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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 속 처녀 지키기-28화 (28/72)

〈 28화 〉 여행(4)

* * *

"자 건배~"

술잔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작게나마 술판이 벌어졌다.

바닥에는 다양한 과자봉지가 뜯겨져 있었고 말린 오징어와 땅콩 통조림등 별의 별 안주가 놓여 있었다.

"어으! 뒤지게 쓰네... 언젠간 이런 날이 올거라 생각은 했는데... 막상 생각처럼 그렇게 낭만적이진 않네"

순식간에 소주 3잔을 연거품으로 마신 진아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나는 눈쌀을 찌푸리며 진아에게 말린 오징어를 먹기 좋게 뜯어 건냈다.

"... 낭만은 무슨 천천히 좀 마셔라. 뭔 안주도 안 마시고 계속 술만 마시냐"

"원래 술은 이렇게 먹는 거라고 선배들이 그랬어"

"그건 또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개떡이라니!! 내가 제일 존경하는 선배님인데..."

존경은 무슨 대학 가서 어디 이상한 인맥만 잔뜩 만들었나 보네.

병신 같은 짓거리를 하는 진아의 모습에 작게 혀를 내두르며 나도 술을 마셨다.

원래 내 체질이 술과 더럽게 맞지 않는 체질인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술이 쭉쭉 들어갔다.

'... 이것도 역전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뭐 어쨌든 태생이 술에 취약한 나로선 이 변화는 환영스러운 변화였다.

"... 그래도 진성이 말대로 안주도 먹으면서 마셔 진아야..."

"언니 걱정 마세요. 저는 안주 같은 거 없어도 술이 잘 먹히는 체질이거든요오... 헤헤"

"... 벌써부터 조금 취한 것 같은데"

"어유 무슨 소리예요 이제 3잔 밖에 안 마셨는데... 저 이진아! 아직 말짱합니다앗!!"

진아가 입술을 꼬면서 말했다.

그리고 정확히 10분 뒤.

쾅­

"... 흠냐 으음..."

"..."

"..."

총 5잔을 스트레이트로 마셔버린 진아는 결국 자리에서 쓰러진 체 잠에 빠졌다.

"... 에휴 내 이럴 줄 알았지. 미안하지만 얘 옮기는 것 좀 도와줄래?"

"어 으응..."

덕분에 나와 수아만 뜻 하지 않은 고생하게 되었다.

그렇게 진아를 소파에 눕히고 분위기는 조금 가라앉았지만 술자리는 계속 이어져 갔다.

우리는 서로 각자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시답지 않은 얘기와 추억에 잠긴 기억들을 공유했고 이게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수아는 다른 때와는 다르게 열심히 입을 털었다.

"대식이? 걔 동생이 니네 학교에 다닌다고?"

"으응... 나랑 과는 다르지만 저번에 인사를 하러 왔더라..."

"... 잘 됐네"

그러는 사이 빈 병은 꾸준히 늘어나갔다.

취기야 뭐... 이렇게 마셨는데 당연히 올라왔고얼굴이 시뻘게진 수아를 보며 나 역시 지금 내 모습이 수아와 다를 게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 몸에 취기가 돌기는 하였지만 정신은 멀쩡했다는 점이었다.

"... 해서 팀장이란년이 잠수를 탔는데... 진성아? 내 얘기 듣고 있는 거 맞지?"

"어어. 듣고 있어"

"... 그래서 그년이... 잠깐만 근데 내가 무슨 말하고 있었지이...?"

"..."

그와 달리 수아는... 취기가 제대로 돌았는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헤헤... 자아! 내가 한잔 더 따라 줄게에~!!"

"..."

처음 본 수아의 주사는 약간 특이했다.

"... 하나아... 두울.... 세엣..."

신나게 혼자 떠들다 갑자기 손가락을 하나씩 접지 않나.

"... 어어? 뭐 하냐구우...? 그러게... 내가 뭐 하고 있었더라아...?"

"..."

5초 전에 자기가 했던 행동을 까먹지 않나. 뭐 하여튼 이 모든 걸 통틀어 정리해 보자면수아 얘는 술에 취하면 바보가 되는 모양이었다.

"... 좋냐?"

"히히... 으응? 뭐라구우...?"

"... 에휴 아무 것도 아니야"

평소에 그렇게 안 보여주면서 지금은 계속 웃음을 터뜨리는 수아를 나는 조용히 바라봤다.

아무래도 상태를 보니까 더 이상은 마시면 안 될 것 같았다.

"야야. 이제 그만 마시고 잠이나 자자"

"에에에...? 왜에... 나 더 마실 수 있어요오오..."

"더 마시고 싶어도 술이 다 떨어졌어. 내일 또 얼굴 붉히지 말고 그냥 잠이나 자라"

"... 술이 다 떨어져...?"

술이 다 떨어졌다는 말에 수아가 커다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 흐흑"

그리고 조금씩 눈에 습기가 차오르더니 어느새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렸다.

"... 으흐흑... 진성이 너 나랑 술 마시기 싫은 거야아...?"

"아니 그건 뭔..."

"... 왜 나랑 술 안 마시려고 하는 거야아... 흐흑"

"..."

갑작스러운 수아의 행동에 나는 크게 당황해했다.

아니 마지막으로 수아의 눈물을 본지가 초등학교 시절이었는데 여기서 눈물을 터뜨리면...

"야야!! 갑자기 왜 울어"

"으흐흑... 너가 내가 싫어서 술 안 마신다고 했잖아아..."

