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184화 (184/186)

184     12. 끝과 시작

남일은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나이수를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다.

한창 전성기 시절에 만났더라면 오히려 떠받들었을 인사였겠지만, 안타깝게도 남일이 나이수를 만났을 때는 특유의 총명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고집만 생긴 상태였다.

그러나 그 고집의 형태를 남일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나이수가 남일과의 대화를 녹음한 사실을 알았을 때는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이 녹음에 나이수 씨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불법은 아닙니다.”

갑자기 날아온 출석 요구서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남일은 나이수가 스스로 증거를 만들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수는 남일보다 더 인생을 오래 살았고, 더러운 물에 손을 많이 담가 본 인사였다.

‘그렇다고 자기가 저지른 일의 증거를 만들어 놔?’

남일은 황당했지만, 어떻게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하였다. 강우형의 일로 손을 잡은 사이이니 강우형의 일로 손을 놓을 수도 있는 거였다. 나이수는 남일이 배신할 순간을 늘 생각하였고, 그래서 범죄의 증거를 만들어 놓았다.

음성 녹음한 파일을 들으니 나이수가 어떤 말로 자수를 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공범이라뇨. 말도 안 됩니다.”

“그날의 일을 다 기억하십니까?”

남일은 입이 바짝바짝 말라 오는 것을 느꼈다. 그날의 일이야 다 기억한다. 강우형을 이유로 장준환이 자신을 쳐 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남일은 곧장 나이수에게 달려가 강우형의 계획에 대해 나이수에게 털어놓았다.

문제는 나이수가 나이를 먹으면서 사리 분별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거였다. 더불어 남일과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기에 판단력도 흐려진 상태였다. 여기서 남일이 잘못한 게 있다면 그 흥분한 상태를 부추겼다는 거다.

“하지만 진짜로 죽일 줄은 몰랐습니다.”

남일은 진심으로 억울하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강우형이 그렇게 간 것에 대해 시원한 게 가장 컸다. 하지만 그 마음은 필사적으로 감춰야 했다.

“그런 것치고 너무 자세하게 죽일 방법을 알려 주었는데요?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나길 바랐던 사람처럼요.”

남일은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하였다. 옆에 있던 변호사도 그를 종용하였다. 엘 엔터테인먼트 자체 내에도 변호사가 따로 있기는 하지만, 남일은 이왕 이렇게 된 거 큰돈을 들여 대형 로펌 변호사를 고용하였다.

“애초에 말한 사람보다 그걸 행동한 사람이 잘못 아닙니까?”

변호사의 말에 남일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변호사도 딱히 남일의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외에는 증거가 없어 무사히 빠져나오긴 했지만, 나오자마자 하는 말이 남일을 놀라게 하였다.

“정말로 관여 안 한 거 맞습니까?”

“안 했다니까요.”

“다른 사람은 속여도 저를 속여서는 안 됩니다.”

남일은 그 말에 등골이 다 서늘해졌다. 하긴 이해는 되었다. 녹음된 거만 보면 너무 구체적이고, 체계적이었다. 이전에 그런 식으로 일을 저지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솔직히 나이수가 자수만 하지 않았어도 묻어 두고 넘어갈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남일은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믿겠습니다. 법정까지 서게 되면 무죄 주장하겠습니다.”

최악으로 가면 살인교사까지 갈 수도 있지만, 달리 대형 로펌 변호사가 아닌지 빠져나갈 구멍이 있기는 한가 보다. 남일은 확신하는 변호사의 목소리에 일단 한숨 돌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이었다. 회사 앞으로 가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남일의 비서진이 남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전화 울리는 소리에 남일은 귀가 터질 것 같았다. 기자들이 어떻게 안 건지 온갖 부서로 전화를 하는 바람에 회사 전체가 시끄러웠다.

“전화를 안 받으셔서 걱정했습니다.”

“잠깐 끄고 있었어.”

남일은 꺼 둔 핸드폰을 꺼내 켰다. 그러자 전화가 얼마나 많이 온 건지 부재중 통화가 100개가 넘어갔다. 기자들의 전화가 대부분이었고, 나머지는 남일과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이었다.

“아주 신이 난 모양이군.”

