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 속 처녀 지키기-39화 (39/72)

〈 39화 〉 하숙(6)

* * *

띠리링­

"...?"

소파에 앉아 멍하니 티비를 보던 중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은하인가?"

휴대폰에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지만 애석하게도 전화를 건 사람은 은하가 아니었다.

[성수아]

"..."

그 석 자의 이름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정말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여행이 끝나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수아는 적극적으로 나와 연락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을 어찌할 명분이 없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때의 수아가 했던 말들이 명확하게 기억난다.

[정말 많은 성공을 얻어왔지만 늘 어딘가가 비틀어져 있었어]

[내가 이상한 생각을 갖지 않게 행동해 줘]

뒤틀려 있다. 수아는 처음부터 뒤틀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눈을 감고 침묵을 하는 것밖에 없었다.

띠리링­

"... 여보세요"

[응 진성아. 나야]

"무슨 일이야."

[으응. 그냥 안부차랄까? 히히]

전화를 받았다.

늘 들어왔던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들려왔다.

이 순간부터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시작됐다.

확신은 안 섰지만 그날 수아는 내가 자고 있지 않은 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은....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아는 평화로운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 했고 그 때부터 서로를 향한 연기하기 시작됐다.

'...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쓸데없는 잡설들이 주로 대화에 주제였지만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전에는 내가 대화를 주도 하고 수아가 반응했다면 지금은 수아가 대화를 주도하고 내가 반응하게 되었다.

우리 둘은 뒤바뀐 관계를 지적하지 않았고 겉으로는 정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졌지만 대화하면 할수록 나만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 참! 다음 주에 너 만나러 내려갈게]

"... 굳이 안 와도 되는데?"

[아니야. 전해 줄 물건도 있고 오랜만에 같이 식사나 하자]

"..."

그 말에 작게 탄식이 나왔다.

'식사는 무슨 씨발. 지금 너랑 만나는 것도 꺼려운데 만나서 밥까지 같이 먹자고?'

예상컨데 무조건 체할 거다.

[으응? 언제시간 돼? 내가 맞춰서 갈게]

"어... 그게 말이야..."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칼자루는 수아가 들고 있고 나는 그에 맞춰야겠지.

[... 응. 그럼 그때 만나자. 장소는 일단 내가 너희 집으로 가는 게...]

"아, 아니!!!"

[... 어?]

"... 그냥 알잖아 내가 사는 고시원 조금 경사진 곳에 있다는 거. 차라리 식당에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다급하게 수아의 말을 끊었다.

'이사를 갔다는 사실을 수아에게 들켜서는 안 돼'

그것도 이성이랑 단둘이 동거하는 상태다? 절대, 절대로 수아가 알아서는 안 된다.

'만약에 이 사실을 수아가 알게 된다면...'

[... 여보세요? 진성아?]

"... 어? 어어... 왜"

[너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 아 그리고 내가 그 주위를 몰라서 그러는데 식당은 너가 잡아 줄 수 있어?]

"... 으응. 그것도 내가 문자로 보내줄게"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뚝­

"..."

수아가 알게 된다면.... 분명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 씨발"

힘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기분이 참... 좆같았다.

누군가는 이런 내 모습을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내가 두려워하는지.

왜 수아와 맞서지 않고 저자세로 엎드리는 거지.

왜...

...

당연히 나라고 해서 그런 생각들을 안 해 본 것이 아니다.

그냥 내가 단순하게 오해를 했을지도, 아니면 수아가 장난으로 그런 말을 지껄였을 수도. 어쩌면 이 일은 별것도 아닌 문제를 나만 과민하게 반응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이잉­

­알겠어. 그럼 이 날 6시에 만나자~

"..."

나는 그날 들었다. 수아가 어떤 행동을 저질렀는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나는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는 수아의 목소리는.

­답장 해 줘ㅜㅜ

­(대충 토끼가 울면서 환호하는 이모티콘)

소름 돋을 정도로 광기에 찬 목소리였다.

***

또르륵­

"..."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씁쓸한 알코올이 목구멍에 넘어가자마자 나는 다시 한번 잔에 술을 따랐다.

깡소주. 안주도 없이 무식하게 술만 들이키는 등신 같은 행동.

애초에 원래부터 술과 친하지 않은 나였고 때문에 깡소주를 마시는 행동을 도무지 이해 하지 못했던 내가 깡소주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크흐... 존나 쓰네 씨발"

한잔, 두잔, 세잔.... 말을 쓰다고 하지만 소주잔에 술을 따르는 내 손길은 멈추지가 않았다.

