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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 속 처녀 지키기-37화 (37/72)

〈 37화 〉 하숙(4)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딱히 할게 없었던 나는 거실에서 멍하니 티비를 보고 있었다.

끼익­

"... 어우 뭐가 이리 시끄러..."

흠짓­

"... 아 맞다. 우리 이제 같이 사는 거였지?"

"..."

심술궂은 표정으로 그제서야 방에서 나온 은하였다.

그래도 그나마 옷을 입고 나왔다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뭐 어쨌든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은하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자연스럽게 식탁으로 다가갔다.

"으음? 이거 너가 만든 거야? 나 먹어도 되지?"

"... 먹어"

덥썩­

"우물우물... 맛있는데?! 존나 달다 딱 내 스타일이야"

"..."

씹새끼 복스럽게도 처먹네. 말없이 은하가 먹는 모습을 바라봤다.

"우물우물.... 뭐야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왜 이렇게 쳐다봐?

정확히 말하자면 바라봤다는 게 아니라 죽일 듯이 노려봤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내가 저 새끼 때문에 진짜...'

"...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넌 원래 이렇게 늦게 일어나냐?"

"우물... 아니 주말인데 늦게 일어날 수도 있는 거지. 수업도 없는데 왜 일찍 일어나?"

그러게 말이다. 난 씨발 왜 주말에 일찍 일어나 가지곤 아침부터 쌩고생을 한 것일까?

"에휴. 됐고 넌 식사를 어떻게 하길래 냉장고가 죄다 냉동식품으로 채워져있냐?"

"으응? 난 웬만하면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어 가지고. 혼자 사는데 집밥을 해먹기는 여러모로 귀찮잖아?"

어느새 계란 토스트를 다 먹고 초코우유를 신나게 들이마시는 은하가 말했다.

"너 그러다 당뇨병이나 성인병 걸려서 고생한다"

"괜찮아. 이제 너 따라서 운동도 하는데 뭐가 문제 있겠어?"

아니 저 등신이 아까부터 무식한 얘기만 지껄이네?

"... 에휴 됐고 너 오늘 시간 되냐?"

"... 엉? 딱히?"

'잘됐네'

"씻어라. 이따 장이나 보러 갈 거니까"

그 말에 은하가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

".... 에휴"

대형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 뭐야 나 이번엔 아무 짓도 안 했다?!"

또 자기 혼자 찔려가지고 흠짓하는 은하를 무시하고 메마른 감정으로 대형 마트를 훑었다.

'존나 크네'

분명히 나도 알고 있는 매장이고 본가 쪽에도 있는 매장이지만 이상하게도 특히나 여기 매장은 유독 다른 매장보다 더 큰 것 같았다.

'그리고 은하 얘는 집에서 5분 거리에 대형 마트가 있는 거고'

무슨 다른 세계에 사는 것도 아니고 같은 한국에 살면서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건지. 역시 집보다는 집 주변에 있는 인프라가 중요한 건가?

'생각해 보니까 여기도 역세권 지역이잖아 씨발'

정말인지 계속 생각할 수록 말이 안 된다.

자기는 집주인 언니한테 할인을 무지막지하게 받았다고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지 이 정도 집이면 진짜 돈이 많은.... 에잇 싯팔. 여기서 생각해봤자 뭐 어쩌겠는가 그냥 닥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지.

우리는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식자재 코너가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매장 전체를 둘러볼 수 있었는데... 하여간 넓기는 존나 넓네.

"저기 가서 카트 좀 뽑아와. 난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으응? 야 나 근데 500원이 없는데?"

".... 옛다. 괜히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저쪽에서 기다려라?"

"아유 내가 무슨 어린애냐? 빨리 다녀오기나 해"

"..."

'아니 그걸 아는 새끼가 왜 나랑 있을 땐 애새끼가 되는 거냐고 씨발'

마지막 저 한마디 때문에 은하가 미덥게 느껴졌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나와 은하는 카트를 끌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뭐 살건데?"

"우선 기본적으로 야채들 좀 사고 다음으론 육류나 어류를..."

참고로 카트는 은하가 끌었다. 원래는 내가 끌려고 했는데 이런 건 여자가 해야 한다고 해야나 뭐라나.

그건 그렇고 주말이라서 그런가? 매장에는 우리와 같이 카트를 끄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카트에 아이를 태우고 다니는 평범한 가족부터 시작해가지고 꽁냥거리는 남녀들까지.

남자들은 신중하게 식재료를 살피고 있었고 카트를 모는 여자들은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나도 뭐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파를 한단 집고 있었고 은하는...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손잡이에 턱을 기댄 체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언제 끝나. 나 심심하다고..."

"뭐래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에이 씨..."

얘도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나보다.

나야 뭐 애초에 나는 가사일을 해주기로 약속했고 애초에 내가 먹을 걸 사는 거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 왠지 점점 아지매가 다 돼 가는 것 같은데'

아니지 이제는 아지매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 되냐 아재라고 해야 되나?

"오늘 삼겹살이나 구워 먹을까?"

"삼겹살? 삼겹살 좋지"

고기 얘기하니까 다시 기운이 돋은 은하였다.

"그럼 고기는 일단 삼겹살로 사고.... 뭐 따로 먹고 싶다던가 그런 거 있어?"

