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여행(8)
* * *
"... 뭔데?"
"..."
"..."
갑자기 또 무슨 변덕이 들었는지 수아가 고개를 숙였다.
망설여하는 수아의 모습에 나는 그냥 갈까 싶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서 수아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수아는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올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져 버렸어... 솔직히 네 성격에 이런 말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고"
"..."
"... 너무 오랫동안 내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것 같아"
수줍지만 떨리는 기색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 그래서"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평상시엔 나와 2초 이상 눈을 마주치지 않은 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이상했고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저 입에서 나를 놀라게 만들 엄청난 발언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 설마'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정말로, 진짜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왠지 모르게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저 입에서 나올 거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있잖아. 나 사실은 너를..."
그렇게 내가 혼란에 빠지든 말든 수아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수아의 입에서 결정타가 담긴 말이 나오려고 했을 때.
"Hey!! Korean friedns!!"
"... ?"
느닷없이 뒤편에서 왠 영어가 들려오며 흐름을 끊어 버렸다.
'근데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 같은...'
"... Oh!! You're..."
"..."
뭔가 낯설지 않음을 느끼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 이런 미친"
'어제 그 외국인 년들이잖아?'
샛노란 금발 머리에 한국에선 쉽게 볼 수 없는 푸른색의 눈동자. 어제 해변에서 도망친 외국인 둘이 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진성아 이 사람들은?... 설마 어제 너가 말한...?"
"그런 것 같네"
"... 그, 그럼 다시 도망가야 되는 거 아니야?!"
"..."
옆에서 수아가 말을 더듬으며 내 어깨를 잡았다.
외국인들의 난입 때문인지 지금의 수아는 내가 아는 소심 그 자체에 모습이었다.
너무나도 다른 두 모습에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일단은 다른 문제가 생겼으니 크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Girfrined?"
"... No. Just Friend!!"
"Ahhhh!!"
'... 씨발 지금 내가 뭐 하는 짓거린 지'
내 대답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앞에 두 외국인 여자들은 신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들을 바라봤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 걔중 키가 큰 양년이 입을 열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벤이야!"
"... ?"
"이쪽은 아델리이고 우리는 놀러 왔어요!"
"어어..."
당연히 영어가 나올 줄 알았는데 느닷없는 한국말에 나는 말을 더듬었다.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거였어? 그럼 어제랑,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영어로 말을 한 건 뭔데 씨발'
"아 참고로 우리 유학생이야. 나는 4년차이고 아델리는 3년차"
"... 근데 왜 영어로 말한 거야"
"Um? 우리도 처음엔 한국어를 썼는데... 영어를 쓰니까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
뭔 개소리야 씨발.
그러니까 자기들이 남자를 꼬실 때 영어로 말을 했더니 남자들이 잘 꼬였다는 말이야?
'이런 미친 양년들. 아니 저년들도 문제지만 외국인이 영어로 관심을 보였다고 그 말에 혹한 새끼들은 뭐 하는 새끼들이야'
"그래서 우리랑 같이 불꽃놀이 하러 가지 않을래? 마침 아델리가 폭죽을 사놓은게 있어!"
그러면서 벤이 아델리에게 신호를 주자 아델리는 손에 무언가 담겨 있는 종이 상자를 보란 듯 흔들거렸다.
"... 진성아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
"어쩌긴 뭘 어째 당연히 거절해야..."
멈칫
"... 진성아?"
내가 말을 하다 멈추자 수아는 불안해 하면서 나를 바라봤다.
'... 아니지. 만약 여기서 거절을 하고 다시 수아랑 둘이 남게 된다면...'
오싹
"... 이런 씨발. 진퇴양난이네"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무리 냉정하게 생각해 봐도 진짜 답도 없는 상황이었다.
양년들이랑 어울리기는 끔찍하게 싫고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수아가 조금 전에 일을 이어갈텐데...
"... 양년... 아니 외국인들! 정말 불꽃 놀이만 하는 거야?"
"물론이지. 우리는 남자를 좋아하지만 서로 연인 관계의 사람들은 건들지 않아"
"애초에 우리는 각자 남자친구가 있다고"
"연인이 아니라니까... 뭐 어쨌든 그럼 짧게나마 어울려줄게"
"좋았어!! 그럼 당장 해변으로 내려가자고!!"
활기차게 말하는 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우리는 해변으로 내려갔다.
***
"... 진성아? 정말 괜찮아...?"
"뭐 어때 불꽃 놀이만 하고 헤어진다는데. 이것도 추억이겠지"
"하지만..."
"괜찮아. 설마 뭐 별일이라도 생기겠어? 너도 있는데 말이야"
"..."
마치 내가 수아를 믿는다는 듯한 말투로 얘기하자 그제야 침묵한 수아였다.
'역시'
어둡지만 수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게 보였다.
이리저리 생각을 했지만 지금 당장은 양년들이랑 어울러 다니는 게 좋아 보였다.
'적어도 30분 정도는 어울려야겠지'
30분이면 묘한 분위기를 상쇄시키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
슬쩍 수아를 바라봤다.
"헤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수아는 바보마냥 실실 쪼개고 있었다.
'... 혹시 내가 잘못 생각했나?'
