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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 속 처녀 지키기-38화 (38/72)

〈 38화 〉 하숙(5)

* * *

치이익­

고기 굽는 소리가 맛있게 들려왔다.

커다란 불판 위에는 먹기 좋게 잘린 삼겹살과 감자, 마늘, 버섯등이 구워지고 있었고 내 앞에선 은하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열심히 집게질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먹어도 될 것 같은데?"

"그래. 너도 이제 그만 굽고 먹어"

"흐아아 맛있겠다..."

빨간색 살점이 먹음직스러운 갈색빛으로 바뀌며 마침내 식사가 시작됐다.

"우물우물... 맛있네...."

"천천히 먹어 임마. 체하겠다"

'뭔 한 번에 젓가락질에 고기 5점이 들어가는 거야?'

단거 좋아하고, 고기 좋아하고 몸에 안 좋은 건 무진장 좋아하는데 참 이게 그 뭐냐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인가 하는 건가?

"우물... 벌써 다 먹었네"

은하가 고기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 많던 고기가 10분도 안 돼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치이익­

은하는 자연스럽게 봉지에 남겨진 고기를 불판 위로 올렸다. 아까 마트에서 살 때 워낙 많이 사놨기 때문에 고기는 충분했다.

그렇게 먹고 굽고 먹고 굽기를 서너 번 반복했을까?

"으으.... 배가 터질 것 같아..."

"..."

"... 그래도 행복해"

"에휴 저 등신"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은하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 많은 고기를 기어코 다 처먹어 버렸으니'

무슨 뱃속에 거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충 어림잡아서 내가3, 은하가 7을 먹었을 것이다.

"... 고기는 니가 구웠으니까 설거지는 내가 할게. 넌 좀 쉬고 있어"

"어 응... 그럼 부탁 좀 할게"

식탁에서 죽으려 하는 은하를 냅두고 싱크대에 걸려져 있는 고무장갑을 꼈다.

애초에 설거지 거리도 별로 없어서 금방 끝날 것 같고... 그런데 퐁퐁이 어디 있지?

"퐁퐁? 없어? 그 뭐야 아래 뒤져 보면 안 뜯은 거 있을 거야 찾아봐"

"..."

하긴 집에서 밥을 안 먹는데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겠지. 애초에 냉동 식품도 그냥 봉지째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되니까.

'근데 그럼 고무장갑은 왜 있는 거지?'

.어쨌든 은하의 말대로 아래쪽을 뒤져 보니 뜯기지 않은 퐁퐁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퐁퐁을 꺼내 설거지를 시작했고 기름칠을 닦는 것 외에는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설거지를 끝내버렸다.

스윽­

"... 야. 이제 움직일 수 있지?"

"... 뭐 일단은 대충 소화는 된 것 같은데... 아직 좀 더 있어야겠는데?"

"지랄말고 나가서 담배나 태우러 가자"

"담배는.... 어쩔 수 없지"

그러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은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터덜터덜 현관으로 나섰다.

그렇게 우리는 오피스텔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

"후우.... 다 피웠으면 이제 들가자. 어우.... 밤이 되니까 조금 쌀쌀하네"

"..."

빠르게 한 개비를 태우고 추위에 몸을 떠는 은하였다.

그래도 담배 만큼은 폭식하지 않는 게 참으로 다행이라 나는 생각했다.

***

"아이 씨... 언니도 참"

"... 원래 니가 도와주기로 했다며"

"아니 뭐... 까먹은 내 잘못이긴 하지만...."

"닥치고 빨리 갔다 오기나 해"

"에이 씨..."

담배를 태우고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한통에 전화를 받고 은하는 다시 나갈 채비를 챙겼다.

아는 언니를 도와주기로 약속 했는데 내 이사일로 그걸 깜빡 잊어 버렸단다.

"야야. 나대지 말고 옷 좀 더 껴입어"

지금 온도가 8도까지 떨어졌는데 뭔 깡으로 안 입는 거야?

"음... 사실 내가 긴팔을 어디에 뒀는지 몰라가지고..."

"..."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아니 혼자 사는 집에서 혼자 입는 옷을 어디에 뒀는지를 왜 모르는 건데?

"그리고"

"..."

"... 솔직히 찾는 게 귀찮아 가지고 그냥 이대로 입고 다녔는데..."

"... 에휴"

너무 한심하거나 바보스러우면 내 일도 아닌데 화가 난다고 했는가?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랬다.

'이건 뭐 등신도 아니고'

"... 그래서 그냥 그렇게 가려고?"

"뭐 어떡해. 그냥 가야지"

".... 진짜 한숨만 멈추지가 않는다 너 때문에"

스윽­

그러면서 나는 내가 입고 있는 후드집업을 벗어 은하에게 건넸다.

"자"

"... 어?"

"받으라고. 이거 안에 기모노 있는 거라서 생각보다 따뜻할 거야"

"... 어어?"

내 말에 은하가 멍하니 나를 바라봤고 그 눈빛 속에서 나는 당황스러움을 엿 볼 수 있었다.

"팔 아프니까 받으라고 새꺄"

"야, 야! 그걸 왜 던져!"

"그럼 빨리 받던가 가만히 서서 뭐 하는데"

"아니..."

"됐으면 이제 그만 가. 약속 늦었다며"

"..."

