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성수아(3)
* * *
"어 왔냐? 오랜만에보네"
"그래. 유나랑 제수씨는?"
"안에서 기다리고있어"
차에 내리고 식당에 들어서자 식당 입구에서 유나 아줌마가 우리 엄마를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나는 악수를 하는 엄마의 표정을 힐끗 바라봤다.
원래는 아빠와 유나네 아저씨가 서로 고등학교 친구였는데 하다 못해 이것 마저 바뀌었다니.
뭔가 존나 복잡한 인연이 만들어졌을 것 같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얘들도 배고프겠네"
그렇게 우리는 예약된 방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유나도 진아처럼 바꼈을려나?저번에 전화 할 때는 별로 변한게 없어 보였는데.
이제는 나도 뭐랄까 내가 알던 사람들이 어떻게 바꼈을지 기대감이 슬슬 생겨난다.
드르륵
방으로 들어가자 미리 준비된 밑반찬과 식탁에 앉아있는 유나와 유나의 아저씨가 보였다.
나는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자연스럽게 유나의 옆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 응"
일단 겉모습은 변한게 없어 보이고... 근데 왜 이렇게 고개를 숙이는거야? 혹시 얼굴을 다쳤나? 제대로 볼 수가 없네.
유나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게 작은 친구였다.
키부터 시작해가지고 손과 발, 그리고 작은 머리까지 모두 내 기억속 인물과 똑같았다.
'...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크다는게 조금 그렇지만'
가슴은 유일하게 유나가 작지 않은 부분이였다.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성희롱을 많이 들은 편이었는데...
'그 때 어떤 미친 새끼가 유나의 가슴을 만지고 튀어가지고 나랑 뒤지게 싸웠었는데 그것도 이제는 추억이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다 보니 유나 얘도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영 매끄럽게 이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말을 하면 유나가 받아줘야 뭐라도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계속 '응', '아니', '어' 이런식으로만 대답을 하니 원. 솔직히 조금 답답했다.
'씨발 얘는 성격이 바뀐건가? 낯을 많이 가렸어도 나랑 대화할 땐 가리지 않았는데'
내 기억속에 유나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지금의 유나를 바라봤다.
이런말까지 하기는 좀 그렇지만 지금 유나의 모습은 사교성이 없는 찐따처럼 보여 거리감이 느껴졌다.
"맞다 그거 기억나냐?"
"또 뭐가"
"예전에 우리 나중에 자식 낳으면 유나랑 진성이랑 결혼시키자고 했잖아. 그 말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들 커버렸으니. 어때 진성아 우리 유나에게 시집올래? 아줌마 아저씨가 너 손에 물 한 방울도 안 묻히게 해줄게 으하하!!"
"아... 하하"
갑작스러운 아줌마의 말에 나는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벌써 취하셨나보다.
그나저나 유나 얘는...
"어이구? 언니 얼굴 좀 봐라? 무슨 화산도 아니고 얼굴이 막 터질 것 같은데?"
"..."
유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상태였지만 저 귓볼만 봐더라도 얼굴이 얼마나 시뻘개졌는지 파악이 되는데 아니 딱 봐도 아저씨가 장난식으로 말한 건데 얘는 뭐가 부끄럽다고 이러는 거야? 덕분에 나만 민망해지네.
드르륵
"... 저 화장실 좀 갔다 올 게요"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유나는 이 말을 끝으로 급하게 방을 나갔다.
상황을 보니 오늘은 더 이상 유나랑 대화를 나누기엔 무리일 것 같다.
솔직히 수동적인 유나의 태도가 조금 섭섭했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드르륵
"뭐야 넌 또 어디가"
"화장실"
유나가 나가고 얼마 안 있어 진아도 방을 나갔다.
나가기 전 뭔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는데 그 표정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껴졌다.
그렇다고 내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갈 수도 없는거고 제발 이상한 짓거리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졸지에 혼자가 된 나는 조용히 밥을 먹으며 옆에서 말하시는 어른들의 대화를 훔쳐 들었다.
지금까지 유나를 만나면서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낀적이 없었는데 왠지 모르게 조금 쓸쓸했다.
그렇게 잠시 후.
드르륵
"뭐야 왜 이렇게 늦게와?"
"오빤 몰라도 돼. 그렇지 언니?"
"으응..."
유나와 진아가 같이 들어왔다.
화장실을 갔다 왔기엔 조금 많이 늦게 들어왔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진아에게 다가갔다.
"... 야 너 유나한테 뭐 이상한 말 한거 아니지?"
"에이... 나는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성격인거 몰라? 그런거 안 했으니까 걱정 노노~"
말을 그렇게 해도 뭔가 꺼림직함이 느껴지는데...
다시 자리로 돌아와 힐끗 유나를 봤다.
시뻘겠던 얼굴은 가라 앉았지만 이제는 창백하기가 짝이 없었다.
"... 혹시 진아가 뭔 말 했어?"
"... 아니 아무것도..."
