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하숙(2)
* * *
"..."
"... 아하하하... 장난이야 장난.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었어"
"..."
"..."
조용한 내 시선에 부담을 느꼈는지 은하가 허겁지겁 자신의 말을 포장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미 내뱉은 말이 되돌아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뜬금없는 저 한마디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바껴졌다.
은하도 당황스러워 했고 나 또한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 죄송합니다"
결국 머리를 숙인 은하였다.
나도 이쯤에서 슬며시 넘기려고 했는데... 이게... 그러니까... 음...
'... 왜 고민이 되는 거지?'
막상 한번 생각하게 되니 정말 이상하게도 은하의 말이 점점 끌리기 시작했다.
하숙도 공짜, 밥도 공짜. 나중에 복학을 하더라도 따로 집을 구할 필요도 없고 지금 나오고 있는 알바도 유지가 되니까...
'완전 극상성이었던 부모님의 모습이 바뀐 것도 조금 그렇고, 동거인이 이성이긴 하지만 은하는 뭐...'
"... 괜찮은데?"
"... 어?"
"너랑 동거하는 거 말이야. 차분하게 생각해 보니까 딱히 해가 되는 부분이 없어"
"... 어? 어어??"
내 말에 은하는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아까는 당황스러워했다면 지금은 뭐랄까 그냥 생각의 회로가 멈춰진 것 같은 그런 느낌?
"..."
"..."
"... 뭐 안 돼? 혹시 진짜 장난으로 얘기했으면 어쩔 수 없..."
벌떡
"아니이이!!!"
아쉬운 마음으로 말을 하던 차 갑자기 은하가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다, 당연히 진심이였지!!!"
"잘됐네. 그럼 언제까지 네 집에 머물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신세 좀 질게. "
"어어... 어! 그래...!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고 지네!!"
아무런 반응이 없어 역시나 안되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은하는 끝내 허락해줬다.
걸걸한 목소리로 과장되게 웃음을 터뜨리다 목이 매었는지 은하는 급하게 컵에 물을 따라 단숨에 마셔버렸다.
"커훅...! 그러면 언제 올 거야?"
"음... 아마 이번 주 토요일?"
"응? 그렇게나 빨리?"
"어차피 10월달까지만 계약이 돼있고. 그냥 조금 빨리 빼지 뭐"
애초에 짐이라 것도 별로 없으니 짐정리도 토요일 안으로 해결이 될 것 같다.
"... 혹시 토요일은 안되냐?"
"아니..!! 그냥 방 좀 정리해야 되겠다 싶어서"
"그래 그럼. 그날 네가 고시원으로 오던가"
"어 응. 토요일날 내가 데리러 갈게"
그렇게 굉장히 빠른 속도로 결정이 났다.
'앞으로 2개월 정도 남았으니까... 그전에 일단 시험부터 해결을 하고 천천히 생각해야겠지'
그런데 내가 군대에 갔을 때엔 뭘로 휴학이 되어 있지? 그냥 쌩 휴학이라면 조금 골치가 아파지는데. 역시 한번 알아보는 게...
"... 야 근데 너 진짜 괜찮냐?"
"응? 뭐가"
"그... 우리가 이렇게 턱없이 편히 지내긴 하지만... 그래도 남자가 여자의 집에서 같이 동거하는 건..."
"..."
"..."
말을 얼버무리는 은하를 나는 조용히 응시했다. 역겹고 한심하다는 눈빛은 덤이었다.
"아, 아유 설마 친구 사이에 별일이야 생기겠어?!?! 하하"
"그렇겠지? 우린 친구잖아"
"응응 맞아. 우린 친구지"
억지웃음과 더불어 이제는 식음땀까지 송골송골 맺힌 은하였지만 깔끔하게 무시해 버린 나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은하의 행색이 창백해 보였다.
***
마침내 이삿날인 토요일이 왔다.
날씨도 좋고 약간 춥긴 하지만 이 정도면 시원한 셈이니 날은 잘 잡은 것 같다.
위이잉
[나와. 고시원 앞이야]
"어 지금 나갈게"
전화를 받고 고시원 입구로 내려갔다. 입구에선 은하가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순간 찬 바람이 은하를 향해 불어왔다.
"에, 에취이이이!!!!"
... 에휴 진짜 왜 이렇게 바보 같은지.
'그리고 저 새끼는 왜 자꾸 여름옷을 입는 거야?'
하여간 웃긴 년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폼을 잡는건지. 뭐 어찌보면 그런게 은하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은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이지만 그래도 온기가 있어서 그런지 그제야 굳었던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
"뭐야? 정말 이거 밖에 없어?"
"어. 나머지는 전부 고시원 물품이라서"
"그래 그럼. 이 정도 양이면 걸어가도 되겠네"
"뭐래. 아까 보니까 얼어 뒤질 것 같던데. 지랄말고 택시 부를 테니까 핫초코나 마시고 있어"
"... 끄응. 내가 핫초코라서 참는다. 절대로 춥거나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서 은하는 슬며시 의자에 앉았다.
머그잔의 온도가 따뜻했는지 열심히 컵을 만지작거리는 은하였다.
그 모습이 참으로 하찮게 느껴진 것은 안 비밀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위이잉
"네. 아 지금 나갈게요. 야 택시 왔다니까 나가자"
"으응. 알았어"
그 짧은 시간 동안 핫초코를 4잔이나 처마셔서 그런지 은하에게서 달달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짐을 담은 박스가 총 두 개라서 나와 은하는 박스를 하나씩 든 체 고시원을 나왔다.
