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음모(7)
* * *
좆 같은 날. 아직 해가 무시무시한 빛살을 내뿜는 낮이지만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들은 그 어떤 하루보다도 피곤하기 짝이 없는 날이었다.
세상에 씨발 아무리 과에서 따를 당해도 그렇지 자기들 인맥의 끈끈함을 과시하기 위해 조별과제를 갈아버린다고? 이거 완전 미친 새끼들아니야.
점수를 버리면서까지 내게 고로시를 먹일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이건 꿈에도 안 나올거다.
"... 좆같네 진짜"
"넌 뭔 남자얘가 입만 열면 욕이 한 바가지가 나오냐?"
"아오 좀 닥쳐 제발"
눈치라고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 행성에 내다던진 은하가 나를 지적하자 나는 은하를 노려다보며 정색을 했다.
'내가 씨발 누구 때문에 욕을 못 줄이는데...'
평상시라면 대충대충 반응을 했을 텐데 기분이 날카로워지다 보니 다소 진심이 섞인 말투로 은하에게 말을 했다.
은하 역시 내 눈빛이 심상치 않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머쓱해하며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욕먹을 건 다 처먹고 그제야 눈치를 챙기는 은하였다.
뭐 저런 은하의 행동이 이제는 익숙하다 보니 나도 별다른 말은 안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 상황에선 의식할 틈이 없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쨍쨍
"..."
"..."
기분도 더러운데 날씨마저 더러우니 이거야 완전 불난집에 부채질을 한다는 행동이 바로 이런걸 뜻하는 것일까?
마음속 밑바닥부터 차오르던 짜증은 차곡차곡 쌓아 올려졌고 결국 최대 한계치까지 오게 된 나는 분을 못 참고 마음속에 담아뒀던 말들을 입으로 쏟아냈다.
"진짜 미친 새끼들인가? 나한테 고로시 먹이는 게 지들 점수보다 중요하다고? 아니 씨발 걔네들은 애미 애비도 없..."
"야야! 아무리 그래도 패드립은 아니지..."
선을 넘는 내 욕설에 은하가 깜짝 놀라하며 나를 말렸고 그런 은하의 행동에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에휴 씨발. 좆 같은 기분이 가라앉지가 않네 진짜"
"... 뭐 걔들이 나쁜 새끼들인건 맞는데... 그래도 나름대로 지들 딴에선 값을 치렀으니 걔들은 정당한 행동을 한 걸로..."
"..."
"... 큼! 쏘리..."
내가 정말 죽일 듯이 노려보자 빠르게 사과하고 황급히 시선을 돌린 은하였다.
이쯤 되면 얘가 정말 눈치가 없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나한테 욕을 처듣고 싶어서 그러는 건지... 뭐 어쨌든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들을 겪으면서 정말로 잠깐 휴학을 때릴지 진지하게 생각이 들었다.
'대충 1년쯤 쉬다 오면 잠잠해 질 것 같은데...'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되고 휴학동안엔 계속 알바를 돌려 돈을 버는 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은데 참 내가 어쩌다 이런 고민까지 하게 된 건지 원.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하며 도로를 걷는 사이 어느새 헬스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시원한 에어컨을 맞을 생각으로 나와 은하는 빠르게 헬스장으로 들어갔다.
딸랑
"으어... 이제야 좀 살겠네"
"... 제발 아저씨 같은 말투 좀 그만하면..."
"응? 아저씨 말투? 아줌마가 아니라?"
"... 그래 아줌마 말투"
은하의 지적에 나는 잠깐 그녀를 노려보다가 빠르게 말을 수정했다.
역전이 되고 꽤 많은 것들은 적응했다고 생각한 나였지만 그래도 가끔 이렇게 무의식적인 말이 나올 때도 종종 있었다.
이거는 내가 바뀌어야 할 문제이니까 넘어가고... 아니 그래도 씨발 아저씨 말투건 아줌마 말투건 내가 뭘 말하려는지는 알 수 있지 않나? 꼬투리 존나 잡네 진짜.
뚝
궁시렁 거리며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은하가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야이 씨발년아. 10연뽑 사면 무조건 이거 뜬다매"
"참나 니 손이 병신인 걸 왜 내 탓으로 돌리냐?"
"그래서 이놈 어떠냐?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했는데 적당히 먹어 볼 가치는 되지 않나?"
욕설과 음담패설로 가득한 목소리가 헬스장에서 울려 퍼졌다.
그런 말들을 매우 싫어하는 나로선 인상을 잔뜩 찌푸렸고 나와 은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데스크쪽을 바라봤다.
데스크에선 알록달록한 머리와 온갖 기괴한 문신들이 그려진 여자들이 세상 편한 자세로 떠들고 있었다.
"어유 진성 회원님, 은하 회원님 오셨어요~"
그리고 저런 양아치들의 사이에서 이나쌤이 눈웃음을 잔뜩 지은 체 우리를 반겨 줬다.
이나쌤의 말에 양아치들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 나를 바라봤다고 하는 게 바른 말일 것이다.
모두가 나를 그윽하게 바라봤고 정욕이 느껴지는 양아치들의 눈빛에 나는 얼굴을 혐오감이 깃든 눈빛을 지었다.
