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서은하(2)
* * *
알바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낮 보다는 온도가 확실히 떨어져 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후덥지근했다.
"...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까"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시원한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까 아이스크림을 먹기는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않은가.
그렇게 잠깐 망설이다가 나는 결국 저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이 동네는 다 좋은데 그 흔하다는 아이스크림 할인점이 없는게 흠이다.
만약에 할인점이 있었더라면 한번에 몇 십개씩 사가지고 냉장고에 넣어둘텐데.
딸랑
"어서오세요"
새벽대에 편의점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편의점도 나와 알바를 하는 여자 밖에 없었고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고요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대충 알바에게 고개를 까딱거리고 아이스크림이 있는 코너로 가서 신중하게 내가 먹을 것을 골랐다.
"... 씨발 먹고 싶은 것도 없네"
편의점 아이스크림은 가격도 창렬인 주제에 이상할 정도로 종류가 한정적이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며 뒤적이다가 결국 딸기 아이스크림 하나를 고른 체 카운터로 갔다.
딸랑
'응?'
"어서오세요"
그 때 또 다른 사람이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 사람 의상이 심상치가 않았다.
검은색 모자와 검은색 마스크, 그리고 검은색 코트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은 차림새였다.
'저 새끼는 무슨 배트맨인가? 왜 옷을 저렇게 쳐 입었지?'
딱 봐도 나 수상한 사람이요라는 분위기가 강하게 풍겨졌지만 뭐 어쩌면 이것도 선입견일 수도 있으니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어쨌든 그렇게 아이스크림과 담배를 한갑 구매하고 나는 편의점을 나왔다.
역시 지칠때는 입 속에 뭔가 달콤하거나 시원한게 들어가야 제맛이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은 다음에 바로 피는 담배는 언제나 옳았다.
"하아... 씨발"
천국이다. 그래 이게 천국이지. 천국이 뭐 별거 있나? 이런 소학행도 천국의 열쇠가 되는...
부스럭
"응?"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뭐지? 분명 인기척이 느껴졌는데?'
"... 씨팔 너무 열심히 일해서 감각이 예민해졌나?"
반쯤 태우던 담배를 발로 지지면서 알 수 없는 오싹함이 느껴졌다.
그냥 빨리 고시원으로 돌아가는게 좋을 것 같아 속도를 올렸지만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역시 내가 예민했던 것인가?
어쨌든 그렇게 돌아온 고시원에서 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 입은 뒤 나는 힘 없이 이불 위로 쓰러졌다.
호프집에서 내색은 안했지만 오늘 있었던 일이 솔직히 힘들었기는 했다.
"..."
좀비처럼 쓰러진 상태 그대로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또 어떤 주제로 얘들이 지랄을 할...
"... 어라?"
생각치도 못한 사람에게 메세지가 와있었다. 의아함을 가다듬고 나는 발신인의 이름을 멍하니 바라봤다.
"서은하...?"
그렇다. 서은하가 내게 톡을 보낸 것이었다.
본래라면 아무런 생각 없이 톡방을 삭제할 나였지만 호감 스택이 쌓여있어서 그런지 나는 일단 메세지를 눌렀다.
[자냐?]
간단한 물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싱숭생숭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무난하게 대답을 하기로 했다.
아니 왜
[그럼 뭐하는데]
그냥 누워있는데
[누워있다고? 누구랑?]
음... 역시 괜히 답장을 한 것 같다. 지금이라도 차단을 박을까?
"... 에휴 이년한테 답장을 보낸 내가 병신이지"
잔다
[야야 농담이야. 농담이라고]
진짜 존나 이해가 안되네. 저렇게 병신 같은 말을 지껄이면서 왜 남자 새끼들은 저년이 좋다고 달려드는거지? 내가 보기엔 그냥 저질로 밖에 안 보이는데. 외모 떄문인가?
사실 이대로 무시하고 잠을 잘 수도 있었지만 결국 어찌어찌 하다보니 계속 서은하와 대화를 주고 받게 되었다.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나는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서은하의 과거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어봤다.
[뭐? 내가 신입생 4명이랑 떡을 쳤다고? 그건 뭔 개소리야]
[남자를 이틀에 한 번씩 갈아치워? 아니 씨발 누가 그딴 말을 한거야? 들으면 들을 수록 어이가 없네?]
아니야?
[너는 그걸 믿냐? 세상에 그런 짓을 하는 미친년이 어디있어]
상식적으로 그렇긴 한데 그럼 지금까지 내가 들어온 소문들은 모두 진실이 아니었나?
아니 뭐 일단 나부터가 떠돌아다니는 소문만 들었기는 했는데... 큼! 어쨌거나 서은하는 그렇게 자신은 억울하다며 자기는 그런 문란한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고 내게 답했다.
