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여행(9)
* * *
달칵
"저희 왔어요"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팬션으로 돌아왔다.
"뭐야?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둘이?"
"... 걍 밖에서 불꽃놀이를 하길래 그것 좀 보다 온 거야"
"... 애걔, 정말로 불꽃놀이만 보고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들어오자마자 지랄을 해대는 진아를 무시하고 나는 탁자 위에 아이스크림을 올려놓았다.
"이런..."
'좀 녹았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나보다. 아이스크림을 만져 봤더니 살짝 말랑말랑했다.
"불꽃놀이 좋지... 나랑 남편도 불꽃놀이에서 꽤 강렬한 추억을 남겼으니까..."
"어, 엄마!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누가 뭐래니? 우리는 그랬다는 거지... 그런데 진짜 뭐 없었어?"
"엄마!!"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던 수아가 소리쳤지만 수아에게 돌아온 것은 능글맞은 눈빛이었다.
"... 저 먼저 올라가 쉴게요"
"어? 그래 좀 쉬렴"
그러거나 말거나 심란한 마음을 뒤로하고 나는 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갔다.
털썩
빠르게 몸을 씻고 곧바로 침대 위에 몸을 내던졌다.
"..."
머릿속이 복잡했다.
양키 년들이랑 어울린 목적이 그 복잡함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는데 오히려 힘만 더 빠진 느낌이다.
"... 자자. 자면 알아서 해결되겠지"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도피였다.
억지로 잠이라도 청하면 자는 동안 알아서 정리가 되리라 생각했다.
"..."
시간이 흘렀다.
10분, 20분, 30분... 어느새 1시간을 훌쩍 넘겨 버리게 됐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잠을 청한 나는.
"... 하아 씨발"
당연히 잠에 들지 못 했다.
몸은 피곤했고 두 눈을 뜨기가 힘든 상태였지만 정신 만큼은 멀쩡했기 때문에 잠이 들지 못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에서 잠을 자겠다는 심보는 솔직히 말이 안 되기는 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필사의 방법으로 양을 세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547마리쯤을 셌을까.
달칵
"...!"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왔다.
'... 누구지? 진아? 아니면 수아가?'
"..."
"..."
누가 방으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나는 계속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물론 자는 척을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으니 뭐...
'그리고 왠지 모르게 자는 척을 해야 될 것 같단 말이지'
스윽
"...!"
그렇게 눈을 감은 체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눈치를 보던 중 갑자기 그 침입자가 내 이마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진성아 자니...?"
"..."
"... 많이 피곤했나보네. 만져도 반응이 없고"
수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런데 왜 온 거지?'
자기방도 아니면서 왜 이곳에 수아가 올라온 건지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진아였으면 모를까.
"..."
"..."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나야 뭐 자는 척을 하고 있었으니 애초에 말하지 못했고 수아는... 내가 눈을 감고 있어서 제대로 판단은 되지 않는데... 왜 나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지? 이거 뭔가 이상한데?
도대체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네. 걍 일어날까?
"... 사실 너한테 고백할게 있어"
"..."
"지금은 자고 있으니까 내 말 못듣겠지? 헤헤"
그러면서 수줍게 웃음을 터뜨리는 수아였다.
수아의 목소리는 편해 보였고 긴장감 따위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있지 기억나? 우리 중학교 2학년 때 말이야"
"..."
중학교 2학년 때라면... 아니 생각해 보니까 애초에 내가 가진 기억이랑 수아가 가진 기억이 아예 다르잖아.
"그때 3학년 선배가 너 좋다고 따라다녔을 때 혹시 기억나? 반에선 그 3학년 선배랑 너가 사귄다는 소문도 났었는데. 헤헤"
"..."
역시나 내 기억 속에는 없는 이야기이다.
"..."
"..."
수아는 여기서 말을 멈췄다. 다시 한번 침묵이 이어졌고 비록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나는 수아가 뭔가를 망설여한다는 걸 어렴풋 느낄 수 있었다.
뚝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까부터 내 이마를 어루만지던 수아의 손이 떨어지면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그리고 얼마 있다 그 선배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엄청 크게 다쳤잖아. 그때 막 구급차도 오고 계단에는 핏자국이 묻고 정말 난리도 아니었는데... "
"..."
"선생님들은 우리를 억지로 반으로 들여보냈고 너는... 아무런 감정을 내 보이지 않아했어. 후에 알려진 바로는 누군가 선배를 뒤에서 밀었다는데 끝내 가해자도 찾을 수 없었고"
스윽
'... 뭐, 뭐야?'
순간 갑자기 얼굴 쪽에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귓가에서 인기척이 강하게 느껴졌다.
느낌상 수아가 자신의 얼굴을 내 쪽으로 들이댄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야..."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내색 하지 않고 여전히 눈을 감은 체 마음을 진정시켰다.
수아의 숨결이 내 귀를 간지럽혀 작게 헛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수아는 별 상관을 쓰지 않아 했고 이어서 내 귀에다 속삭였다.
