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적응하기
* * *
"쓰읍..."
입안에 차가운 커피 들어가니 그제서야 정신이 바짝 들었다.
역시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을 땐 뭔가를 처먹으면 조금이라도 해결이 되는 것 같다.
'그나저나 여기도 뭔가 분위기가 바뀐 것 같네'
주위에서 알 수 없는 어색함이 느껴졌다.
대학가 근처에 있는 카페라 주로 남녀 커플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지금 내 옆 테이블에 있는 저 커플만 하더라도 여자쪽이 리드하는 분위가 풍겨졌다.
어쨌거나 머리를 식히는 동안 내가 파악한 정보는 이랬다.
1.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녀간의 지휘? 성격?이 뒤바꼈다. 그리고 나는 바뀌지 않았음.
2. 군대 때문에 휴학을 한 일은 그냥 내 개인사로 휴학을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3. 어제 군대에 간다고 지랄을 떨던 상민이 그 새끼는 여자친구가 군대에 간다고 한다.
4. 상하차 실장님 번호는 없는 번호로 뜨고 그럼 그동안 상하차를 하지 않았다는 건데 돈은 왜 들어와있는거지? 이건 또 무슨 설정 붕괴야?
"일단 대충 이정도려나?"
펜을 만지작 거리며 노트를 바라봤다. 이렇게 보면 딱히 뭐 내 삶에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은데?
'... 씨발 주위에서 빨리 갔다오는게 무조건 좋다고 지랄해서 일찍 갔는데'
남자가 군대를 안 간다는 건 조금 베알이 꼴리기는 했지만...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최대한 미루는거였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그놈 하는 짓이 여우나 다름 없다니까? 자기는 그런 놈들한테 넘어가지 않을거지"
"물론. 내가 너 말고 어떤 남자를 사랑하겠어?"
컵에 남아있는 얼음을 아그작 거리며 옆에 있는 커플의 대화를 몰래 경청했다.
남자는 다소곳한 자세로 열심히 누군가를 흉보고 있었고 여자는 무슨 대장군인 마냥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아무래도 남녀간 위치가 바뀐 만큼 성격도 바뀐 것 같다.
'저 새끼는 화장을 무슨 가부키처럼 칠한거야?'
평소에 흔히 볼 수 없었던 남자의 화장은 생각보다 많이 역했다.
더 이상 보기가 싫어 고개를 돌리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뀐 삶에 적응을 해야 되겠지만 차마 화장이나 저렇게 심하게 꾸미는 행동은 못 할 것 같다.
"그나저나 하던 상하차가 사라졌으니 알바도 다시 구해야 되는데..."
생각해보니 이것도 마이너스 요소다. 보니까 남자 상하차를 뽑는 곳이 없었다.
힘들지만 경제적인 면에선 상하차가 정말 컸는데 어쩔 수 없지 다른 알바를 찾는 수 밖에.
그래도 아직까지 여유돈이 있어서 당장 굶거나 그러지는 않지만 최대한 빨리 찾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대충 이정도 돈이면 두 달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이다.
"... 헬스장도 가야 되는데"
문득 아직 3개월치나 남은 헬스장이 생각났다.
잠깐만 거기 여자회원들이 아줌마들 밖에 없던 걸로 아는데 이건 또 어떻게 되는거지?
스윽
벽에 붙어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원래라면 오늘 상하차가 있어서 적당히 휴식을 취해야 하지만 이젠 상하차도 없겠다 기왕 생각한 김에 헬스장이나 가보기로했다.
대충 나머지 얼음들을 입 속에 모두 털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여기가 헬스장이라고?"
세상에 대충 예상은 했지만 막상 정말로 예상이 현실이 되어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뜨아악...!"
"쉰 다섯, 쉰 여섯..."
정말로 헬스를 하는 사람들이 전부 여자였다.
저기 옆에서 벤치프레스를 조지고 계신 여성분은 나보다 팔뚝이 더 두꺼우셨고 헬스장 특유의 신나는 노래와 더불어 여성들의 거친 호흡 소리의 나는 순간 멍해졌다.
우당탕탕
어쨌든 그렇게 멍하니 헬스장 내부를 둘러보고 있던 중 어디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앗! 어서오세요. 처음보는 분이신데 새로 등록하시러 오셨나요?"
"네?"
그리고 잠시 뒤 선명한 11자 복근에 팔뚝에 문신이 그려진 여자 한 명이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이거 아무리 봐도 PT트레이너 같은데... 전에 있던 형들이 모두 여자가 되어 버린건 아닐 테고 아에 사람이 바뀐건가?
'잠깐만 그럼 헬스장을 다녔던 일도 모두 없던 일이 되버린거야?'
이건 좀 아까운데. 아직 6개월치를 끊고 반 밖에 나오지 못했다.
일단 혹시 모르니까 앞에서 싱긍벙글 웃고있는 PT트레이너에게 한 번 물어봐야 될 것 같다.
"저 예전에 등록을 했는데 혹시 등록이 안 되어있나요?"