"택시가 어딨지?"
"저거 아니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은하가 저 앞에 주차된 택시를 가리키며 은하가 말했다.
쾅
박스를 트렁크에 집어넣은 뒤 우리는 택시에 탑승했다.
잠시 후.
"네 수고하세요"
부르릉
목적지인 은하의 집에 도착했다.
하나씩 서로 짐 박스를 든 체 은하의 안내를 따라 큼직한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비밀번호는 나중에 내가 문자로 보내줄게. 되게 간단하게 했으니까 몇 번 보면 금방 외울 수 있을 거야"
달칵
"어서 와. 우리 집에"
부푼 기대감을 안고 그렇게 처음으로 은하의 집에 들어왔다.
"와아..."
일단 집이 넓었다. 주위에 조형물이 뭐가 있던 탁 트인 거실이 눈에 확 띠었다.
'이런 집에서 얘는 혼자 산다고?'
대충 보니 방은 4개 정도 있는 것 같고. 누군가 혼자 살기엔 너무 아까울 정도로 크다고 느껴졌다.
'무슨 여자 혼자 사는 집이 우리 본가보다 더 크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진짜 여기 혼자 산다고?"
"어? 응. 여기 혼자 사는데"
"안 넓냐? 아니 그건 둘째치고 너 꽤 재력가인가 보다?"
집을 보면 그 사람에 재력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뭐? 그건 뭔 개소리야"
"왜. 이 정도 집에 사는 형편이면 부자지 부자. 내 말 틀렸냐?"
그런 내 말에 은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박스를 내려놓았다.
"내가 부자면 알바같은걸 왜 하냐? 이거 내 집 아니야. 돈 많은 아는 언니가 이민을 가서 존나 싼 가격으로 월세들여서 사는 집인데"
"... 어?"
"어쨌든 네 방은 저 방이고 저기는 내 방이니까 알고 있어. 아 혹시나 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방을 사용해도 돼. 뭐 근데 그나마 그 방이 제일 나을 거다"
그렇게 말하고 역시 이삿날엔 짱개라며 전화를 거는 은하였다.
'아니 뭘 얼마나 할인해 줬길레 이런 집에 사는 거지?'
"... 혹시 월세 가격 얼마인지 물어보면 실례냐?"
"뭐... 딱히?"
"그럼 얼마에...?"
"... 그러니까 얼마냐면"
"..."
"비밀이징~"
"...?"
뭐야? 내가 잘못 들었나?
이 새끼 설마 그냥 어그로 끌려고 저 지랄한 거야?
"... 에휴 씨발"
잠시 멍하니 은하를 바라보다 끝내 한숨을 내뱉었다.
"물어본 내가 병신이지"
"... 큼! 미안해. 하지만 언니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해가지고"
집주인이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얻어사는 처지에선 다 받아드려야지.
달칵
마음과 같아선 저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지만 꾸욱 참고 방문을 열었다.
"오...."
"어때? 그래도 고시원보다는 낫지?"
"넓네 여기도"
방도 깨끗하고 넓었다. 특히나 이 방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방 뒤편에 작게나마 베란다가 있어 바깥 풍경을 확연하게 볼 수 있었다.
"... 나 진짜 꽁으로 얻어 살아도 되는 거냐? 이 정도면 과장해서 호텔 뺨치는 수준인데"
"괜찮다니까. 나야 뭐 이렇게 큰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단 누구 하나 있는 게 낫지"
"... 그래도 조금 뭐시기 하니까 내가 가사일이라도 해 줄게"
"응? 그래 그럼. 그렇게 하던지"
어느 정도 적당한 집이면 그냥 살겠는데 이건 뭐 양심에 찔리는 수준이라서...
띵동
"네. 나가요"
그렇게 새로운 집에다 짐을 풀고 있을 때 짱개가 도착했다.
은하는 짜장을, 나는 짬뽕을 시켰고 탕수육과 군만두는 양 가득 시켰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식탁 위에서 늦은 점심식가 시작됐다.
"기다려 봐. 짜장 좀 덜어 줄게"
"어? 난 괜찮은데"
"괜찮기는 무슨. 니 눈깔이 내 짜장면만 보고 있는데"
"..."
왜 그런 게 있지 않나. 짬뽕을 먹으면 짜장면이 맛있어 보이고 불고기버거를 먹으면 새우버거가 맛있어 보이는.
내가 머쓱함을 느끼는 사이 은하가 짜장이 담긴 그릇을 내게 건넸다.
"... 고맙다. 내 것도 좀 덜어 줄까?"
"후르륵. 나는 새우 알러지가 있어가지고 짬뽕을 못 먹어. 먹는 순간 바로 올라올걸?"
"... 새우 알러지?"
은하가 알러지가 있었구나. 이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럼 또 혹시 못 먹는 거 있냐? 나중에 요리 할 때 신경 좀 써야 될 것 같네"
"아니. 새우 말고는 다 괜찮아"
"그래 알았어. 새우만 조심하면 되겠네 그럼"
그래도 다행이다. 이렇게 미리 알러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혹시나 이런 사실을 모르고 내가 새우로 음식을 만들었다면... 뭔 상관이야. 나는 그거 먹고 쟤는 안 먹으면 되는거지.
뭐 어쨌든 결국 짬뽕은 나 혼자 다 먹어치웠고 은하는 남은 짜장소스에 밥까지 싹싹 비벼 먹으며 우리는 늦은 점심식사를 마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