"그거 사실 내가 밀었다?"
"..."
"머리부터 떨어지면 당연히 죽을 줄 알았는데... 애석하게도 식물인간에서 멈춰가지고... 한 번 더 기회가 있다면 제대로 밀어 버렸을 텐데 헤헤"
...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그러니까 수아 얘가 중학교 때 어떤 선배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는 거야?
'이, 이건 또 뭔...'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처럼 하얘졌다.
상상을 할 수 없는, 아니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수아가 내게 털어놓은 것이다.
그래 놓고선 그 선배가 죽지를 않아 아쉽다니 이건 그냥...
'사이코패스잖아 씨발'
움찔
"...!"
"... 그래도 결과적으론 이렇게 혼자가 되었으니 잘된 일이 아닐까?"
따뜻한 손길이 이마에 느껴지자 나는 살짝 꿈틀거렸지만 이번에도 수아는 별 상관을 쓰지 않는 듯 천천히 내 이마를 쓰다듬었다.
"정말 많은 성공을 얻어왔지만 늘 어딘가가 비틀어져 있었어. 그것도 나쁜 방향으로 말이야"
"..."
"너 만큼은 그렇게 성공하고 싶지 않아"
"..."
"그러니 내가 이상한 생각을 갖지 않게 행동해 줘"
어느새 이마에 있던 손을 옮겨 수아는 내 귓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애정이 담긴 수아의 목소리는... 나를 미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씨발... 이건 뭐...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얘가 이렇게 음침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3명에 수아를 맞이 하게 된 나였다.
"자는 거 맞지 진성아?"
흠짓
"..."
"..."
"..."
"... 맞는가 보네... 그럼 진성이는 자고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나를 대하겠지? 설마 갑자기 거리를 두거나 연락을 피하던가 그럴 이유는 없을 거야 헤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설마 다 알고 있는 거야? 내가 안 자고 있다는 것을?'
만약 그런 의도로 말을 한 거라면... 씨발 머리가 아파 온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되지? 얘가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건 대충 눈치채고 있었는데 이건... 아니잖아 씨발. 왜 일이 이렇게 되는 건데.
스윽
귓볼을 만지던 손이 이제는 뺨으로 옮겨졌다.
"내 꿈꿔"
"..."
"그리고... 아니다 이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 것 같네 헤헤..."
"..."
그렇게 수아는 잠깐 침묵을 취하다 방을 나갔다.
즐거웠던 여행의 끝은 최악으로 상상치도 못한 최악의 결과로 끝을 내게 되었다.
***
날이 밝았다.
머엉
"하아암... 피곤해 죽겠네"
"..."
"... 뭐야? 오빤 어제 일찍 들어가지 않았어? 무슨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피곤해 뒤지려고 하잖아?"
졸려 죽겠다는 표정으로 차에 올라탄 진아가 내게 물었다.
"..."
"뭐야? 뭔 약몽이라도 꾼 거야? 왜 말을 못해"
'그게 악몽이면 얼마나 좋을까'
진아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냥 한숨만 크게 내뱉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느닷없는 수아의 고백은 내게 있어서 정말 많은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민 끝에 결국 가만히 있기로 했다.
나는 어제 일찍 잠이 들었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수아가 내 방에 올라온 지도 몰랐다. 수아가 어제 내게 한 말을 듣지 못했다.
나만 조용히 하면, 나만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것이 옳은 생각이다.
'무언가를 참는 건 익숙한 편이니 뭐...'
아침 식사를 하면서 수아와 대화할 때 조금 많이 힘든 구석이 있었지만, 그래도 끝내 잘 마무리를 지은 나였다.
"하아... 하필 이럴 때 담배를 두고 와가지고"
"... 어어? 오빠 담배도 폈어?"
"문제있냐?"
"아니 뭐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은 없는데... 생각 외로 의외여서"
진아의 말에 나는 입맛을 다시며 눈을 감았다.
담배가 마렵긴 하지만 지금 막 출발하려는 참인데 담배를 사오겠다고 나가는 것도 조금 그렇고 그냥 도착할 때까지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띠링
씨발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혹시나 해 불안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괜히 수아가 보낸 메시지였는데 나중에 왜 안 받았냐라는 추색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은하]
"... 에휴"
다행히 수아는 아니었지만 보자마자 한숨부터가 나왔다.
"... 뭐야? 아까는 당장에라도 뒤질 것 같더니 이제는 왜 또 실실 쪼개고 있어"
"문제있냐?"
"... 에휴 괜히 말건 내가 등신이지"
하지만 진아의 말대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입가에선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왜 또
[아니 그냥 이따 시간 되면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나도 막 지금 귀국했걸랑]
"저녁은 지랄"
그래 알았어
[그럼 이따 연락할 때니까 받아라?]
은하의 말에 나는 알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그렇게 대화는 짧게 끝이 났다.
스윽
옆에서 진아가 뭐라 시부리는게 들려졌지만 대충 무시하고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복잡했던 마음이 왠지 모르게 편안해진 기분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