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음모(2)
* * *
비록 짧지만 지금까지 내가 봐 왔던 소연쌤은 마음씨가 곱고 운동에 관해선 매우 정열적인 그런 사람이었다.
만약에 사람에게 점수를 매겨줄 수 있다면 나는 서스럼없이 소연쌤에게 100점을 줄 정도로 소연쌤은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만큼 소연쌤에 대한 나의 생각은 긍정적이었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다.
"에이... 너무 그렇게 무서운 눈빛으로만 보지 말아 주세요 소연쌤~ 누가 보면 내가 엄청난 죄를 지은 걸로 보이겠네"
"... 이나쌤. 도대체 뭘 하다 지금 온..."
"어라? 언니가 소연쌤에 별말 안 했어요? 하긴 상관없으려나"
그리고 나는 그런 이상적인 소연쌤이 처음으로 어떤 여자에게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을 보는 중이다.
당황해하거나 얼굴이 굳혀진 모습은 그래도 몇 번 봐 왔는데 이렇게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여자는 처음 보는 여자였다.
대충 행색을 보면 저 여자도 소연쌤과 같은 트레이너인 것처럼 보였는데 약간 뭐랄까 소연쌤과 비교해서 조금 양아치 같은 면이 있는 그런 여자였다.
"아아~ 어쨌든 오늘부터 다시 출근하기로 언니랑 말해 두었으니까 잘 부탁해요"
"..."
소연쌤이 계속해서 잔소리하자 여자는 소연쌤의 말을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억지로 끊어 버렸고 소연쌤은 무섭게 그 여자를 바라봤다.
그런 소연쌤의 모습에 여자 아니 이나쌤이라고 추측되는 여자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신도 똑같이 소연쌤을 째려봤다.
둘 사이에서 다소 무거운 분위기가 형성 되었고 그 분위기는 쉽사리 깨질 것 같지 않아 보였다.
'... 뭐야 이건 씨발'
뒤늦게 사무실에서 나온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둘을 바라보다 일단 아까 PT했던 전신 거울쪽으로 갔다.
저쪽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도 있는 헬스장인데 적당히 하다가 끝나겠지 뭐.
주위 사람들도 그녀들에 관해 관심을 보이는 태세이고 딱히 큰 걱정은 일어나지 않을 거로 생각한 나였다.
'응?'
정말, 아주 정말 우연찮게 이나쌤이라는 여자랑 눈이 마주치기전까지는 말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잠깐 놀란 눈빛을 지은 그녀는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그 자리에서 벗어나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여자의 행동에 소연쌤은 잠깐 당황해했지만 여자가 내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씨발 이거 딱 봐도 뭔가 존나 귀찮은 일이 벌어 질 것 같은 느낌인데 아무래도 느낌이 틀리지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어느새 내 앞까지 오게 된 그녀는 뒤에 소연쌤이 뭐라 하건 말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분이신데... 이번에 새로 등록 하셨나 봐요?"
"..."
"에이... 너무 그렇게 경계 하지 마세요. 저 여기 트레이너예요"
그러면서 자신을 이나쌤이라 소개한 여자는 내가 아무 대답하지 않자 눈꼬리를 스윽 올리며 내 몸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고 나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자기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나쌤! 지금 회원님께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야!"
그렇게 한 마디 할까 잠시 망설이던 찰나에 소연쌤이 버럭 화를 내지르며 이나쌤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이나쌤은 태연하게 소연쌤의 손을 떼어 버렸고 소연쌤이 눈살을 찌푸리던 말던 다시 나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 이런 죄송해요 회원님. 저도 모르게 회원님의 몸 상태를 바라봤네요"
"... 아 네"
직업정신? 무슨 이 지랄하면서 변명을 지껄이는 그녀에게 역겨움이 느껴졌지만 길게 대화하고 싶지가 않아 그냥 알았다고 답했다.
대화가 끊기는 걸 원하지 않았는지 이나쌤은 계속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다행히도 소연쌤이 더 이상 이나쌤이 지랄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었고 PT한다는 명분하에 그녀를 데스크로 쫓아 버렸다.
그런 소연쌤의 행동에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눈빛이 보였지만 그녀도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데스크로 돌아갔다.
"... 휴우 욕보셨네요. 제가 이나쌤을 대신해서 사과 드릴게요 진성 회원님"
소연쌤은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이나쌤에 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걍 양아치 짓하고 다니는 여자인데 헬스장 주인이 친언니라서 잘리지는 않고 가끔 헬스장에 나오는 여자라고 한다.
꼴에 트레이너직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녀가 PT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 씨발 왜 트레이너하는거야?'
그녀가 하는 일은 데스크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거나 운동하는 것뿐. 하여간 세상이 바뀌고 나서 뭔가 병신들도 더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다.
"... 제가 말을 단단히 해 놓기는 할 거지만 만약에 이나가 진성 회원님께 집적거리면 무조건 제게 말해주세요"
소연쌤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소연쌤이 그렇게 말해도 그냥 내가 아무런 반응하지 않으면 저쪽에서도 관심을 끊으리라 생각했다.