그리고 나도 어느 순간부터 서은하의 말이 믿음직스럽게 들려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서은하의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호프집에서 서은하가 그 미친년을 테이블 위로 처박았을 때 부터 슬금슬금 없어지기 시작했으니. 이렇게 자기가 아니라고 말을 하는데 그럼 믿어야지 뭐.
[야. 넌 근데 이상형이 뭐냐?]
갑자기?
[궁금하잖아. 철벽의 남신이라고 불리는 네가 어떤 이상형이 있을지. 아니면 너 설마 그쪽 취향이냐?]
"..."
그래도 서은하는 병신이 맞다. 아니 영원히 이년은 병신일 것이다.
대충 착하고 바람 안피는 여자
[으음... 그렇구나]
이쯤되면 나도 진지하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냥 미친척하고 아무 여자나 사겨봐?
저번에 후배에게도 들었지만 저 철벽의 남신이라는 말을 들을 때 마다 입에서 욕짓거리가 나오네.
그 뒤로도 나와 서은하는 꽤 오랜 시간동안 톡을 주고 받았다.
보니까 얘가 말을 저급하게 할 뿐이지 그렇게 나쁜 얘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새벽은 빠르게 지나갔다.
***
"야 유진성"
"... 뭐야 너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충혈된 눈으로 강의실에 들어온 나는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맨날 시작하기 5분전이나 지각을 밥먹듯이 했던 얘가 보였으니 놀랄만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의상도 크게 달라졌다. 평소에 입던 파격적인 의상이 아닌 정말 건전한 옷만을 입은 그녀는 나를 두 번 놀라게 만들었다.
"어? 일루오라니까?"
서은하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아마도 자기 옆에 앉으라는 뜻이겠지.
"... 됐다"
하지만 나는 일부로 다른 자리에 앉았다. 서은하 저 병신은 모르겠지만 저년이 내게 인사를 한 후로부터 주위에서 불편한 시선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씨발 대체 뭔 심보를 가지면 인사만 해도 이 지랄을 하는거야 저 새끼들은.
"정말 안 와? 그럼 내가 가지 뭐"
그렇게 서은하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이새끼는 몇 번 대화 나눈걸로 너무 친한척 하는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떼어넬 이유도 없고... 그냥 냅두기로 했다.
"... 너 근데 스타일이 확 바껴버렸다? 원래 노출도 많은 옷만 입었잖아"
"아, 아닌데? 나 원래 이런 옷들을 선호했는데?"
이건 또 뭔 지랄이야. 그럼 내가 지금까지 봐온 서은하는 다른 서은하냐?
어이가 없어서 서은하를 바라보자 서은하도 자기가 한 말이 어이가 없었는지 시선을 돌렸다.
"그... 이상하냐?"
역시 자기도 이런 옷이 어색했나보다.
고개를 푹 숙이며 애써 아닌척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음... 전보다 훨씬 괜찮아 보이는데..."
"정말?"
"근데 뭐라고 해야되지? 너 같지 않다고 해야되나?"
맨날 브라가 다 들어나는 옷에 짧은 핫팬츠만 입은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청순해 보이는 옷을 입으니 솔직히 괴리감이 느껴지기는 했다.
뭐 그렇다고 그게 마음에 들었다는 건 아니지만.
내 말에 살짝 입고리가 올라갔던 서은하는 이어지는 말에 다시 입고리를 내렸다.
"그럼 별로야?"
"아니 그건 아니고... 아 걍 네가 알아서 처입어. 내가 입는 것도 아닌데"
집에 츄리닝 밖에 없는 패션 고자에게 왜 패션에 대해서 묻는거야? 지 주위에 인싸 새끼들한테나 묻지.
"... 큼! 뭐 알겠고 너 오늘 시간되냐? 밥이나 같이 먹자"
"갑자기?"
"우리 사이에 밥 한끼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지않냐?"
"..."
뭐지? 이 말에 의도는? 물론 밥 한끼 정도는 먹을 수 있지만... 그래도 너무 뜬금없지않나?
"... 그래 뭐 이따 저녁이나 먹자"
뭔가 수상하기는 하지만 딱히 거절한 명분도 없고... 그냥 받아주기로 했다.
설마 뭐 이상한 짓이라도 하겠어?
"정말? 그럼 이따 7시쯤에 전화 걸테니까 받아라?"
"그러던지"
요즘들어 서은하에 대한 관념들이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
내 말에 서은하가 미소를 지었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미소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벌컥
"아이고 죄송합니다. 오늘은 조금 늦어버렸네요"
교수님이 들어오고 대화는 그렇게 끝을 내렸다. 하지만
'씨발... 존나 거슬리네'
수업 시간 동안 계속 나를 꼬라보는 서은하의 시선에 나는 다시는 이새끼랑 같이 앉지 않겠다고 남몰래 다짐을 하였다.
역시 강의는 혼자서 듣는게 제일 좋은 것 같다.
똑똑이고 나발이고 그냥 나랑 맞지 않은 얘가 옆 자리에 앉으면 그것 만큼 곤혹스러울 수가 없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