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하숙(3)
* * *
눈살이 찌푸려진다. 밝다 못해 짜증까지 나는 햇빛이 내 눈가를 어지럽혔다.
"... 어으 씨발"
결국 참다 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방에 창문이 햇빛을 정면으로 받는 위치라 그런지 빛의 밝기가 말도 안 되게 밝았다.
어쨌거나 정신을 차리니 우선적으로 낯선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옷장과 넓디 넓은 방안.
"... 맞다. 나 이사했었지"
전에 있었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었다.
"... 아오 귀찮아 죽겠네"
일단 화장실부터 가야겠다.
***
텅
"어우 뭔 화장실이 고시원 방보다 크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다.
기왕 들어간 김에 샤워까지 모두 해 버린 나였다.
"그럼 이제 아침을 만들어야 하는데...."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일단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이게 웬걸 식재료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냉장고 안에는 냉동식품만 가득 담겨져 있었다.
"... 냉동 만두에 피자, 치킨 너겟..."
좀 더 자세히 찾아보니 그나마 계란이 몇 개 있었다.
나도 물론 냉동식품을 좋아하긴 하다만은 일어나자마자 먹는 건 조금... 차라리 라면이면 모를까.
근데 또 이상하게도 라면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밥도 없나?'
덜컹
"..."
식탁 한쪽에 있는 밥통을 열었는데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그나마 근처에 뜯지 않은 쌀이 있다는 게 안심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어제 저녁도 배달 음식을 먹어가지고 밥 생각을 못 했는데 이건 생각지도 못한 낭패였다.
이쯤 되면 그냥 포기를 하고 냉동식품을 먹는 게 나은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모르니 계속 부엌을 뒤적거렸다.
부스럭
"...!"
'식빵?'
찬장에 뜯지 않은 새 식빵봉지가 있었다.
바로 꺼내 들어 유통기한을 확인했는데... 좋다. 아직 일주일이나 남아 있다.
식빵과 계란. 냉동식품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그 외에 버터나 설탕등은 많이 있었고 이 정도면 아침 식사는 해결이 될 것 같다.
식빵을 손에 든 체 다시 냉장고로 돌아가 계란을 꺼냈다.
계란을 풀어 계란물을 만든 뒤 설탕을 넣어 잘 섞어 주었다.
그리고 미리 달구어진 팬에 버터를 풀고 식빵을 먹기 좋게 4등분으로 잘라 계란물에 한번 담갔다 팬에 올렸다.
'은하도 먹어야 되니까 좀 더 만들어야겠지?'
무료로 숙박하는 대신 그래도 가사일 정도는 해주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이 너무 지나쳤을까? 어쩌다 보니 접시 위에 계란 토스트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다.
"... 에이 뭐 먹다 보면 줄어들겠지"
맛은 일단 내 입맛에는 맛있었다. 일부러 달달한 것을 좋아하는 은하를 위해 설탕을 과다하게 첨가했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냉장고에 수북이 쌓여 있는 초코우유까지 더해지면... 이 정도면 나름대로 괜찮다고 해주지 않을까?
'.... 별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다하네. 빨리 깨우기나 하자'
조금 한심스러웠지만 뭐 어쨌든 식사 준비를 모두 마치고 아직 자는 은하를 깨우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음"
똑똑
"..."
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은 오지 않았다.
혹시나 듣지 못한 것 같아 몇 번을 더 두드렸지만 소용이 없었고 잠깐이지만 고민에 빠졌다.
'... 어떡하지. 걍 들어가서 깨울까?'
"... 에이 무슨 일이야. 생기겠어"
철컥
결국 외마디 생각과 함께 나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
방 안은 조용했고 이쪽은 햇빛이 비추지 않나 본지 내 방처럼 분위기가 밝지 않았다.
크기는 내 방과 비슷했고 가구들도 별다를 게 없었으니 정말 위치만 다를 분 8할 정도는 똑같은 방이라 볼 수 있었다.
".... 아주 그냥 주말이라고 기절을 했구나"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침대 위에서 무언가가 부풀어 오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느낌상 은하는 저기에 있을 것 같다.
툭
"...?"
방안을 걷다 무언가 발에 걸렸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봤는데.
"... 니미럴"
자연스럽게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발에 걸린 것은 다름이 아닌 은하의 속옷이었다.
그것도 무슨 속옷이... 이거 진짜 속옷 맞아? 그냥 끈 아니야 씨발? 어우 얘는 뭐 이런 걸 처입고 다녀.
그 외에도 나돌아다니는 몇 가지의 속옷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대충 무시하고 빠르게 침대로 갔다.
"... 야야. 일어나. 아침 차려놨어"
"..."
조심스럽게 은하를 흔들며 잠을 깨우려고 했지만 은하는 묵묵부답이었다.
때문에 점점 강도를 높여 나중에는 그냥 막 흔드는 셈이 되었지만 무슨 잠자는 공주새끼도 아니고 이불을 꽉 잡고 계속 반응이 없는 은하였다.