"너가 해준 거라면 다 맛있을 것 같은데"

"또 개지랄하네. 아무튼... 그럼 내가 좀 알아서 산다?"

"응응 마음대로 해"

거기에 덧붙여 은하의 허락도 받았겠다. 평소에 좋아하지만 비싸서 못 먹었던 샤인머스켓을 슬그머니 한봉지 카트에 담은 나였다.

'... 시발. 이건 가격을 볼 때마다 이해가 안 되네'

"음? 뭐야 이건? 청포도?"

"어? 으응... 혹시 포도 싫어하냐?"

"아니 과일을 다 좋아해"

"그럼 다행히고..."

.... 다시 갖다 놓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보다.

뭐 어쨌든 그 외에도 매장을 돌아다니면서 과자 몇 봉지와 소주와 탄산음료등을 카트에 담았고 일단은 이 정도면 얼추 된 것 같아 그대로 계산대로 향했다.

띡­

띡­

바코드가 찍혀 갈수록 늘어나는 숫자에 덩달아 내 가슴도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25만 5800원입니다"

총 합계 금액을 보고 말없이 은하를 바라봤는데 은하 왈.

"일시불이요"

띠리링­

"네 결재 되셨습니다"

아아.... 망설임 따윈 개나 줘버린 저 당당한 태도. 아마 나였으면 존나 부들거리면서 카드를 손에서 놓지 못했을 텐데.

'... 왠지 내가 김치짓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에잇 아무렴 뭐 어쩌겠나. 이렇게 된 거 열심히 가사일이나 해야겠지 뭐.

"근데 이거 어떻게 들고 갈 거야?"

"어어? 저기 빈 박스 있으니까 저기에 담아서 가져가면 되겠네"

"그래? 알았어"

저 앞에 빈 상자가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쪽으로 카트를 옮겼다.

워낙 많이 사서 그런가? 제일 큰 박스 두 개를 꾹꾹 담아서야 물품을 모두 옮길 수 있었다.

덜컥­

"끄응...!"

"괜찮아? 안 무거워?"

".... 괜찮아 시꺄. 나 헬스 하는 거 몰라?"

그나마 제일 무거운 박스를 은하가 들고 나는 비교적 덜 무거운 박스를 들었는데... 그래도 꼴에 자존심이 있지 살짝, 아주 살짝만 무거웠을 뿐 걱정해 하는 은하를 뒤로하고 내가 먼저 힘차게 앞장서 나갔다.

그런 내 뒤에서 은하의 눈빛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무시한 나였다.

띠리릭­

쿵­

"어으..."

마침내 집에 도착을 하고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박스를 내려놓았다.

'씨발... 진짜 집이 바로 앞이라서 다행이지 어깨 빠지는 줄 알았네'

운동은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근육은 왜 그대로인지 참... 아니면 이것도 내가 남자여서 그런 건지 뭐 확실하게 알 수가 없으니까 짜증이 나네.

"읏챠! 그래서 고기는 언제 먹을 거야?"

"아직 4신데 배고프냐?"

"아니 뭐 그렇게 고픈 건 아니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초코우유를 꺼내는 은하였다.

하기야 오늘 먹은 거라곤 계란 토스트 밖에 없었으니 배가 고플만도 하겠지.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그래. 걍 지금 먹자 그럼. 불판은 있지?"

"어? 응! 기다려 봐 지금 가져올게!"

"야야 가져오는김에 한번 씻겨서 가져와"

"알았어~"

그렇게 은하는 불판을 가지러 어딘가로 사라졌고 나도 삼겹살과 곁들어 먹을 쌈과 채소들을 씻기로 했다.

"네 말대로 깨끗하게 씻겼어"

"그거 식탁 위에 올려 두고 혹시 종이컵 있냐? 기름 뺄 통 하나 있어야 되는데"

"... 음 종이컵은 없는데... 아 잠깐만 기다려 봐"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은하는 냉장고로 가서 무언가를 꺼냈는데... 은하의 손에 들린 건 또 초코우유였다.

"종이컵이 없으면 종이컵을 만들면 되지"

단숨에 초코우유를 마셔버리고 빈 우유 박스를 까서 한번 행군 뒤 내게 건넸다.

"... 그래 뭐 이거면 되겠지. 집에 가스하고 버너는 있냐?"

"잠깐만 기다려 봐. 전에 언니들이랑 고기 구울 때 쓰던 게 있었는데..."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한번 어딘가로 사라진 은하는 잠시 후 버너와 가스를 가져 왔다.

"이거 가스 괜찮은 거지?"

"엉. 전에 쓰던 게 있긴 했는데 걍 새것 뜯어왔어"

"그래 그럼. 아 참 굽기 전에 방문들 좀 닫고 냄새 빠지게 베란다만 살짝 열자"

"어유 뭐 이리 시키는 게 많아"

"..."

"...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네 하하"

내가 노려보자 구렁이마냥 웃음을 터뜨리는 은하였다.

정말로 이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우리 둘은 자리에 앉았다.

"너가 굽겠다고?"

"에이... 고기는 여자가 구워야지. 이래 봬도 나 고기 굽기 1급 자격증 있는 거 몰라?"

'그런 게 왜 있어 임마'

어쨌든 한 손엔 집게를 한 손에 가위를 잡은 체 신중한 표정으로 은하는 달구어진 불판 위에 미리 잘라놓은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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