끝까지 망설여하는 은하였지만 내 성의에 못 이겨 결국엔 후드집업을 입은 은하였다.

후드집업이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부비적 거리는 은하를 나는 한심하게 바라봤다.

"... 고맙다"

"고맙기는 무슨. 빨리 가기나 해"

"올 때 뭐라도 좀 사 올까?"

"아 좀 가라고"

"아이스크림? 아니 남자얘들은 마카롱 좋아하나?"

그렇게 10분가량을 현관에서 머물다 은하는 집을 나갔다.

털썩­

힘겹게 소파에 앉았다.

"어휴 무슨 이게 애새끼 키우는 것도 아니고..."

애새끼는 귀여운 면이라도 있지 은하 저년은....

[히히... 야 이거 느낌 완전 좋아!!]

[응? 나 기모노 들어간 옷 처음 입어보거든. 이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 따뜻하네]

".... 이렇게 보니 살짝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흠짓­

"뭐, 뭐라는 거야 씨발?! 그 새끼가 하는 행동이 뭐가 귀여워 등신 같기만 하지"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살떨려 뒤질뻔했는데. 정신 좀 차리자 진성아. 그래 봤자 은하야.

"... 에휴"

이게 뭐 하는 짓거린 지. 옛날과 같았으면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을 텐데. 이게 인과 관계인가?

".... 은하 오기 전에 집청소나 할까?"

물론 다음 주에 대청소를 하기로 했지만 간단하게 쓸고 닦기만 하는 건 상관이 없겠지.

애초에 가장 큰 목적이 잡생각을 안 하기 위해서지만 겸사겸사 시간도 때울 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소기와 걸레를 찾아다녔다.

위이잉­

"... 하이고 생각해 보니까 청소할 곳도 많겠네"

고시원에 있을 때는 쓰레받기로도 충분히 청소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뭐... 나중에 대청소를 시작하면 하루가 완전히 날아가겠는데?

어쨌든 그렇게 청소기를 돌리며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했고 걸레질로 바닥을 깨끗하게 쓸어 닦았다.

은하의 방을 청소할 땐 살짝 불안감도 있었지만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빠르게 바닥을 청소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탕­

"어으... 팔아파 뒤지겠네.

마침내 청소를 모두 끝내버리고 나는 욱신 거리는 팔을 쭉 뻗으면서 소파에 몸을 던졌다.

생각보다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막상 다 해 놓고나니 뿌듯하기는 했다.

'바닥이 빛이나네 빛이나'

맨들맨들한 바닥을 보니 내가 다 깨끗해지는 기분이다.

"리모컨이 어디 있더라..."

이제 정말 할 일도 없겠다. 은하가 돌아올 때 동안 기다리면서 티비나 시청할 생각으로 리모컨을 찾았다.

"아 저기 있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티비 아래 책상에 리모컨이 있는 걸 발견했다.

내가 아침에 볼 때만 하더라도 분명 소파에다 올려놨는데 그사이 은하가 절로 옮겼나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리모컨을 가지러 앞으로 갔다.

미끌­

'어라?'

쾅­

그리고 내가 닦은 바닥에 발을 헛디디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자리에서 넘어졌다.

"...!!!"

아프다. 존나 아프다 씨발. 쪽팔리거나 그런 건 둘째치고 그냥 무식하게 아프니 짜증이 확 올라왔다.

"씨발..."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는 건지, 아니면 모서리 부분이나 그런 곳에 부딪힌 것은 아니니 그래도 다행히라고 여겨야 될지 사실 뭘 어떻게 생각해도 그냥 일반적이 내 잘못이었지만 오히려 상황이 그렇기에 더욱 억울했다.

".... 집안용 슬리퍼도 사던가 해야겠네'

점점 사야 될 것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기분이다.

뭐 어쨌든 아픈 건 대충 넘어가고 본래의 목표였던 리모컨을 잡았다.

이제 다시 소파 위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뭔가가 떨어져 있는데?

'뭐야 이건?'

조금 전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던 바닥에 느닷없이 사진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넘어진 충격으로 어디 알 수 없는 곳에서 떨어진 것 같은데 일단 나는 사진을 집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

사진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은하가 서 있었고 왼쪽에는...

'그때 곱창집 남자 아니야?'

비록 한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특유의 기생오래비같은 분위기는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떨어진 거지? 아니 그리고 그때 제 3자의 처지에서 봤을 땐 되게 사이가 안 좋아 보였는데 얘는 용캐 이런 걸 가지고 다니네?

"... 새끼 웃는 거 봐라'

사진 속에선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은하가 기생오래비새끼가 서로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이런 게 사랑일까? 서로의 얼굴만 봐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반대로 생각하면 이렇게 행복한 미소를 띤 이들이 원수로 뒤바뀌어지는 것도 사랑의 여파일까?

"..."

모르겠다. 뭐가 정답인지를 모르겠다. 애초에 이성간의 사랑을 해본적도 없고 진행형도 아닌 나로선 알 수도,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 일단 은하 방에 갖다 놓자'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였지만 그렇다고 은하의 사랑을 비웃을 마음도 없었다.

집에 돌아온 은하가 사진을 보고 어떤 생각할지 궁금은 하겠지만 이 역시 묻지 않을 것이다.

"... 에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한숨이 나온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그냥 한숨이 나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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