남일은 우선 회장실로 가서 상황 파악을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명훈을 불렀는데 명훈도 전화에 시달렸는지 눈그늘이 턱 아래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그래도 그나마 이 회사에 믿을 사람이 명훈밖에 없어서 남일의 마음이 살짝 풀어졌다.

“검찰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걱정하지 마. 혐의없음 받을 거니까.”

남일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명훈은 다행이라는 듯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남일을 의심하는 중이었다. 남일이 검찰에 가기 전에 무슨 일로 소환당한 건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오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남일의 반응을 보니 영 수상했다.

억울하게 불려 간 것과 아닌 것의 차이를 명훈은 알았다. 남일의 반응은 후자였다.

‘지난번에 봤던 싸한 눈빛이 그냥 나온 게 아니야.’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냐고 물었던 남일의 질문이 떠오르면서 명훈은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심인 것 같더니마는 맞는 것 같다.

‘수한이가 면접이라도 보자고 해서 다행이지.’

실력만 보겠다고 한 말을 동현에게서 전해 들었다. 명훈의 예상대로 시간이 지나니 수한의 마음도 풀어졌다. 명훈은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남일이 검찰에 소환된 것을 보고 오히려 빠르게 갈아타기를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완전히 합격 통보를 받아야 넘어갈 수 있으므로 일단은 남일의 곁에 있어 보기로 하였다. 털털한 척하여도 남일의 뒤끝이 꽤 긴 걸 명훈이 가장 잘 알았다. 우선은 최대한 감추는 게 좋았다.

“기사들은 어떻게 할까요?”

“허위 사실 유포 시 다 고소할 테니까 절대 아니라고 해. 그리고 기자들에게 제보한 사람 알아봤어?”

“알아보는 중입니다.”

남일은 말 안 해도 뻔하게 나이수가 떠올랐지만,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이 상황에서 나이수를 언급하는 건 좋지 않았다. 차라리 최대한 피해자인 척하는 게 그의 이미지에 좋았다.

‘여기서 뭔가 더 있는 건 아니겠지?’

남일은 불안하여 다른 일은 제쳐 두고 장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장준환은 무슨 일인지 또 전화를 받지 않아 남일을 불안하게 하였다.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까 봐 한식당 앞에 사람을 두었기에 남일은 차라리 그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

“모든 게 김 대표의 계획대로 되었네요. 물론 서 대표까지 한 번에 잡기는 힘들겠지만, 그건 차차 다시 진행하면 되니까요.”

“역시 힘들겠죠?”

“힘들 거예요. 난 또 나이수 그자가 자신만만하길래 어떤 건가 했는데 그로는 부족했네요.”

수한은 앞에 있는 술병을 들어 장준환의 빈 잔을 채웠다. 나이수가 자수를 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했지만, 문제는 남일이었다. 강우형의 건으로 끌고 가기에는 남일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비록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는 했지만, 나이수가 실제로 행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도 말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장준환은 남일에게 더 크게 분노하였다. 남일이 연관되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면 공범이나 다름이 없었다.

“언제 이런 방법까지 생각한 걸까요?”

“해 본 적이 있으니까요.”

“네?”

장준환의 말에 수한은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남일과 관련된 그 소문이 사실이란 게 아닌가? 수한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장준환을 쳐다보자 장준환도 검찰 쪽 인사와 친분이 있어서 전해 듣게 되었다고 하였다.

“증거를 못 찾아서 결국 못 잡아들인 거네요?”

“그렇죠. 근데 비슷한 상황이 똑같이 펼쳐지니 확신이 드네요.”

“그쪽 사건은 공소시효가 끝난 거죠?”

“그러니까 이런 일을 주저하지 않고 행한 거겠죠.”

법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결국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쫓겨나게 하거나, 엘 엔터테인먼트를 망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서남일 그 친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김 대표는 지금 하는 일에만 집중해요.”

“네. 알겠습니다.”

수한이 능력이 좋다고 생각하는 건 벌써 장준환의 돈을 반 이상이나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한 5년은 예상하고 투자한 금액이었는데 그보다 더 빨리 돌려주게 생겼다.

‘강우형 그 친구도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새 기획사를 차리게 도와줄 걸 그랬어.’

그랬다면 이렇게 허망하게 죽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장준환은 어떻게서든 남일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생각에는 동의하기에 수한은 술 한 잔 더 마시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더 이야기하다가 장준환과 헤어졌다.