씨발 누가 봐도 거짓말 같은데...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으니 뭐라 말 할 수도 없고.
아무리 눈치를 줘도 유나와 진아는 화장실에서 뭔 얘기를 했는지를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 에이 뭐 별일이야있겠어??'
결국 지쳐버린 나도 더 이상 이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아마 별일은 아닐 거다. 아마도...
***
"그래 얘들아 공부 열심히 하고 다음에 또 보자~"
"안녕히계세요"
어른들은 인근 지하철 역에서 우리를 내려주고 자기들끼리 술을 마시러 가셨다.
어처피 나와 진아, 그리고 유나 모두 대학생이니 차라리 이렇게 헤어지는 편이 낫겠지.
"... 그럼 우리도 여기서 헤어질까...?"
머리를 긁적이며 유나에게 말했다.
나랑 진아의 대학이 위쪽에 있는 반면 유나의 대학은 아랫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가는 길이 갈렸다.
그때까지도 유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게 근데 내가 싫어서 그런 거야 아니면 뭐 때문에 이러는건지 참... 뭐라도 알아내고 싶은데 말을 하지 않으니 원.
"언니 우리 간다~?"
"큼! 공부 열심히 해라? 이따가 전화할게"
진아가 먼저 인사를 하자 나도 유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쉽지만 나중에 전화라도 해야지. 어쨌든 그렇게 인사를 끝내고 짧은 만남이 끝나나 싶었는데,
"자, 잠깐만!"
"어어?"
갑자기 유나가 내 팔을 잡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처음으로 나는 유나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
"왜?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아니 그..."
내 말에 유나의 커다란 눈망울이 미친 듯이 흔들렀다.
아니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뭘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 거야? 어휴 존나 답답하네.
"... 모처럼 만났는데..."
"..."
"조금만 더 얘기하지 않을... 레?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작은 키로 어쩔 줄 몰라하는 유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은 마치 작고 하찮은 팽귄처럼 보였다. 솔직히... 귀여웠다.
마음과 같아선 저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그런...
'어우 씨발 뭔 생각을 처하는거야 병신아!'
나도 슬슬 미쳐가나보다. 정신을 차리고 유나에게 말했다.
"... 그래 뭐. 그럼 저 앞에 카페라도 갈까?"
"... 으응"
그래도 다행히다. 솔직히 이대로 헤어지기엔 아쉬운 감이 있었는데 이제는 대화가 어느 정도 통할 것 같아 보였다.
얘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자연스럽게 말고리가 다시 트겠지.
"에휴... 오빠만 아니였어도 한 대 치는건데"
"... 넌 또 뭔 개소리를 짓거리냐?"
"난 몰라요~ 어쨌든 둘이서 즐거운 시간 보내. 난 내일 아침에 수업이 있어서 먼저 갈게"
옆에서 존나 띠거운 눈빛을 보내는 진아였지만 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빠르게 사라졌다.
저 새끼도 나중에 어떻게든 손을 봐야겠다.
"우리도 가자"
"... 응"
어쨌든 그렇게 나와 유나는 역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대화는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 그래서 이랬거든"
"... 멋있네 그 사람..."
서로의 대학 생활부터 시작해 가지고 어릴 때 있었던 이야기까지, 이게 역전이 돼서 그런 건지 생각보다 나눌 이야기가 굉장히 많았다.
'기억들이 전부 뒤바껴 버렸으니 그럴 만 하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서로 어색했던 감정들은 없어진지 오래였다.
유나는 더 이상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비록 약간의 낯설음이 조금 보이긴 했지만 오히려 놀리는 재미가 있어서 즐거웠다.
"... 이제 그만 일어나자. 사실 나도 내일 아침에 수업이 하나 있어서..."
"아! 혹시 내가 너무 잡아놓은거야...?"
"아니 그런건 아니고"
저녁 9시. 돌아가면 11시가 될 시간이다. 이즈음에서 헤어지는게 좋다고 판단해 우리는 카페를 나왔다. 우리는 역까지 말없이 걸었다.
"그럼 오늘 즐거웠고 나중엔 밥이라도 같이 먹자"
마침내 역에 도착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유나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마음과 같아선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집에 가서 전화라도 해야겠다.
그렇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이제는 정말로 헤어지려고 했을 때,
"... 그 진성아!"
"... 어? 왜"
또 다시 유나가 내 어깨를 잡았다. 무언가 잔뜩 망설이는 듯한 표정이다.
나는 그런 유나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유나를 바라봤다.
"... 너 여자친구 있어?"
"여자친구? 아니 없는데"
갑자기 웬 여자친구? 내 성격상 내 기준에서 여자친구 만들기가 어렵다는건 잘 알텐데?
"... 사실 아까 게장집에서 진아예게 들었는데"
"...?"
뭔가 불길하다. 게장집이라면 유나랑 화장실에서 있을 때 들은 얘기 같은데... 무슨 말을 들은거지?
한참에 망설임 끝에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너 진짜... 금발머리의 양아치 여자랑... 잤어?"
유나가 나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