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12. 끝과 시작
남일은 요즘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장준환이 남일을 다시 받아 줬다는 것에서 기쁨을 얻었지만, 나이수의 뒤통수를 직접 친 것에 대한 싸함 때문에 종종 악몽을 꿨다. 특히나 요즘에는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만든 드라마와 관련해서 이야기가 많이 나와 불안한 감정이 차지하는 지분이 커졌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명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남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도 초조하게 소문에 대한 진상을 살폈다.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수상하게 군 것 때문에 안 그래도 있던 의심의 눈초리가 진해졌다. 물론 아직 주식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표절이라면 문제가 생긴다.
‘물론 표절 인정이 그렇게 쉽지 않겠지만.’
법정으로 가서도 인정받기가 힘든 게 표절이다. 설사 인정한다고 해도 뒤에서 피해자와 잘 합의하면 될 일이다. 그러니 엘 엔터테인먼트에 크게 영향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꺼림칙한 건 장준환이 남일에게 주식을 넘겨준 타이밍이었다.
차라리 마약 사건으로 밑바닥을 쳤을 때 넘겨줬다면 좋았을 텐데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만든 드라마로 한창 주가가 상승 중일 때 넘겼다. 그것도 돈을 다 받아 내고 말이다. 그러고도 모자란 돈은 가온 엔터테인먼트의 주식을 받아갔다.
어떻게 보면 남일에게도 위험할 수 있는 일이나, 남일은 장준환의 밑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을 감수해 내기로 했다.
“대표님. 물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속이 복잡한 남일과 다르게 명훈은 요즘 일이 잘 풀려서 기분이 좋기에 밝은 얼굴로 남일을 대했다. 입안의 혀처럼 굴던 명훈이 이리 눈치 없게 굴고 있으니 여러 가지 의미로 남일은 답답했다.
“혼자 있고 싶으니 이만 나가 보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하며 나가는 명훈의 모습이 싫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아 남일은 결국 성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창 바쁘게 일하는 시간이라서 곧바로 전화를 받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건만 성민은 얼마 안 가서 전화를 받아 남일의 마음을 평안하게 했다.
[네. 무슨 일이세요?]
주변에 누군가 있는지 일부러 주어를 빼먹는 모습에 남일은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목적을 까먹지 않았기에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용건을 말했다.
“요즘 김수한이 손댄 드라마에 대해 많은 말이 오가고 있는데 그에 관해 알아?”
[아! 그 드라마요?]
잠깐의 정적이 흐르더니 시끄러웠던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남일과 통화하기 위해서 자리를 옮긴 게 틀림이 없어 남일은 미소를 지었다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수한이가 이곳저곳에 열심히 다니고 있어요.]
“그럼 표절이 맞는단 말이야?”
[그런 것 같아요. 자기 명예와도 연관된 일이니까 해결해 보려고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엘 엔터와 손발이 안 맞는지 오히려 안 좋게 흘러가서 요즘 안색이 안 좋더라고요.]
애초에 최민희 작가를 썼을 때부터 의심을 해 봤어야 했다. 남일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이런 쪽으로 한번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믿지 않았다.
“김수한은 이 일을 전혀 몰랐고?”
[네.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해서 받아 준 것 같은데 문제가 일어나서 어떻게 할지 몰라 하고 있어요. 잘하면 김수한이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겠어요.]
남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성민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 일을 잘 이용하면 수한에게 물 먹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전에 표절이 확실하다는 게 터지면 이게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겠다는 거다. 소송까지 가서 진다면 큰일이었다.
“법적으로 표절에 속하는지 확인해 봤대?”
[네. 그래서 더 문제인 것 같아요. 이쪽은 표절할 거라 전혀 생각하지 못해서 표절 기준에 대해 잘 몰랐는데 이게 생각보다 더 복잡하더라고요. 그래서 수한이가 불안해하고 있어요. 원작자와 만나서 이야기도 한 모양인데 그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하더라고요. 엘 엔터에서 최초 발언자를 고소하는 바람에 문제가 더 커진 것 같아요.]
남일은 나이수의 성향을 잘 알았기 때문에 쓴웃음을 지었다. 오히려 입막음하려다가 일을 더 키운 꼴이 되었다. 남일은 그보다 자신이 가진 주식의 가치가 풀썩 떨어질까 봐 걱정되었다. 이러면 장준환에게 큰 빚만 지게 된 셈이 아닌가?
‘차라리 지금 팔아 버려?’
그 순간, 장준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일은 제 생각을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온 전화에 일단 성민과의 통화를 그만두기로 했다.
“네! 회장님!”
[요즘 돌아가는 추세를 보고 전화했어요.]
“네. 회장님께서도 알고 계셨군요.”
[김수한. 그 친구를 믿고 서 대표에게 내 주식을 준 건데 이거 참 난감하게 되었네요.]
“지금에라도 팔까 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죠. 오히려 좋은 기회가 찾아왔어요.]
남일은 처음에는 장준환의 말을 못 알아듣다가 곧 전해지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이 기회에 엘 엔터테인먼트를 통째로 먹어 버리면 어떻겠냐는 게 장준환의 계획이었다. 그 계획을 듣기가 무섭게 남일은 강우형이 떠올랐다.
‘그렇지. 이게 바로 회장님이 강우형에게 바라던 거였지.’
강우형의 때만 해도 남일처럼 대놓고 밀어주지는 않았다. 강우형은 장준환의 손을 적게 빌리고 제힘으로 위로 올라가고 싶었던 사람이라 그랬다. 하지만 남일은 달랐다. 제힘으로 올라가는 건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룬 가온만으로도 남일의 능력을 다 썼다고 생각했기에 더 올라갈 좋은 기회라고 하자 눈이 뒤집혔다.