"뭔 개소리야 내가 언제 너가 싫어서 술을 안 마신다고 했어. 술이 떨어졌다고 했지"

"으아아항...!".

침착하게 수아를 달래며 말을 했지만 소용이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지금 상태에선 내 말이 안 들리는 것 같았다.

'아...'

안 그래도 술 때문에 머리가 아파 왔는데 수아가 울음을 터뜨리니 나 역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결국 수아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수아가 듣고 싶어 하는 말해주었다.

"같이 술 마셔 줄 테니까 그만 좀 울어 제발"

뚝­

"정말...? 나랑 술 마셔줄 거야..?"

같이 술을 마셔 주겠다는 내 말에 수아는 거짓말처럼 눈물을 뚝하고 그쳤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 조용히 수아를 바라봤지만 수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멀뚱히 나와 시선을 맞췄다.

'이게 무슨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주겠다는 말도 아니고'

진심이 담긴 한숨이 입에서 나왔다.

"... 아랫층에서 술 좀 가져올 테니까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있어"

"헤헤... 그럼 약속 하는거다아아...?!"

"알겠으니까 더 이상 안 우는 걸로. 알겠지?"

수아가 헤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는 순수했지만 한편으론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 그런 멍청한 미소였다.

쾅­

"빨리 와야해에... 지금부터 100까지 셀테니까... 그동안에 돌아와야해에에..."

문 뒤에서 들려오는 수아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

어른들의 술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거실엔 불이 켜져 있었다.

흐름을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거실로 들어가 양해를 구한 뒤 소주 2병을 얻어 낼 수 있었다.

"혹시라도 울 수아가 뭔 짓거리라도 한다면..."

그와 동시에 수아 아줌마에 잔소리도 함께 들었지만 말이다.

슬쩍 시선을 돌려 우리 부모님을 바라봤는데 딱히 큰 관심은 없어 보이는 듯했다.

뭐 그렇다고 실망스럽거나 그러기엔 너무나도 익숙한 반응이라 나도 별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수아 아저씨의 도움으로 겨우 잔소리를 끝낼 수 있었고 나는 그렇게 소주 2병을 가지고 다시 윗층으로 올라갔다.

"..."

당연한 말이지만 윗층은 조용했다.

그리고 그런 조용함 속에서 문득 이런 기대감이 들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혹시 자고 있으려나?"

아랫층에서 아줌마의 잔소리로 대충 15분 정도를 머물렀고 수아는 취해 있었으니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끼이익­

그래서 혹시 몰라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괜히 잠이 들었는데 내가 들어와서 깨면 일이 복잡해 질 테니 말이다.

"... 어?"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수아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소주병을 내려 두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소파에서 자는 진아만 보였을 뿐 방에서 다른 이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짜그작­

"... 이런"

바닥에 있는 과자 부스러기를 밟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보니까 아까와는 다르게 방의 상태가 더럽기 짝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더럽다기보다는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환경 같았다.

'그리고 결국엔 이 범인이 수아라는 건데...'

뭔가가 많이 불길했지만, 그래도 일단 계속 수아를 찾기로 했다.

참고로 윗층에 방은 거실을 빼고 총 3개가 있었다.

즉 다른 방에서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이런 생각이 미치자 나는 우선 침대방으로 들어갔다.

달칵­

"... 여기엔 없어 보이네"

불을 켜고 주변을 둘러 봤지만 아무도 없어 보였다.

다음으론 따로 베란다가 설치된 방을 들어갔다.

역시 불을 켜고 주변을 둘러 봤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몰라 베란다를 열고 바깥을 바라봤다.

휘이이­

"... 에이 설마"

시원한 바람이 내 머리를 스쳐왔다.

아무리 취했다곤 하지만 설마 여기서 떨어지진 않았을 거라 나는 생각했다.

'문을 열었다는 흔적도 안 보이고 난간도 높아 보이니까 뭐'

담배를 피고 싶다는 욕구를 눌러내고 마지막으로 남겨진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쿠쾅­

"...?"

그때 갑자기 무언가 넘어지는 듯한 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서둘러 거실로 나간 나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수아의 흔적은 보이지가 않았다.

"... 이건"

바닥에는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던 내 휴대폰이 빛을 내며 떨어져 있었다.

아마 거실에서 들린 소리는 이 소리였나 보다.

"근데 이게 왜 갑자기 떨어진..."

화악­

순간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나를 강하게 껴안으면서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콰당­

당황한 나는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지만 나를 껴안은 이는 내가 발버둥을 칠 수록 더욱 강하게 나를 껴안았고 결국엔 나는 꼼짝 없이 잡혀 버린 상태가 되었다.

"... 진성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 목소리가 정상이 아니였는데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정상적이였다.

"... 야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거리...!"

"... 왜 안 왔어...? 내가 100까지 센다고 했잖아..."

"그건 너희 아줌마가 날 붙잡아 가지..."

꽈악­

"야야...! 아프다고!!"

어깨에 가해지는 압력에 나는 고통이 느끼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나랑 약속했잖아... 그런데 그 약속을 어기는거야...?"

"아, 알겠으니까 제발 힘 좀 빼!!"

"약속은 중요한거야... 그건 진성이가 어릴 때부터 늘 하던 말이었어..."

"끄으윽...!"

나는 그런 말을 수아에게 한 적이 없었다.

"약속을 어기면 진성이는 벌을 받을 거라고 말했어..."

저 말 역시 수아에게 한 적이 없었다.

"..."

수아가 조용히 내 몸에 올라탄체로 나를 내려다 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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