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더 블랙’의 팬클럽을 만들면서 주혁의 팬클럽도 함께 모집했다. 수한은 올라가는 회원 수에 매우 놀랐다. ‘더 블랙’의 상승세를 알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주혁보다 더 많은 팬이 몰려들었다.
‘솔직히 주혁 씨보다 더 많이 모일 줄은 몰랐는데…….’
“네가 자신감 보인 이유가 있었네.”
성민이 수고했다는 듯이 수한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수한은 씩 웃기만 할 뿐 대꾸하지는 않았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성민은 수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고는 미소를 지었다.
‘더 블랙’은 그야말로 초특급 신인이었다. 게다가 ‘더 블랙’의 곡이 아직 음원 순위 10위 권 안에 붙박이처럼 붙어 있었다. 연예인 중에서도 ‘더 블랙’의 안무를 따라 하는 사람도 있었기에 첫 곡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성공했다.
“이태욱 PD에게 고맙다고 해.”
“이미 충분히 하고 왔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까지 알려 줬는데 이 정도면 감사의 인사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 안에 수한의 소속 연예인이 끼어 있는 건 덤이었다.
“예진이 말이야. 케이블만 아니었어도 상 하나 크게 받았을 텐데 아쉽네.”
작품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는 상태였다. 수한의 예상대로 최대 시청률은 20%를 돌파했다. 그것과 별개로 수한도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다.
“공중파에서 방영했으면 구십 퍼센트 대상이죠?”
“그렇지.”
케이블에 다 좋은데 이런 것에서는 아쉬웠다. 예진이 그동안 열심히 연기하긴 했지만, 최대로 받은 상이 최우수 연기상이었다.
“이렇게 되면 다음 작품은 공중파로 가야겠네.”
“그렇죠.”
시청률도 중요하지만, 배우에게 있어서는 상도 중요했다. 누구는 매번 받는 상이라고 지겨워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또 아니었다. 일종의 명예와 관련된 문제였다. 수한은 예진이 예전에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을 때 지었던 표정을 기억했다.
‘그때 울컥했는데 울지는 않았지.’
아마 눈물을 펑펑 쏟아 내게 하려면 대상은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수한은 예진이 마루 엔터테인먼트로 들어온다면 공중파 방송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서 내보내기로 했다.
“팬클럽 모집 후에 팬 미팅 바로 해야겠네요.”
“일단은 규모를 보자고.”
늘어나는 숫자를 보면 대학교 대극장 하나 빌려도 될 것 같았다. 주혁은 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신곡이 나온 후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요즘 엘 엔터테인먼트랑은 이야기 잘 되어 가고 있어?”
“네. 지금쯤이면 대본 리딩 중이겠네요.”
성민은 주연 진이 너무 약하지 않냐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수한이 어련히 하겠지 싶어서였다. 그와 별개로 수한의 부지런함에 또 한 번 놀랐다.
‘언제 저걸 다 하는 거지?’
그 영국 마법 소설에서 나온 시간을 돌리는 시계라도 쓰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수한은 부지런하게 시간을 쪼개서 사용했다.
“저 그럼 잠시 나갔다가 올게요.”
“네. 다녀오세요. 대표님.”
오늘 수한의 일정은 대본 리딩 현장에 들렀다가 소원을 만나는 거였다. 소원과는 한동안 메시지나 이메일로만 연락했기 때문에 섭섭함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오늘은 직접 얼굴을 보기로 했다.
오늘 대본 리딩 현장은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대본이 재미있게 뽑힌 탓이었다. 대본만 읽어도 술술 넘어가는데 이런 드라마가 실패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출연진 머릿속에 콕 박혀 있었다. 수한은 안에 들어가자마자 환영하는 얼굴들에 미안해하면서도 고마운 감정을 가졌다.
“잠깐, 쉬는 시간 가지겠습니다.”
감독과 작가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수한에게 눈짓을 주었다. 두 사람을 위해 따로 마련된 공간이 있으므로 수한은 사람들의 인사를 받은 뒤 두 사람을 따라갔다.
수한은 감독과 더불어 표정이 밝은 작가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연기자들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하긴 출연진들이 약한 편이다 보니 부담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대표님.”
수한은 작가가 열심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덕분에 부담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그 감사 인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닙니다. 이번에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잘 쓸 수 있었으면서 왜 표절을 했습니까.”
이제는 다 지나간 이야기라는 듯이 말하는 감독의 모습에 작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수한은 그런 작가를 향해 괜찮다는 듯이 눈짓을 보냈다.
“그런 실수는 다시는 없을 거예요.”
“네. 당연히 그래야죠. 최민희 작가님. 대표님처럼 마음 좋은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런 기회를 주겠습니까?”
옆에서 허허하고 웃으면서도 은근 물 먹이는 감독의 모습에 최민희 작가는 인상이 잠깐 구겨졌다가 펴졌다. 수한은 그 찰나의 순간을 봤지만, 못 본 척하며 가져온 차를 마셨다.
“우리 드라마 편성은 공중파로 된 거죠?”
“네. 그렇습니다.”
최근은 케이블 화제성이 좋으므로 감독은 내심 케이블 편성이길 바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수한이 처음 이 작품을 제안했을 때 기대하기도 했고. 하지만 수한은 케이블이 아닌 공중파 방송을 따 왔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수목 황금 시간대를 편성 받았으니 그걸로 됐다. 편성 날짜와 시간도 유지아 작가의 작품이 끝나고 몇 주 뒤이니 이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제작비 지원은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오롯이 맡기로 한 거죠?”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께서 이 드라마에 사활을 걸고 계시거든요.”
