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여행(6)
* * *
좋은 아침이란다. 좋은 아침.
그것은 어젯밤 내 어깨에 커다란 멍 자국을 남긴 사람이 내뱉은 말이었다.
내가 진짜 별의별 말들을 다 상상했는데 설마 이렇게 말을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 미친년인가?'
오죽했으면 그 말을 듣자마자 이런 생각이 바로 들었을 정도였다.
"... 그 내가 혹시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
"왜 말은 안 해....."
뭔가 잘못 됐다는 걸 눈치챘는지 수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과연 수아 얘는 내가 지말에 어이가 없어서 말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아마 뒤져도 모르겠지'
이건 100퍼센트를 넘어선 그 이상에 확신이었다.
"뭐 해 라면 다 끓였어 빨리 와~ 라면은 불면 맛없어진다고"
식탁에서 진아가 손짓하며 우리를 불렀다.
일단 나와 수아는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한 체로 자리에 앉았고 진아가 끓인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면이 입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누구하나 할 것 없이 모두 눈살을 찌푸리며 젓가락질을 멈췄다.
"어으.... 이건 뭐 뭘 어떻게 끓인 거야"
"... 진아야 너무 싱거운데...."
"하하...... 라면이 조금 싱겁네..?"
이건 싱거운걸 넘어서 그냥 맹물이나 다름없는데 무슨.
그래도 어쩌겠는가 배는고프고 몸은 해장을 원하는데 그렇다고 다시 끓이기엔 너무 아깝고 걍 김치랑 같이 먹으면 어떻게든 넘어가겠지. 뭐.
다행히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는지 우리는 그렇게 맛대가리가 끔찍할 정도로 없는 라면을 모두 먹어치우고 진아 얘는 저 한강에 밥까지 말아 먹고선 소파에 대자로 뻗어 버렸다.
"꺼억... 배부르니까 잠이 오네..."
"... 먹고 눕지마. 니 그러다 소된다"
"소는 무슨... 아 갑자기 오빠가 소 얘기하니까 소고기 먹고 싶잖아"
얘는 또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거야? 이게 그 뭐냐 의식에 흐름대로 말한다는 건가?
".... 근데 니들 어젯밤에 있었던 일 기억 안 나냐?"
"..."
"..."
"... 진짜 기억 안 나?"
"사실 내가 술 마시고 뻗어 버리면 필름이 끊기는 습관이 있어서"
".... 나도 진아랑 비슷해..."
"..."
"..."
"... 혹시 뭔 일 있었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으로 진아가 물었다.
수아 역시 진아와 마찬가지로 궁금하다는 눈빛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 아니 나도 별 기억은 없어서"
"그래? 그럼 뭐 별일 없었겠네. 오빠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로 봐서는"
"... 그래. 별일 없었을 거야 진성아"
"..."
지랄들을 하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엄청난 인내심으로 그 말을 억눌러 놓았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괜히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관계를 씹창 내버리는 것보단 그냥 내가 닥치고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대충 이번엔 넘어가고 다음부터 얘네들이랑 술을 안 마시면 되는 거지'
그냥 평소보다 운이 안 좋았다 자기 위로하며 어제 있었던 일을 훌훌 털어 버렸다.
뭐 어쨌든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딱히 할게 없었던 우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 노가리를 깠다.
어렸을 때 같이 놀러 다닌 기억부터 시작해서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들은 진아의 러브 스토리까지. 참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얘기도 나눴는데 바로 진아의 군 복무에 대한 이야기였다.
".... 진짜로? 이번 학기 끝나고 바로 간다고?"
"뭐 어떡해 여기서 더 늦추면 나만 손해 일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언니처럼 1학년 2학기 때 다녀올걸"
"아하하.... 진아라면 잘해낼 수 있을 거야..."
"으으.... 가기 싫어...."
되도 않는 앙탈을 부리는 진아에게 수아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군대라...'
이건 진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새롭게 다가왔다.
역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군복무도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였고 때문에 여자는 출산과 군대를 동시에 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졌다.
"... 허 참 신기하네..."
"신기하기는 무슨... 나도 오빠처럼 남자였다면 군대에 안 갔을 텐데... 부러워 죽겠네 진짜"
"..."
그러게 말이다.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일찍 군대에 가지 않았지 씨발.
그나저나 출산과 군대를 동시에 이행한다라.... 이건 여자들 처지에서 좀 그렇지 않게 느껴질텐데?
괜히 남녀 갈등을 유발시키는 1위가 출산과 군대라는 게 머릿속에 있는 나로선 이러한 상황에 되게 애매함을 느꼈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 수밖에 없겠는데?'
힘든 일을 죄다 여자가 하는 입장이니 뭐....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솔직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자보단 남자가 꿀빨기엔 좋은 세상인 것 같고...
"오빠!!"
"어어...? 왜"
"뭔 생각을 하고 있길래 갑자기 조용해져? 내가 몇 번을 불렀는데"
"아니 뭐.... 그래 미안"
"... 딱히 사과를 바란 건 아닌데....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 어?"