이런 기분. 예전에 호프집에서 진상 손님을 맞이 할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 이분들은 이번에 새로 등록 하신다고 하셔서 제가 상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
"... 역시 오늘도 아무 말 안 하시네요. 뭐 어쨌든 오늘도 운동 열심히 하세요"
그러면서 이나쌤은 다시 자리에 앉았고 양아치들도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시선을 거두었다.
"... 어떡할 거야? 오늘은 그냥 하지 말까?"
"..."
은하가 무심한 말투로 내게 말했지만 나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데스크에 있는 양아치들과 수상할 정도로 아무도 없는 헬스장. 솔직히 너무 대놓고 이나쌤이 뭔가를 꾸민 것 같은데.... 뭐랄까 이상할 정도로 경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지금 헬스장에 나가면 그것 나름대로 이나쌤한테 먹여진 것 같단 말이지'
물론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정말 별것도 아닌 이유이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면 별것도 아닌 이유라서 더 나가기가 싫었다.
이건 이나쌤과 나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그리고 미련하게도 나는 이 싸움에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 아냐 할 거니까 너도 갈아입고 나와"
"... 그래 뭐 알았어"
침묵 끝에 은하에게 운동을 하겠다고 말하자 은하는 별다른 이유를 묻지 않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쟤도 있고 천장에 CCTV도 있으니까 괜찮겠지 뭐'
생각하면 할 수록 점점 더 안정화가 되는 기분이다.
어쨌든 데스크에서 양아치 무리들의 눈길을 한가득 담은 체 나도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들어갔다.
혹시나 숨겨둔 카메라라도 있을까 탈의실을 구석구석 살펴봤지만 딱히 그런 건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에 나왔는데... 데스크에 있던 양아치들이 중앙으로 모인 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오빠 처음 볼 땐 몰랐는데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으니까 꽤 볼 만 한데?"
"씨발 저놈 표정 짓는 꼬라지봐라. 온갖 도도한 척은 다 짓네"
"그게 꼴림의 포인트지 병신아. 원래 저런 새끼가 한번 맛 보면 더 음탕해지는 거 몰라?"
듣고만 있어도 역겨움이 묻어나오는 말투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새끼는 또 어디있는 거야'
고개를 돌려주위를 살폈지만 은하는 보이지 않았고 잠시 은하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까 망설였지만 일단 중앙에 있는 전신 거울로 다가갔다.
뒤에서 낄낄거리는 양아치들을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생각처럼 쉽게 되지가 않았다.
그렇게 늘 하던데로 스트레칭을 시작하니 온갖 음담패설들이 내 귀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와우 오빠 스트레칭 자세가 만점짜린데?"
"그러게 말이야. 이거 내가 살짝 도와주려고 했는데 뭐 딱히 건드릴게 없어 보이네"
"아 씨... 이거 생각보다 훨씬 꼴리는데. 걍 지금 바로 하면 안되냐?"
"기다려 임마. 이나가 카메라 배터리 갈고 온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지는 참아야지"
'... 카메라?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 전만 해도 위풍당당했던 마음가짐은 어디에 갔는지 갑자기 엄청난 경계심이 차올랐다.
'... 씨발 괜히 돼도 안 되는 자존심을 부려가지곤'
아무래도 오늘 오전에 있었던 사건과 더위가 내 평정심을 무너뜨렸나보다.
쟤네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조심스레 뒤쪽으로 물러났다.
덥석
"어이쿠 오빠 어디가세요. 아직 몸이 덜 풀린 것 같은데 벌써 운동하시게요?"
내가 자리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빨간색으로 염색을 한 양아치가 내 팔을 붙잡았다.
"... 이거 놔주시죠"
"에이... 놔주면 도망갈 거잖아. 그것보다도 가까이서 보니까 훨씬 매력있게 생겼는데? 아까 같이 온 새끼한테 몇 번이나 대줬으려나"
"..."
빨간 머리에 손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뒤이어 또 다른 양아치 한 명이 다른 팔을 붙잡아 버렸고 나는 이를 악물고 양아치 새끼들한테 소리쳤다.
"니들 지금, 이거 범죄인 거 몰라? 여기 헬스장에 CCTV도 달려 있다고"
"아아 그거 오늘 작동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기계가 더위를 먹어서 그런지 작동이 잘 안 되더라고"
"그게 뭔 개소리야 씨발. 이거 풀라고 미친년들아!"
"워우 오빠 욕 한번 찰지게 말하네"
"역시 조금 길들이는게 편할 것 같은데?"
퍽
"끄윽...!"
빨간 머리가 내 다리를 치대며 강제로 무릎이 굽혀졌고 나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나를 내려다보는 양아치를 매섭게 노려봤다.
"... 니들 후회할 거야"
"응? 우리가 후회를 왜 해? 앞으로 즐거운 일만 가득 할 것 같은데.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아까 오빠랑 같이 온 그 여자가 오빠를 구하러 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뭐라고?"
"이나 저 미친년이 우리 말고 다른 얘들을 탈의실에 투입해 놨거든. 아마 지금쯤 신나게 처맞고 기절해 있겠지?"
"..."
양아치의 말에 내 얼굴을 빠르게 굳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