수한의 말에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서 몸이 뻣뻣이 굳었다. 사활까지 걸었다고 하니 부담이 되는 것이다. 물론 수한이 선택한 작품이니 실패하지는 않겠지만, 알 수 없는 부담감이 자꾸 밀려오니 저절로 긴장되었다. 그건 최민희 작가도 마찬가지였기에 굳은 얼굴이었다.
“두 분 다 끝까지 잘 해내실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한의 위로에 두 사람 다 웃었다. 수한은 더 쉬라고 말한 뒤 다시 대본 리딩 현장으로 건너가 출연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주연을 제외하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연기력은 좋은데 방송가에서 잘 부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번 목표는 이 사람들을 눈에 띄게 하는 거니까.’
특히나 이 중에는 연기력 S급도 있어서 안타까움이 저절로 들었다. 대부분 주연의 삶을 꿈꾸지만, 조연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주연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까다로운 조건을 다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외모와 나이.’
이 중에는 나이도 적지 않게 먹은 사람도 있어서 수한은 그들을 조연의 롤로 살리기 위해서 이 드라마에 캐스팅했다. 물론 그들도 이러한 수한의 생각을 알아서인지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방송가야말로 인맥 사회이므로 한번 길을 뚫어 놓으면 앞으로의 길이 좋았다. 수한이 이들을 위해 해 주는 건 그 길을 뚫어 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수한은 이들 대다수를 드라마가 끝난 뒤 마루 엔터테인먼트로 데려오기도 했으므로 어찌 보면 한 기획사의 대표로서 일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이수 회장에게 한 말을 지켰으면서 안 지킨 것이기도 하지.’
수한은 쉬는 시간이 끝나기 전에 자리를 뜨기로 했다. 수한의 존재감을 보여 줬고, 현장 분위기를 보았으니 여기서 그가 할 일은 끝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 저는 촬영 현장 때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수한은 아쉬워하는 눈길들에도 꿋꿋이 인사한 뒤 바로 출발했다. 시간을 보니 적당한 시간에 나왔다. 소원의 성격이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므로 그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고 싶었다.
수한이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동네였다. 소원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유명한 인사이니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야 했다.
“대표님!”
수한은 안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해맑게 수한을 반기는 소원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날이 가면 갈수록 예뻐진다. 역시 연예인은 다른 종족인가 의심이 될 정도로 소원까지 날이 갈수록 예뻐지니 신기했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카메라 마사지를 받는다고도 표현하지만, 아마 TV에 나가면 조그만 잡티도 크게 보이니 열심히 관리하는 것 같았다.
‘이리 보니 어엿한 연예인이 맞기는 하네.’
“왜 그렇게 보세요?”
“잘 자라 주었다 싶어서요.”
수한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소원은 대놓고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은 절대로 여자로 안 본다는 소리이기도 하니 말이다. 소원은 수한이 자신을 여동생처럼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요즘은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잘 알잖아요.”
하긴 얼굴만 안 봤을 뿐이지, 평소에 연락하고 지내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수한이 안부를 묻는 이유는 하나였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조금 어색하네.’
그동안 일이 너무 많기는 했다. 틈틈이 지훈이 작곡한 곡도 편곡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소원의 곡을 최근에는 많이 만지지 못했다. 소원도 그 사실을 알아서인지 대놓고 칭얼거렸다.
“얼른 마루 엔터테인먼트로 넘어가고 싶어요.”
“그래도 소원 씨는 계약 기간이 조금 남았잖아요.”
“네. 안 그래도 요즘 대표님이 너무 잘해 줘서 탈이에요.”
수한은 무슨 의도에서 그러는 줄 알았기에 씁쓸하게 웃었다. 소원이 마음 약한 걸 알고 그를 이용할 심산이었다. 하긴 그런 사람이니까 연예계 기획사 대표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수한만 해도 제 사람을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영악하게 구는 편이니 말이다.
그래서 수한은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가온에 남아 있을 겁니까?”
“아니요. 이대로 가다가는 제 제자 빼앗기게 생겨서 싫어요.”
지훈을 저격하고 하는 말이었다. 수한은 소원과 지훈, 둘이 곡 하나를 만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괜히 궁금해졌다.
“저도 스승님을 꼭 제 기획사에 모시고 싶네요.”
수한은 대놓고 어리광을 피우는 소원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소원이 가온에 남을 거라 해도 수한은 어떻게서든 소원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남일은 엘 엔터테인먼트만 무너질 거라 생각하겠지만, 수한은 알았다.
‘무너지는 건 가온도 함께여야지.’
더불어 소원은 수한이 살린 사람이었다. 수한은 자신이 소원을 살린 이상 끝까지 소원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가온에는 이제 누가 남아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핵심 중의 핵심을 골라서 빼 가는 것이니 남일의 처지에서는 수한이 도둑놈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강우형의 죽음에 남일이 얽혀 있는 한, 수한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 처분을 달게 받으면 모를까.’
장준환을 통해 오히려 모든 죄를 다 나이수에게 뒤집어씌웠다고 하니 괘씸죄 추가였다. 하지만 수한도 가끔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명훈과 자신의 다른 점이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사람 일이란 정말 알 수가 없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명훈이 남일에게 붙었다고 하니 복수도 겸사겸사할 기회 말이다. 명훈이 비슷한 일을 당했을 때 명훈은 어떻게 반응할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복수가 목적이 아니라고 하지만, 복수할 기회를 굳이 걷어찰 이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