어쨌든 그렇게 잠깐의 헤프닝이 있었지만 다시 PT가 시작되었고 이나쌤은 데스크에서 계속 나를 노골적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시선이 어느정도 익숙해진 나에겐 별다른 느낌을 주지 못했다.
***
"하아...
이튿날, 해가 쨍쨍 쪄드는 날씨 속 어김없이 수업을 끝내고 헬스장에 가던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셨다.
교수님이 과제를 내주셨다. 그런데 씨발 하필이면 과제를 내주셔도 조별과제로 내주셨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 내 찌라시가 가라앉을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는데... 어휴 상황이 이렇다보니 그냥 입에서 계속 한숨이 나왔다.
아까 전 조를 짜고 조별 회의를 가졌을 때의 그 오묘한 분위기가 참...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되지 내가 진짜 꼴 보기는 싫은데 팀플 과제는 중요하니 자신들이 억지로 참겠다는 그런 마인드가 비춰졌다.
솔직히 조금 좆같기는 했지만 그냥 잠잔코 있었다.
거기서 나도 똑같이 적의를 드러내거나 그러면 결국엔 나만 손해인 엔딩이 명확히 보이는데 어쩌겠는가.
그나마 다행힌 점은 자기들도 나랑 소통하는 게 껄끄러웠는지 자료 조사나 PPT는 자기네가 만들 테니 나보곤 발표를 하라고 말했다는 점이었다.
이건 나로서도 환영이였기 때문에 넙죽 받아드렸다.
그렇게 터덜터덜 걷는 사이에 어느새 헬스장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딸랑
"안녕하세..."
멈칫
헬스장에 들어서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려다 데스크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말을 멈췄다.
"어? 왜 인사를 하다마세요?"
"..."
"뭐 어쨌든 안녕하세요 진성회원님~ 제 이름은 아시죠? 어제 설명드렸는데"
당연히 소연쌤인 줄 알고 인사했는데 데스크에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이나쌤이 앉아 있었다.
내게 인사를 건네는 이나쌤을 무시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소연쌤을 찾아봤지만 소연쌤은 보이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내 행동을 눈치챘는지 이나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다가오더니 존나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혹시 소연쌤을 찾고 계신거면 아마도 찾지 못하실거예요. 소연쌤, 오늘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헬스장에 오지 않으셨거든요"
"... 아 네"
그러면서 뭔가 자꾸 말을 이어가려는 이나쌤을 무시하고 곧바로 탈의실로 들어 갔다.
저 새끼는 왜 자꾸 들이대는 거지? 아니 그건 그렇고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안거야 씨발 알려 주지를 않았는데.
어쨌든 그렇게 구시렁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에 나왔더니 이게 웬걸 탈의실 앞에 이나쌤이 서 있었다.
설마 이 미친년이 내가 탈의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건...
'... 에이 너무 갔다. 그래도 명색이 트레이너인데 그런 짓을 하겠어'
우연이겠지. 잠깐 탈의실을 지나가다가 타이밍 맞게 내가 나온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너무 날이 서서 민감하게 반응한 것일 수도 있으니.
"흐음..."
그래도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긴 한데... 그냥 대충 무시하면 알아서 넘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나만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만 남녀가 바뀌기 전에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여자의 노골적인 시선은 딱히 그렇게 불편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나쌤을 무시한 상태로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스트레칭을 하던 중 갑자기 뒤에서 이나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우 스트레칭 자세가 너무 엉망인데... 제가 조금 도와 드릴까요 진성씨?"
'진성씨 이지랄을 하고 있네. 내가 니 친구냐?'
"아뇨 괜찮습니다"
"쓰읍 이거 보는 입장에서 조금 많이 불편하네요... 뭐 그래도 진성씨께서 괜찮다고 하시니"
일반적으로 거절을 하자 이나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데스크로 돌아갔다.
물론 데스크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잊지 않고 말이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기분이 매우 나빴지만 될대로 되라 하고 역시 무시하기로 했다.
그렇게 찝찝한 마음으로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을까.
띠익
"후우... 도저히 좆같아서 못해먹겠네"
약 한 시간 가령 지났을 때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무리인 것 같아 그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데스크를 노려 보자 이나쌤이 눈웃음을 치며 내게 미소를 지었다.
'저 미친년은 할 일이 그렇게 없나? 뭔 씨발 하루 종일 이쪽만 쳐다보는 거야'
과 얘들도 나를 노골적으로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무식하게 1시간 동안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미친년이 분명하다.
"어? 벌써 가시게요? 이제 한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이나쌤은 그런 내 모습에 의아해하며 말했다.
너 때문에 지금 가는 거잖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화를 내려 보내고 답하지 않은 체로 헬스장을 나왔다.
스트레스도 풀겸 헬스장을 나왔는데 풀기는 무슨 오히려 껄끄러움만 잔뜩 얻고 나온 기분이다.
"... 씨발"
사실 헬스장을 가는 이유가 낮 시간이 너무 더워 시간을 때울겸 그런 이유도 있었는데 약 한 시간 만에 나오니 날씨는 여전히 쨍쨍거렸다.
지랄 맞게 뜨거운 햇빛을 듬뿍 받으며 나는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