"남녀 모두 군대에 가는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
진아의 말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남녀가 모두 군대를 가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씨발 말해 뭐 해 당연히 반대해야지. 이미 갔다 온 군대를 나보고 또 가라는 말이잖아 저건.
"... 헛소리하지 말고 군대 가기 전에 친구들이랑 술이나 마시면서 다녀라"
"에엑.... 무슨 말하는 꼬랑지는 군댈 갔다 온 사람처럼 말하네"
"... 에휴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말고 뭐 정 필요하다면 번호는 좀 그렇고 내 사진 정도는 팔고 다녀도 괜찮으니 알아서 해"
".... 내가 오빠 사진을 왜 팔아?"
"그런 게 있어 임마. 너 나중에 나한테 엄청 고마워할거다"
"....?"
귀여운 자식. 이게 신병 때 얼마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행동인데.
지금 군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니던 때만 하더라도 여동생이나 누나의 존재는 확실히 무조건적으로 득이 되었다.
'... 나도 예전에 니 덕 좀 보고 다녔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내가 군대에서 진아를 팔았다는 게 아니고 가끔 진아가 면회를 왔을 때 이상할 정도로 선임들이 내게 잘해 줬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 내가 강원도 산골 짜기 부대에서 근무를 했는데 그곳이 워낙 구석탱이에 있는 부대라 그런지 여자 한번 보기가 드럽게 힘든 곳이었다.
그러다 정말 힘들게 진아가 한번 면회를 온 적이 있었는데.... 이날 이후로 내 군생활이 360도로 바뀔 정도였으니 뭐.
'특히나 이병때 정말 제대로 꿀 빨았지. 맨날 갈구던 선임 새끼들이 은근 슬쩍 먹을 거나 핫팩같은 걸 건네고 그랬으니까 말이야'
"... 에이 그래도 설마 내가 오빠를 팔겠어? 우린 가족이잖아"
".... 몰라 그건 니 알아서하고 번호만 팔지 마라"
"안 판다니까 참"
말을 그렇게 하지만 내가 볼 때 진아 얘는 아마 2주도 안 돼서 나를 팔아 버릴 것이다.
짧지만 내가 파악안 진아는 워낙 엄살이 심하고 맞는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 나중에 면회나 몇 번 가줘야지'
예전에 진아는 손수 도시락을 만들어 가져 왔는데 나는 좀 무리일 것 같고 그냥 적당한 음식들을 싸서 가져가면 아마 미친 듯이 좋아할 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덜컥
"어유 일어났어? 밥들은 먹었고?"
현관에서 수아 아저씨에 목소리가 들리며 어른들이 펜션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디 갔다 오셨어요?"
"으응. 저기 앞에 유명한 카페가 있다고 해서 가 봤는데 생각보다 별거 없더라"
카페에서 사오셨는지 수아 아저씨가 쿠키와 음료수를 우리에게 건네주셨다.
쿠키는 그럭저럭 먹을 만 했는데 음료수는 드릅게 맛이 없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진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음료를 내려놓았다.
"에엑...! 이딴 걸 정말 돈 주고 판다구요?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확실히 경치 하나 만큼은 끝내주더라"
그 외에도 무슨 이상하게 생긴 조각품과 예뻐 보이는 촛불을 내려 놓으신 아저씨였다.
그렇게 모두 펜션으로 돌아오신 어른들이었지만 도착하시자마자 곧바로 분주하게 움직이시기 시작했다.
수아 아줌마의 말로는 저녁에 있을 바베큐 파티를 위해서라는데 그 말에 진아는 눈빛을 반짝거리며 적극적으로 일을 돕기 시작했고 그렇게 엄마를 따라 아줌마 차에 있는 바베큐 그릴을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아저씨와 아빠는 상당한 양의 고기와 해산물을 손질하고 있으셨고수아 역시 식탁에서 묵묵히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모두가 바삐 움직이고 있을 때 나도 뭔가 도움을 드리고 싶어 아빠랑 아저씨에게 얘기했더니 아저씨 왈.
"도움은 무슨 우리 진성이는 윗층에 올라가서 편히 쉬고나 있으렴. 이 정도면 수아 혼자서 다 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
그러면서 무슨 수아도 지금부터라도 남자에게 예쁨받는 법을 알아야 된다나 뭐라나.
"... 허참"
졸지에 혼자 윗층에 머물게 된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소파에 앉았다.
딱히 할 것도 없었고 그냥 주구장창 유튜브만 시청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흘렀을까
[암컷 사자는 여러 마리에 수컷을 데리고 다니며 수컷 사자들은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하는...]
위이잉
"...?"
한참 재미있게 동영상을 보던 참에 갑자기 영상이 멈추더니 전화가 걸려왔다.
[서은하]
"... 뭐야 얜 갑자기"
퉁명스럽게 말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검은색 화면에서 비쳐진 내 얼굴엔 작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