답답함에 술을 찾은 나였지만 머리만 어지러워졌을 뿐 마음속에 있는 답답함은 전혀 해소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띡 띠딕­

"나 왔어~ 오는 길에 빵집에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와 함께 은하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집에 들어왔다.

"... 왔냐? 생각보다 빨리 왔네"

"뭐야? 너 왜 술 마시고 있냐? 아니 그것보다 술은 어디서 찾은 거야 내가 다 마셔버렸는데"

"... 뒷베란다에 5박슨가 있더라. 그래서 하나 꺼내 왔지"

"허이구. 심지어 깡소주네 이 미친놈이?"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냉동고에 넣어 노며 은하가 내 앞에 앉았다.

"무슨 심본데? 나 없는 사이 뭔 일이라도 생겼냐?"

"... 있어 그런 게"

"이 새끼 안 알려주네... 우리 사이가 이정도밖에 안 됐냐?"

"지랄마. 이건 부모님께도 말하지 못할 문제야. 그냥 존나 개인적인 문제라고"

"..."

내 말에 은하는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 니 말은 그럼 내가 너희 부모님이랑 같은 동급이라는 얘기야?"

"... 어휴 저 등신"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힣"

은하의 말에 나는 한삼하다는 듯 은하를 바라봤지만 은하는 내 시선에 개의치 않아 했다.

등신도 이런 등신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깡소주는 조금 오바한 거 같은데. 기다려 봐. 내가 안줏거리 좀 만들어 올게"

"... 그러던지"

자리에서 일어난 은하가 냉장고를 뒤지거나 말거나 나는 묵묵히 술을 들이켰고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자레인지에서 불이 켜졌다.

"자~ 다 됐어"

"..."

은하가 뭔가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닭강정, 닭발, 칠리새우...'

모조리 냉동 식품이었다.

"먹어. 지금까지 소주만 들이킨 것 같은데 그러면 나중에 숙취할 때 고생한다"

"... 그래 잘 먹을게"

탁자 한쪽에 수북이 쌓인 나무젓가락을 집어 봉지를 뜯었다.

생각 없이 먹는 깡소주였기에 슬슬 한계점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쪼르르­

언제 가져 왔는지 은하가 자기 잔에 술을 따랐다.

"그래서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 개인적인 문제라니까"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

그 말을 끝으로 은하는 더 이상 내게 묻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탁자 위에는 빈 술병이 빠르게 늘어나갔고 나 또한 점점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 그래서 언제까지 마실 건데?"

조용한 침묵 속에서 참다 못한 은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모르기는 개뿔. 왠만해선 나도 그냥 상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여기서 끝내자"

그러면서 은하는 내 앞에 있는 술잔과 소주를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너 지금 얼굴 존나 빨게. 술도 적당히 즐기면서 마셔야지 이건 그냥 무식한 거잖아"

"... 나 안 취했거든?"

"지랄하네. 눈에 초점이 완전히 풀려 있는데 이게 뭐가 안 취한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은하는 남은 술과 빈 병을 정리했고 나는 멍하니 은하의 행동을 바라봤다.

요즘들어 첫 인상이 얼마나 개 쓰레기 같은 판단을 불러오는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나였다.

처음에 내가 은하를 마주쳤을 때 양아치스러운 겉모습으로 은하를 꺼려했지만 지금은 은하와 동거까지 하는 사이가 되었다.

'반면에 수아는...'

물론 알 수 없는 이유로 남녀가 바껴버린 것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어쨌거나 현재 나와 수아의 관계는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낡은 밧줄과도 같았다.

그리고 이 밧줄이 끊어지는 순간 수아는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야 일어나라니까? 나도 이것만 정리하고 바로 잘거야"

"..."

"그렇게 봐도 안 줄거라니까?"

"에이씨..."

내 속마음을 다 알고 있는 듯 말하는 은하에 나는 작게나마 투정을 부렸다.

수아가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여우라면 은하는 미련한 곰이었다.

과거에 나라면 겉모습을 신경 쓰는 여우를 선호하겠지만, 이제는 멍청하지만 마음씨 만큼은 솔직한 곰이 더 나은 선택이라 생각이 들었다.

"나 안 취했다니까..."

그나저나 진짜로 안 취했는데 저 새끼는 지가 뭔데 왜 내가 취했다고 하는건지... 그냥 조금 심하게 어지러울 뿐 정신은 또렷한데 이렇게 몸의 제어권도 있는...

핑­

"... 어라"

순간 갑자기 세상이 돌아갔다.

'뭔가 느낌이 이상한...'

쿵­

그리고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느린 속도로 줄어들었다.

"...?!?!"

뒤에서 은하가 뭐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작았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기 시작하며 어느새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그토록 내가 원하던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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