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여행(7)
* * *
"여보세요"
[뭐 하냐? 어떻게 전화 한 통을 안 할 수가 있어]
"... 그렇게 따지면 니도 지금에서야 한 거잖아"
걸걸한 은하의 목소리에 나는 시큰둥해하며 말했다.
[.... 아 그런 거야? 그러니까 니 말은 내가 전화를 걸기 까지 기다렸다는 말이지?]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데 미친년아"
[미친년이라니... 욕 좀 줄이라니까]
과연 얘는 알까? 자기 때문에 내가 욕이 몇 배는 늘어났다는 걸?
"... 됐고 그래서 왜 전화 했는데"
[응?... 아 그냥 뭐 하나 궁금해서. 나는 아는 언니들이랑 하와이에 왔거든]
"하와이?"
하와이를 갔다고? 이 새끼 생각보다 돈 좀 있었나 보네.
'하긴 생각해 보면 얘랑 같이 밥을 먹을 때 지가 혼자 다 계산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언니들은 남자를 꼬시러 간다던가 뭐라나. 나야 뭐 그런 거엔 관심이 없어가지곤 숙소에 머물고 있었지]
"... 예상외네"
몸과 마음은 순도 100퍼센트 양아친 데 이상하게도 남자의 관해서는 나처럼 선비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니까?
이게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인데 은하가 그걸 해내고 있으니 원. 얘도 참 별난 년이다.
[응? 뭐라고?]
"으응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마"
[... 뭔가 이상한데? 너 또 내 욕했지]
"뭐래 내가 갑자기 니 욕을 왜 해?"
[쓰읍 수상한데...]
하여간 워낙 나한테 욕을 많이 처먹어서 그런지 욕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눈치를 채는 은하이다.
통화는 꽤 길게 이어졌다.
애초에 나도 은하도 딱히 할 일이 없었고 내가 지루한 만큼 은하 또한 현 자기 상황이 지루했기 때문에 대화가 길게 이어져 버린 것이었다.
[진짜? 부모님 때부터 친구 사이였다고?]
"부모님은 아니고 아빠... 가 아니라 엄마랑 아줌마가 고등학교에서 맺은 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거지"
[그게 그거지. 그러면 너랑 그 소꿉친구는 정자 때부터 친구였겠네?]
"..."
그 말에 자연스럽게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자는 무슨 말 한 번 더럽게 저급하네 진짜.
[뭐? 소꿉친구가 여자라고? 와아... 그럼 너희 둘이 뭐 썸 같은 건 없었냐?]
"썸은 무슨 걔는 걍 친구일 뿐이야"
[그래도 뭐 한번쯤은 서로 설렜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무려 20년 이상을 만난 사이인데]
"... 그런 거 없었어 새꺄. 게다가..."
[...]
"..."
잠시 말을 멈추고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내린 결론은.
'그 20년지기 소꿉친구에 새로운 면을 어제 보게 됐는데 그런 일을 겪고도 어떻게 썸이 생겨 씨발'
치를 떨면서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아마 이보다 더 정확한 결론은 없을 것이다.
[... 게다가?]
"... 뭐 어쨌든 우리는 그런 관계는 아니라고"
[...]
"..."
[... 그럼 뭐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그런 거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은하의 목소리가 묘하게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딱히 부정적인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 그래서 닌 언제 귀국하는데"
[어? 내일 새벽 비행기를 타고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까... 대충 점심때쯤엔 오겠네]
그러면서 내일 저녁에 시간이 되냐고 은근슬쩍 묻는 은하에 어이가 없음을 느끼며 시간이 되면 연락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은하는 되게 기뻐하는 말투로 알겠다 답했고 갑자기 엄청난 괴음을 지르더니 전화비가 많이 나오겠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어 버렸다.
뚝
"... 생각보다 오래 통화했는데? 국제 전화가 초당 얼마였더라?"
물론 나랑은 1도 상관이 없는 일이였기에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 그나저나 어느 정도 됐으려나. 슬슬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소파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며 베란다로 나갔다.
저쪽 마당에서 뭔가를 설치하는 엄마와 진아, 그리고 탁자를 세팅하는 아줌마가 눈에 들어왔다.
아줌마와 진아는 들뜬 표정을 감추지 않은 체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고 엄마는 뭐... 여전히 무표정한 상태였다.
"나도 이제 슬슬 내려가면 되겠는데?"
준비가 거의 끝나 보이니 내려가서 음식 좀 나르고 그러면 될 것이다.
띠링
'으응?'
그렇게 내려갈 준비를 하며 바깥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서은하 : 사진을 보냈습니다.]
"... 뭐야 얘는"
수신인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고 이어서 보내진 사진을 보고 다시 한번 눈살을 찌푸렸다.
은하가 보낸 사진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가 비키니를 입고 찍은 셀카였다.
문제는 비키니가 너무 야시꾸리했다는 건데... 어우 씨발 요즘 들어 보수적인 면이 조금씩 무너졌다 생각한 나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너무 과했다.
'씨발 저게 무슨 비키니야 그냥 끈이지. 저게 알몸이랑 뭔 차이가 있어?'
면으로 아슬아슬하게 중요 부위만 가린 은하의 모습을 보고 망설임 없이 삭제 버튼을 눌렀다.
"... 씨발"
휴대폰을 끄고 머리를 거칠게 헝크러뜨렸다
사진의 영향 때문인가? 기분이 이상했다.