‘엘 엔터테인먼트를 내가 삼킬 수 있다고?’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내면에 있던 무서운 욕망이 치고 올라왔다. 이 일만 제대로 해내면 더는 수한과 경쟁 비슷한 것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더불어 장준환의 신임도 단번에 받아 내니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무조건 제게 맡겨 주십시오!”
[좋아요. 서 대표를 믿죠.]
장준환의 신뢰가 가득한 목소리에 남일은 엘 엔터테인먼트를 잡아먹기 위해 눈을 번뜩였다.
***
“실장님. 그렇게 하셔도 됩니까?”
수한은 막상 자신과 비슷하게 행동하는 성민을 보고 있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위험한 길에 수한을 혼자 내보낼 수 없다는 게 성민의 마음이었다.
“이왕 하는 거 잘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이번 일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수한이 정중하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자 성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마루 엔터테인먼트가 잘되어야 나도 나중에 한자리 차지했을 때 더 기분이 좋지.”
“결국은 부대표를 해도 힘 있는 기획사의 부대표가 되고 싶다는 거죠?”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 정도 욕심이면 대표 자리도 노릴 법한데 성민이 그런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수한이 가장 잘 알았다. 애초에 그런 사람이라면 이미 가온 엔터테인먼트를 한번 엎었을 테니 말이다.
“근데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수한이 시키는 대로 남일에게 말하기는 했지만, 수한이 부분적인 정보만 알려 줬기에 성민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뭐?”
성민이 배신감에 찬 얼굴로 수한을 보자 수한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성민에게 말하기에는 조금 위험한 사안이었다.
“너무 많이 알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일에 네가 들어가 있는 거라고?”
“아…….”
오히려 걱정을 끼치는 말이 되어 버려서 수한이 슬쩍 자리를 피하려고 하자 성민이 수한을 붙들었다. 아무래도 너무 느낌이 안 좋아서 말이다.
“그렇게 제가 걱정되면 회사 일이나 더 열심히 해 주십시오.”
“나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성민의 말에 수한이 자신을 스스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성민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수한이 가장 열심히 일하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무슨 혼자 시간을 뒤엎어서 다시 쓰는 것처럼 이곳저곳 안 다니는 곳이 없다.
“그래서 표절 사건은 어떻게 할 건데? 이건 알려 줄 수 있는 거지?”
“네. 잘 해결될 겁니다.”
“뭐? 그래놓고 저쪽에는 해결 못 해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였단 말이지?”
“하지만 당장 해결될 거라고 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수한이 핸드폰을 들어 한 기사를 보여 주자 성민은 기가 막혔다. 수한이 잘 아는 이서영 기자를 통해 나온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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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희 작가, 과거 표절 논란은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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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내용을 살펴보니 과거 표절작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결과적으로 지금 드라마도 표절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더불어 표절당한 원작자를 인터뷰한 내용까지 덧붙여서 조회 수가 굉장히 잘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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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 작품을 표절했다고 확신합니다. 자세히 비교해서 보여 드리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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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표로 만들어서 비교를 해 왔는데 설정뿐만이 아니라 대사까지 겹쳤다. 처음에 긴가민가했던 사람들도 비교 표와 겹치는 대사를 보고는 이건 표절이 아니면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정도면 표절이 아니라고 판결하는 판사를 이상하게 봐야 할 시점이었다.
“우선은 실장님이 말한 대로 진행되게 해야죠.”
“잠깐만 너…….”
수한의 자신감 넘치는 말은 이 설계의 주인이 수한이라는 걸 제대로 알려 줘서 성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진심으로 수한이 걱정되었다. 그렇지만 이미 배는 떠나갔으니 수한이 목적지에 안전하게 잘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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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고소를 했던 건 잘못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원작자의 심기를 건드려 인터뷰까지 나올 줄 몰랐기에 엘 엔터테인먼트에서도 난리였다. 나이수는 우선 수한에게 전화했다. 수한도 이 상황을 알 테니 수한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제가 직접 만나 봤는데 제 설득으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차라리 그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수한은 나이수가 예상한 대로 정론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 정론을 쓰기 전에 편법을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이미 나이수는 일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주주들의 여론이 나빠졌다. 가만히만 있어도 중간을 갈 것을 나이수가 일을 크게 키웠다는 게 주요 여론이었다.
문제는 여기까지로 그치면 되는데 남일이 적극적으로 주주들을 설득하기 위해 나섰다는 거다. 누가 장준환의 꼭두각시가 아니랄까 봐 엘 엔터테인먼트를 삼키려는 야욕을 대놓고 드러내서 나이수의 심기가 제대로 뒤틀린 상태였다.
‘그래. 지금 표절이고 뭐고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오히려 법정으로 가면 엘 엔터테인먼트가 유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그쪽으로 줄을 댔기에 유리하게 판정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이수가 신경 쓸 곳은 남일이었다.
나이수가 믿는 몇몇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언제까지 나이수를 봐줄지는 알 수 없었다. 한때 강우형에게 넘어간 전적도 있으므로 아무래도 불안했다. 나이수는 일단 표절 문제는 수한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 문제는 김 대표가 알아서 해결하세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수한의 걱정하는 목소리에도 나이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지금은 남일에게만 집중하기로 했다. 남일의 뒤를 캔 결과, 나이수의 예상대로 제법 더러운 일에 손을 많이 담갔다. 털어서 먼지 나오는 사람 없다더니 아주 탈탈 나왔다.
나이수는 그동안 맺어 온 인맥을 통해 남일을 탈탈 털어 내기로 마음먹으며 곧바로 그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