***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들 퇴근하시죠.”

워낙 밤낮없이 일하는 회사라 그런지 야근이 기본이 되었다. 그래도 표정이 밝은 건 야근수당이 제대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주혁의 콘서트가 끝나면 제대로 휴가를 보내 주겠다고 말하여 다들 휴가만을 기다리며 참기로 하였다.

“이만 들어가 보시게요?”

“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예진이 준 홍삼이 이럴 때 위력을 발휘하였다. 수한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바로 집에 가려고 했다. 그러나 수한은 그전에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선배님?”

왜 이 자리에 명훈이 있는 건지 수한은 이해하지 못했다. 명훈도 수한이 알아본 것을 알아챈 건지 급하게 와서는 차 쪽으로 수한을 데려가 몸을 최대한 숨겼다. 무언가 조심스러워 보이는 몸짓에 수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면접 날은 이번 주 금요일이잖아요.”

“서남일이 나한테 시킨 일을 할 수 없어서 알려 주려고 왔어.”

“네?”

이제는 뒤에 회장이라는 명칭도 붙이지 않는 명훈에 수한은 황당해하면서도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 인상을 구겼다. 명훈은 수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네 차에 손을 대라고 하더라.”

수한은 이제야 제대로 말귀를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수한에게 해를 가하라고 시켰다는 말이었다. 수한은 제 차를 보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으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해하는 일은 할 수가 없단 말이야.”

아마 수한이 겪은 미래의 명훈이라면 이런 말을 못 했겠지만, 확실히 눈앞에 있는 명훈은 제법 순박한 눈빛을 보였다.

“네가 주도해서 일을 벌인 걸 알게 된 모양이야.”

그 말을 듣게 되자 수한은 이게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어디서 정보를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수한의 주도하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을 남일이 알게 된 것이다.

장준환의 말대로 이전에도 사람을 죽여 본 사람이니 충분히 할 법한 일이었다. 수한만 제거되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거짓된 믿음을 가진 상태였다. 이미 두 번이나 무사히 의혹을 넘겼으니 또 못 할 이유가 없었다.

그와 별개로 수한은 새삼스레 명훈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안 좋은 감정이 서로 복잡하게 있기에 이런 일을 알게 되어도 모른 척할 줄 알았는데 그 정도까지 쓰레기는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이 일은 꼭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보답은 됐어. 아무튼, 당분간은 네 차 말고 택시를 타고 다니는 게 좋겠어.”

“선배님은 어쩌시려고요?”

“일단은 또 무슨 이상한 일 하지 않나 살펴보고 너한테 따로 알려 줄게.”

하긴 명훈에게만 일을 맡길 인사는 아니었다. 수한은 함께 가 주겠다는 명훈의 말에 거절할까 하다가도 혹시 몰라 동행하기로 하였다. 하필 경호원들을 보내 버린 날이라 수한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다.

택시를 잡고 가니 도로가 한산한 게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게 하였다. 물론 저녁 늦은 시간이라 이게 당연했지만, 그래도 사람의 기분이라는 게 그랬다.

수한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보는 명훈을 보며 역시 간신 기질은 어디 안 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이번 일로 사람을 다시 보게 되긴 했네.’

권력을 지닐 일만 없게 하면 채용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수한은 신호 때문에 잠시 멈춘 택시를 본 후 우선 이 상황을 장준환에게 알리기로 하였다. 잘하면 엘 엔터테인먼트를 건드릴 필요도 없이 남일을 골로 보낼 좋은 기회였다.

수한은 곧장 장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남일의 때와 다르게 장준환은 단번에 전화를 받았다.

“조금 전에 알게 된 사실이 있어 바로 전화 드렸습니다. 서남일이 제가 계획한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우리가 만났던 그 식당에서 서남일을 봤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조심하라고 말해 주려고 했어요. 너무 늦은 시각이라 내일 말해 주려고 했는데 잘됐군요.]

“역시 그랬군…….”

“어? 저 차 뭐야?”

택시기사의 의문 섞인 목소리와 함께 수한은 눈앞이 핑 도는 걸 느꼈다. 무언가 세게 진동이 느껴지면서 커다란 고통이 찾아왔다.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눈을 뜨자 피를 흘리는 명훈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마지막으로 수한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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