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하숙
* * *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빠르게 흘러 갔다.
그렇게 어느덧 코 앞으로 다가온 시험 기간. 그에 맞춰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학교 도서관이었다.
"... 끄응"
"... 에휴"
"쓰읍..."
"..."
침묵과 무거운 분위기 속에 도서관. 옆에서 무언가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나 정도만 들을 수 있을 정도에 작은 소리였지만 집중을 깨기에는 충분히 거슬리는 소리였다.
"... 좀 닥쳐 제발. 뭐 하는 짓거리야 이게"
"아니... 에휴"
"그럴 거면 그냥 오지 말던지. 애초에 도서관도 한 번도 안 가 봤다면서 왜 갑자기 오는 건데"
"..."
결국 참다 못한 내가 한마디를 하자 옆에서 은하가 울상을 지었다.
내 옆자리에선 은하가 시험과 관련된 서적 한권을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저 밉상. 뭘 잘했다고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이러면 왠지 모르게 내가 나쁜 새끼가 되는 것 같잖아 씨발'
스윽
"... 에휴"
"뭐야? 벌써 돌아가게?"
"돌아가기는 무슨. 조금 쉬자고"
시간이... 대충 40분 정도 흘렀나? 은하도 그렇고 나도 너무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아 그냥 조금 빠르게 휴식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그나저나 저 새끼 분명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되게 환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은데... 착각이었나?
뭐 어쨌든 우리는 도서관 1층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시험 기간이라 그런지 평소에는 훤했던 카페에는 사람들이 적당히 붐비고 있었다.
"뭐 마실꺼야?"
"난 아메리카노"
"으엑... 또 아메리카노? 도대체 그 쓴 커피는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거야"
"잔말 말고 시키기나 해. 자기는 초콜릿 라떼만 처마시면서"
"그래도 그건 달잖아. 달달한건 언제나 옳다니까?"
참으로 자랑스럽게 말을 한다. 어떻게 입맛은 얘기 입맛이면서 곱창은 왜 좋아하는건지. 하여간 저런 말을 할 때 마다 그냥 하찮게 느껴진다.
데스크에서 각자 음료를 주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시킨 음료가 나오자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 달다..."
"... 그렇게 먹으면 배 안아프냐?"
"지금에 행복을 위해서 미래를 바치는 거지"
"... 어휴 저 등신이"
신나게 음료를 들이키는 은하를 나는한심스럽게 바라봤다.
기본적으로 은하 얘는 카페에서 음료를 마실 때 항상 두개를 시키곤 한다.
왜 두개를 시키냐고 물으니 은하 왈. 첫 번째는 원샷용이고 두 번째부턴 맛을 음미하며 즐긴다고 하는데 솔직히 이게 당체 뭔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는 나였다.
'내가 맨날 아메리카노만 마셔서 그런가?'
어쨌든 그렇게 순식간에 한잔을 비워내고 그제야 은하는 나머지 한잔에 담긴 음료를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빡공부한거 같네"
"... 빡공부는 무슨. 보니까 니 40분 중에서 20분을 멍때리고 있던데?"
"멍때리다니. 잠깐 생각에 빠진 것 뿐이야"
"..."
"..."
"... 그래.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그런거겠지"
내 말에 발끈하는 은하를 깔끔하게 무시하면서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정말로 옆에서 공부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저게 공부하는건지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성적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나오는 새끼였으니 뭐.
'이게 그 뭐야 게으른 천재라는 건가?'
"... 으으 배 아파..."
"..."
"야... 나 뒤질 것 같아... 어떡하냐...'
"어떡하긴 뭘 어떡해. 걍 그대로 머리 박고 뒤져"
천재는 무슨. 이 새끼가 천재면 나는 신이다 씨발.
잠시나마 은하를 고평가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역시는 역시였고 은하는 은하였다.
***
카페에서 노가리를 까고 우리는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 공부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알바 시간이 다가오자 짐을 정리하고 도서관을 나왔다.
"으어...! 밖으로 나오니까 이제야 좀 살겠네"
"..."
건물을 나오자마자 기지개를 쭈욱 피는 은하를 얼척없게 바라봤다.
'어떻게 하면 3시간 중에서 2시간 30분을 멍때리냐'
무슨 ADHD도 아니고 주변에 공부 못하는 얘들을 몇 번 본적은 있었지만 은하마냥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새끼는 처음이었다.
"... 슬슬 날씨도 추워지는데 넌 안춥냐?"
"어? 참나... 나 여자야 임마. 하나도 안 추워"
"..."
"... 훌쩍"
'등신'
코를 훌쩍 거리는 은하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이걸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주위를 둘러봐도 모두가 긴팔 긴바지를 입고 있는 날씨에 지 혼자 짧은 옷차림새를 한다는 건... 뭐 그래도 당사자가 은하여서 그런지 이해는 간다.
딸랑
"저희 왔어요 사장님"
"어 그래. 밖이 쌀쌀하지? 어서 들어와"
호프집에 들어간 우리를 남사장님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다.
"에취...!!"
"... 은하야 너 안춥니?"