"아오 진짜 개지랄하네 아침부터"
바위마냥 꿈쩍도 하지 않는 은하의 모습에 쓸데없는 오기가 생겼다.
그냥 여기서 포기를 하고 은하의 몫을 덜어 주자는 생각도 잠시 스쳤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이불의 끝자락을 잡고 한번 심호흡을 한 뒤 있는 힘껏 이불을 내 쪽으로 당겼다.
"일어나라고 이 미친 새끼야!!"
푸왁
결국 그렇게 은하의 이불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고 괘씸하다는 눈빛으로 은하를 바라봤는데....
"... 어으어어?"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이면서 지금까지 느껴 볼 수 없었던 엄청난 패닉이 나를 덮쳐왔다.
"이, 이이, 이 새끼..."
'왜 알몸인데 씨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은하의 모습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전라의 상태였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벌어져 온 몸이 굳어버렸는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으음..."
움찔
뭔가 불편함을 느꼈는지 은하가 살짝 뒤척거렸다. 물론 그 작은 움직임은 나를 경악해 하기엔 충분한 움직임이었다.
'씨, 씨발'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일단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성의 몸을, 그것도 완전한 나신의 몸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뭘 어떡해 해야 하지? 역시 다시 이불을 덮어 주고 방을 나가는 게 제일 올바른 선택지가 아닐....
덥썩
"...?"
갑자기 뭔가가 잡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쑤욱
그리고 곧바로 알 수 없는 힘으로 아직도 이불을 꽉 잡고 있던 내 손이 침대로 향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몸 또한 침대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어, 어얶...!"
털썩
결국 어버버하는 사이 나는 침대 위로 떨어졌다.
은하가 이불을 다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으음..."
"이, 이이..."
코앞에서 은하의 얼굴이 보였다. 정말 곤히 잠에 빠진 모습. 고의라곤 하나도 안 느껴지는 얼굴이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겨우 수습했던 머리가 또 새하얗게 물들어갔고 몸을 부들거리며 자리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휘익
"추워..."
"이런씨..!"
힘겹가 일어섰는데 갑자기 은하가 이불을 잡아당겨서 나는 다시 한번 침대 위로 쓰러졌다.
아까는 코앞에서 은하의 얼굴이 보였다면 이번에는 아예 안기는 체로 넘어져 버렸다.
"추워..."
'아무것도 안처입으니까 춥지 이 미친년아!'
세상에 설마 잠을 잘 때 전라의 상태로 잠을 잘 줄 알았다면 당연히 안 들어왔지 이게 무슨 꼴이야 씨발.
'.... 좋은 냄새'
"?!?! 뭐, 뭐라는 거야 이 상황에서 씨발!"
순간 내가 생각하고도 소름이 끼쳤다. 이러한 난잡한 상황 속에서 점점 미쳐가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 으으"
"...!!!"
"... 무거워..."
'이런 니미럴!!"
바로 귓등에서 들려오는 은하의 목소리에 정신을 번쩍 차리고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서 빨리 나가야 되는....'
"... 유진성?"
"...!"
"... 뭐야 너가 왜 여기 있어?"
"..."
은하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모양인지 풀린 듯한 동공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 또한 어쩔 줄을 몰라하며 은하를 바라봤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위압감과 함께 침묵이 형성되었다.
"..."
"..."
"..."
"..."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 이제 어떡하지? 아니 씨발 그냥 사실 대로 말하면 되는 거 아니...'
"... 또 이상한 꿈꾸네"
"...?"
털썩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은하는 침대에서 쓰러져 버렸고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
"..."
졸지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이 되자 나 또한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은하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주의를 하며 방에서 나갔다.
철컥
'씨발 씨발 씨발 씨발....'
방으로 나가면서 마음속으로 계속 욕을 지껄였다.
저번에도 고시원에서 이런 꼴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설마 이렇게 좀 더 과격한 방법으로 데자뷰를 느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왜 씨발 옷을 안 입는 건데'
무엇보다도 처음 보게 된 은하의 알몸이 너무나도 임펙트가 강렬했다.
"... 첫날부터 이런 낭패를 겪을 줄은..."
갈색으로 태닝한 피부와 매끄러운 몸매, 하필이면 전라의 상태를 보게 된 나까지.
애초에 내가 보수적인 면도 있지만 특히나 성적인 부분에선 씹선비에 마인드를 가진 나로선 오늘 아침은 최악 중에서 가장 최악인 셈이다.
'... 그런데 왜 몸에 털이 하나 없는...'
"!!!"
이런 씨발 웬만하면 정신력으로 버텼을 텐데 오늘은 너무 강렬했는지 헛소리가 나왔다.
다급하게 휴대폰을 키고 성경 앱을 들어갔다.그리고 약 30분 가량을 머릿속을 비우며 경건한 마음으로 주기도문을 중얼거렸다.
"... 씨발"
다시는 아침에 은하의 방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