***
치이익
듣기 좋은 소리와 함께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아직 여름이라서 그런지 시각은 저녁 때 였지만 해는 모두 저물지 않았고 덕분에 노을빛이 지는 분위기 속에서 바베큐 파티가 시작되었다.
"어유 더워! 거기 그릇 좀 가져와 줄래?"
많이 더우셨는지 땀을 한바가리를 흘리면서 아줌마는 고기를 그릇에 담기셨고 나는 고기가 담긴 그릇을 테이블로 옮겼다.
한쪽에선 엄마가 무표정으로 해산물을 굽고 계셨고 그 모습을 진아가 그릇을 든 체 멍하니 보고 있었다.
'... 입떨어지겠네'
진아의 얼굴은 참으로 행복한 미소가 그러져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자 그럼 건배!!"
짠
고기와 각종 해산물이 산더미처럼 차려진 테이블을 두고 수아 아줌마가 건배사를 하시며 식사가 시작됐다.
"많이들 먹으렴. 그리고 진아 너는 고기만 먹지 말고 채소도 좀 같이 먹고"
"우걱우걱... 네넥... 알겍어욕"
"먹고 있을 땐 말하지 말고"
아까부터 계속 고기만 처먹던 진아가 못 미더우셨는지 수아 아저씨가 한 소리를 하셨지만 진아는 개의치 않아 하며 신나게 젓가락질했다.
수아는 고기 보단 해산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열심히 조개를 까고 있었고 어느새 해가 떨어지며 분위기 또한 점점 무르익어갔다.
"우, 우윽... 배가 터질 것 같아..."
진아가 느끼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산더미 같은 고기를 신나게 먹어치우고 이어서 리필 된 고기까지 처먹었으니 배가 부를 만도했다.
"... 적당히 좀 먹으라니까 무슨 걸신마냥 처먹어되냐"
"... 고기에 적당히가 어딨어 그냥 먹는 거지... 거기 앞에 있는 콜라 좀 따라줄래?"
"..."
말하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진아에 나는 혀를 내두르며 콜라를 따라줬다.
멍청... 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도 뭔가를 먹을 때 만큼은 바보가 되는 진아였다.
'이런면에선 은하보다 얘가 더 등신 같단 말이지'
물론 그렇다 해도 예전에 소심한 진아보단 지금의 진아가 더 나았다
그때는 지금과는 다르게 답답할 정도로 깨작깨작 먹었으니 뭐 차라리 이렇게 무식하게 먹는 모습이 훨배는 보기가 좋았다.
"으으으... 더 먹을 수 있는데... 왜 내 위장은 이것밖에 저장을 못 하는 거지..."
"..."
그냥 대충 무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진성아 이거..."
수아가 수줍게 미소 지으며 대게가 담긴 그릇을 건넸다.
대게의 다리가 먹기 좋게 잘라져 있었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 어 응... 고마워"
"... 아니야 헤헤"
그렇게 말하는 수아의 입에선 시큼한 술 냄새가 났다.
아줌마가 조용히 밥을 먹는 수아에게 이 정돈 마셔야 된다며 술을 맥인 것이다.
이미 술 취한 수아에게 제대로 피본 적이 있는 나는 노심초사하며 별일이 없기를 바랬고 아직 수아는 적당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술을 마셨다.
'조금 아슬아슬하기는 한데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겠지'
나랑 진아는 뭐 술을 마시든 뭘 먹든 부모님들의 관심 범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처음 한 잔 빼곤 술을 마시지 않았다.
쾅!
"... 수아랑 진성이의 아름다운 맺음을 위하여!!"
"어, 엄마!!"
"... 왜? 너 어릴 때 맨날 진성이랑 결혼한다고 했잖아"
"무슨 소리예요!! 오해할 말 하지 마시라구요!!"
가끔 아줌마가 이렇게 수아의 취기를 깨뜨렸으니 내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진성아. 가서 이걸로 아이스크림좀 사와줄래?"
"아 네"
두 모녀를 한심하게 보고 있던 아저씨가 내게 카드를 건네며 말하셨다.
마침 소화도 시킬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아 너도 그러지 말고 진성이랑 같이 다녀와. 진성이 혼자 야밤에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잖아"
"... 네"
아저씨의 말에 토마토처럼 붉어진 얼굴로 수아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나와 수아는 팬션을 나와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
"..."
딱히 대화는 없었다. 할 필요도 없었고그냥 조용히 걷기만 했을 뿐이었다.
간혹가다 수아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지만 괜히 둘만 있어서 그런지 나는 틈을 주지 않았고 결국 수아는 입을 열지 못했다.
"7800원 입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 편의점에 도착을 하고 아줌마가 주신 카드로 아이스크림을 계산 한 뒤 편의점을 나왔다.
피유웅 피융
퍼버벙
"어? 불꽃 놀이 하나 보네..."
"그러게 말이야"
밖으로 나오자마자 시끄러운 폭발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새까만 하늘위에 알록달록한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불꽃은 쉴 틈 없이 공중에서 터져나갔고 아래에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 시끄러운 폭발음 때문에 폭죽을 싫어하는 나였지만 오늘 만큼은 하염없이 폭죽이 터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나 하늘을 바라봤을까.
"... 진성아"
"...?"
어느새 내 뒤에 있던 수아가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은 뭔가를 결심한 듯한 모습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