"네? 아유 춥기는 무슨 시원하기만 한데요 뭐. 하하"
벽에 걸려 있는 앞치마를 입으며 은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2주전부터 호프집 알바로 나오게 된 은하이다.
내가 알기론 편의점 알바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물어보니까 잘려서 이리저리 알바를 찾다 이곳에 취직하게 됐다고 말했다.
괜히 사장님이 여자 알바를 구하기 어렵다고 말한 게 장난이 아니었는지 한번 조리실에 들어가면 알바가 끝날 때까지 은하를 볼 수 없었다.
은하 말로는 재료를 손질하고 설거지만 주구장창 한다는데 이게 계속 끊이지 않고 밀려오니 쉴 틈이 없다고 한다.
'확실히 은하가 들어온 이후로 손님들도 몇 배는 많아진 것 같고'
고작 사람이 하나 늘었을 뿐인데 음식이 빨리 나가기 시작하니 손님들도 물 밀려오듯이 계속 들이닥쳤다.
오죽했으면 사장님께서 은하가 이 호프집을 먹여 살린다고 얘기 했으니 뭐.
"진성아 이건 5번 테이블, 이거는 7번 테이블로"
"네 사장님"
"여기 계산 좀 해주세요"
"네네 잠시만요"
음식이 빨리 나오고 손님들이 많아지니 서빙을 하는 나 역시 이전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결국은 알바를 하는 내 처지에선 은하가 들어온 게 결과적으론 손해인 것인데 솔직히 일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별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은하랑 같이 알바를 한다는 게 좀 더 안정감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기왕 일을 할거면 아는 사람이랑 함께하는게 더 낫지 않겠는가.
하여튼 그렇게 쉴 틈 없이 가계를 돌아다니는 사이 손님들도 하나둘씩 빠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마감시간이 훌쩍 다가왔다.
"잘 먹겠습니다. 사장님"
"남으면 싸가도 되니까 천천히 먹어. 도중에 부족하면 말하고"
뒷정리를 마치고 사장님께서 남은 재료로 야식을 만들어 나와 은하에게 내주셨다.
은하가 들어오고 생각보다 매출이 많이 늘었는지 요즘 들어 빈번히 야식을 만들어 주시는 사장님이었다.
먹는 사람에 입장에서야 공짜 음식이니 마다 할 이유가 없었고 덕분에 퇴근 시간이 약간 늦어지긴 했지만 일찍 돌아가서 할 것도 없었으니 뭐.
"... 천천히 먹어. 채하겠다"
"으응? 남 웜래 빪리 멍능 성경이걸랑?"
"..."
"..."
"... 그래 많이 먹어"
이전과 같았으면 여기서 발끈했을 포인트였는데 지금은 음식을 먹느라 바쁜지 조용한 은하였다.
하여간 참 복스럽게도 처먹는다. 그 만큼 일이 힘들었다는 거겠지. 애초에 5시부터 지금까지 일을 했는데 당연히 배도 고플테고.
'더더욱 주방일은 서빙보다 훨씬 빡세니까 말이야'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현재 시각은 12시 10분. 어찌 보면 야식이 아니라 저녁을 먹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식사하면서 여러 가지를 얘기했다.
헬스부터 시작해 학교 얘기, 여러 이슈 얘기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휴학 계획을 슬며시 은하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냐? 뭐 그래 알겠어"
"... 생각보다 별말은 안 나온다?"
"여기서 뭔 말을 하냐. 이미 다 결정한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설령 내가 손을 써 준다 해도 니 성격상 거절할 것 같고"
휴지를 뽑아 입 주변을 닦으며 은하가 말했다.
생각 외로 차분히 대답하는 은하에 나는 얼떨결해하며 시선을 돌렸다.
'... 왠지 섭섭한데...'
"... 지랄하네"
뜬금없이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자 반사적으로 입에서 욕이 나왔다.
"... 아니 왜 또 욕질이야. 이번엔 딱히 잘못한 게 없어 보이는데"
"..."
"... 아니야? 내가 또 뭔가 저질렀나...?"
"..."
얘는 왜 또 제발 저린 도둑마냥 지가 뜨금해 하는 건지. 아니면 그동안 내가 너무 은하를 갈궈서 그런가?
뭐 어쨌든 그렇게 깊이 생각할 문제는 아니니 대충 넘겨 버리기로 하고 은하에게 이번 학기가 끝나면 본가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학교도 안 나가는데 고시원에 있을 이유가 없지. 돈만 아깝고"
"쓰읍... 그러냐?"
"관리비도 관리비지만 식비가 너무 답이 없어가지고... 적어도 집에 가면 세끼는 꾸준히 나오니까 말이야"
"..."
"... 왜 또 뚱한 표정인데"
"아니 그냥..."
내가 휴학을 하겠다고 할 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던 은하가 이번에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도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지 궁금증이 생긴 나는 계속해서 은하를 추궁을 했고 은하는 침묵을 유지했다.
물론 그 침묵도 잠시였을 뿐. 뭔가를 한참 고민하던 은하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 그냥 그러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레?"
"...?"
"뭐... 내가 사는 곳이 나 혼자 쓰기엔 넓기도 하고 방도 많은데..."
"..."
"..."
느닷없이 개소리를 지껄이는 은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