"네? 회원님이세요?"
PT트레이너는 내 말에 깜짝 놀라하더니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카운터에 있는 컴퓨터를 뒤졌다.
그리고 잠시 후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내가 예전에 적었던 회원 가입서를 내게 보여줬다.
"회원님이셨네요...? 그런데 3개월을 결근하신..."
"..."
지랄을 하네. 도대체 어떤 미친새끼가 남자와 여자를 처 바꿨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 새끼는 나사가 하나 빠져있을거다.
'바꿀려면 좀 제대로 바꾸던가 무슨 땜방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아직 3개월치가 남아있다는 것은 다행히라 생각했다.
앞에서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PT쌤의 모습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입을열었다.
"아 네. 개인 사정 때문에... 그럼 오늘부터 다녀도 될까요?"
"네? 네 물론이죠. 보니까 회원님 PT시간이 화요일 목요일이니까 지금 바로 받으셔도 괜찮아요"
PT? PT는 신청 안했는데?
"제가 PT를 신청했어요?"
"네. 여기 보시면 화, 목 오후 4시부터 5시. 이렇게 적혀 있네요"
나는 어리둥절해 하며 트레이너쌤이 건네준 가입서를 자세히 들여다 봤다.
정말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것도 설정 오류인가? 뭐 어쨌든 그 비싼 PT를 무료로 받게 되었으니 이건 좋은건가?
"어떻게 지금 하실까요?"
트레이너, 아니 자신을 소연썜이라 소개한 여자는 자신 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탈의실로 들어갔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끄으윽!!"
"회원님! 무릎을 더 구부리고 엉덩이를 쭉 내미셔야 됩니다. 스쿼트는 이쪽하고 여기 다리가 땡기는 느낌이 나야 돼요! 다시 10번만 더!"
가혹한 내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리가 터질려고 하는데 옆에서 엉덩이를 더 내밀라고 말하는 소연쌤이 악마처럼 보였다.
"으허허헉....!"
이 사람, 좋게 말하면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되게 깐깐한 사람이다.
어떻게 자세가 하나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하지? 원래 PT를 이렇게 빡세게 하는건가?
"허억... 서, 선생님... 더 이상은 못 할 것 같은데..."
"아직 뭐 한 것도 없으신데..."
저 눈빛을 봐라 사람하나 잡아 먹겠네.
그리고 한게 뭐가 없어 스쿼트만 100개를 한 것 같은데 이게 한게 아니라고?
"아니지 아니지. 회원님 제가 말했잖아요 엉덩이를 이렇게 쭉 내미셔야 된다고요. 지금 그렇게 대충 하시면 관절만 나빠질 뿐이지 운동 효과는 하나도 못 느껴요"
아니 씨발 분명 그렇게 했는데 뭐가 문제라는건데. 여기서 엉덩이를 어떻게 더 빼라는거야.
"어어...? 코치님?"
"잠시만 실례할게요"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소연쌤이 내 엉덩이와 허리를 잡고선 교정을 하기 시작했다.
"네. 바로 이 자세에요 회원님. 이제 뭔지 대충 감이 오셨지요?"
느닷없는 스킨쉽에, 아니 물론 이건 트레이너로서 올바른 자세를 알려주기 위한 스킨쉽이지만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물론 소연쌤이 손을 놓자마자 힘없이 쓰러지는 내 모습에 당황스러움은 금세 허탈감으로 바뀌었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쓰러진 자세로 숨 쉬기에 온 힘을 다하고 있을 때 소연쌤이 내게 물통을 건내주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래도 생각보다 끈기가 있으시네요"
"허억... 허억... 네?"
"보통 처음 등록하시는 회원님들, 그러니까 젊은 여성 회원님들도 별로 오래 못 버티시는데 회원님 정도면 되게 잘하신 편이에요"
"..."
소연쌤에 말을 멍하니 듣다 또 다시 의문이 들었다.
남녀가 바뀌고 나서 여자가 남자보다 힘이 훨씬 강해졌는데 그럼 혹시 나도 힘이 약해진건가?
"저 코치님. 혹시 저 중량좀 재주실 수 있으세요?"
"네? 중량이요?"
남녀가 바뀌기 전 우연히 헬스장에서 만난 한 헬창의 도움으로 중량을 재본적이 있었다.
만약 내가 힘이 약해졌다면 중량도 크게 줄어들었겠지? 이건 조금 중요한 문제이다.
아직 내 머릿속엔 남자가 여자보다 강하다는 것이 뇌리에 박혀있으니 대충 그런 생각만 가지고 괜히 들이대다가 큰일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내 중량이 줄어들었다면...'
분명 좋은일은 아닐 것이다.
남녀가 바뀌고 나발이고 순수 힘이 줄어들었다는데 그게 무슨 장점이 있겠는가.
"..."
어쨌든 소연쌤은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 주었고 잠시 뒤 나는 소연쌤에 도움을 받으며 중량을 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당혹스러움에 잠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