모습이 온전하게 비쳐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