왠지 모르게 저런 모습을 보니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만약 내 예상이 틀렸다면.... 씨발 수아를 어떻게 봐야 되지? 아니지 그 전에 내가 먼저 수치사로 목을 매달겠구나.
"... 진성아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꼭 지켜 줄게!!"
"... 그래"
'퍽이나도 잘 지키겠다'
그렇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바닷가 근처에 도착했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는 건데"
"오 잠깐만 기다려. 아델리! 상자에서 폭죽을 하나 건네 줘!"
그 말에 아델리가 무언가 길쭉한 막대기를 벤에게 건넸고 벤은 야릇한 미소로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 벤! 설마 손으로 잡고 하게?"
"응? 무슨 문제 있어?"
"그거 손으로 잡고 하면 위험한 거 아니야?"
"아아... 괜찮아! 이걸로 안 죽어!"
"아니 안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벤은 심지에 불을 붙였고 곧바로 하늘을 향해서 폭죽을 올렸다.
그리고 잠시 뒤.
파악
퍼버벙
"..."
"..."
침묵 속에서 시꺼먼 하늘을 바탕으로 노란색깔의 빛이 힘차게 터졌다.
"... W, Wow!! 이거 존나 대단한데!!"
"... 벤! 이것 좀 가지고 있어 봐. 나도 한번 해 보게!!"
매우 신이난 표정으로 환호해하던 벤에게 아델리가 비슷한 막대기 하나를 꺼내 들고선 상자를 건넸다.
슉
슈슉
"뻑!! 이것 봐!! 이건 계속 날아가!!"
"Shit!! 내가 그걸 했어야 됐는데!!"
폭죽도 다양하게 구매했는지 아델리의 막대기에선 연달아 3번이나 폭죽이 발사되었다.
"하하!! 수아! 거기서 구경만 하지 말고 너도 한번 해 봐!!"
"어어?"
"이럴 때 일수록 너가 여자다운 모습을 보여 줘야 너의 남자친구가 넘어가지!"
"남, 남자친구..."
벤의 말에 수아가 헤벌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외쳤지만 모두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고 어느새 수아의 손엔 막대기 하나가 쥐여져 있었다.
"봐봐. 내가 심지에 불을 붙이면 바로 하늘을 향해 폭죽을 겨냥해야 해. 알겠지?"
"으으... 잠깐만 나 이거 못할 것 같은데..."
"오 이런... 저길 봐 수아"
"... 어?"
"너의 남자친구 진성이 너가 빨리 폭죽을 터뜨리길 기대하고 있잖아. 만약 너가 여기서 포기를 한다면 진성은 너를 겁쟁이로 볼거야"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거야 저 미친 양키 새끼가. 폭죽을 못 터뜨리는거랑 겁쟁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하지만 너가 폭죽을 제대로 터뜨린다면... 그는 너를 향해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겠지"
"사, 사랑스러운 눈빛..."
"사랑스럽고도 뜨거운 눈빛. 그것은 남자만의 특권이야"
"..."
나는 입을 떡 벌린 체 저 둘을 바라봤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내 입에선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알겠어. 벤! 심지에 불을 붙여 줘!"
"Good Gilr! 너는 성공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내가 어버버거리는 사이 벤은 수아의 심지에 불을 붙였고 수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빠르게 하늘 위로 폭죽을 올렸다.
피유웅
"우, 우와왓!!"
피융
피유웅
수아가 잡은 것도 아델리처럼 연발형이였는지 폭죽은 멈추지 않고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펑
퍼버벙
또다시 하늘에선 환한 빛깔들이 신나게 터져 나왔고 수아의 폭죽은 무려 5번이나 발사가 되고 나서야 끝나게 되었다.
"헤이 수아!! 기분이 어때?!"
"..."
아델리의 말에 수아는 손을 벌벌 떨면서 입을 열었다.
"... 이, 이거 끝내준다 진짜!!"
"하하하!! 역시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어!! 어떻게 한 번 더 할래?"
"줘줘!!"
그렇게 수아는 굉장히 환한 미소를 진 체로 계속 시꺼먼 하늘을 향해 폭죽을 터뜨렸다.
"이봐 진성! 너도 한번 하지 그래?"
내가 혼자 멍하니 있자 벤이 몇 개의 폭죽을 쥔 체로 내게 말했다.
"... 난 하는 것보단 보는걸 더 좋아해서"
"쓰읍... 폭죽은 보는 것보단 직접 터뜨리는 게 재밌는데"
"됐어. 니들이나 재밌게 해라"
고개를 저으며 내가 거부 의사를 펼치자 벤은 알겠다며 신나게 폭죽을 터뜨리고 있는 수아와 아델리쪽으로 다가갔다.
"..."
조용히 수아를 바라봤다.
가장 양년들에 대해 걱정하던 수아는 저 셋 중에서 제일 재밌게 놀고 있었다.
"... 에휴. 역시 그냥 내가 헛다리를 집은 건가"
정리할 시간을 가지기 위해 양년들이랑 어울린 것인데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아져 버렸다.
'하지만 수아가 정말로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피유웅
퍼버벙
아름다운 폭죽들이 어두운 하늘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