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남일은 장준환이 도착하기도 전에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장준환도 약속을 정하면 일찍 나오는 편이기에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남일의 활기찬 외침에 장준환은 웃으면서 손을 건넸다. 남일은 두 손으로 그 손을 꼭 잡으며 한 번만 살려 달라는 듯이 장준환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요.”
“네! 앉으시죠.”
예전보다 더 깍듯하게 대하는 모습에 장준환은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식사는 장준환이 늘 먹던 정식으로 시켰다. 장준환과 사이가 멀어진 이후로 이곳에 온 적도 오랜만이라 남일은 새삼 오늘의 이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일단 먹고 이야기합시다.”
“네!”
언제 먹어도 이곳 음식은 훌륭했다. 남일은 맛있게 먹으면서도 장준환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이번 마약 사건을 통해 장준환이 어떤 힘을 가진 사람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역시 이 사람한테 쭉 붙어 있어야 해.’
윗사람들에게 그렇게 돈을 뿌려 댄 나이수인데도 마약 사건이 무마가 안 되었다. 비슷한 일을 하더라도 급이 다르다는 것을 남일은 깨닫게 되었다. 그런 남일과 별개로 장준환은 남일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며 앞에 있는 음식에 집중했다.
남일은 장준환의 저런 여유로움이 부러웠다. 힘을 가진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로움이었다. 남일은 강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강우형이 미웠다. 장준환이 남일의 손을 놓지만 않았다면 강자가 충분히 됐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보니 서 대표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그렇습니까? 회장님이야말로 어떻게 그렇게 관리를 잘하시는 모르겠습니다. 저도 나이가 든다면 회장님처럼 나이를 먹고 싶습니다.”
아부가 잔뜩 들어가 있는 남일의 말에 장준환은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찰나의 눈빛은 싸늘했다. 오늘 남일이 무슨 말을 하는지에 따라 남일의 미래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눈빛을 남일은 보지 못했다.
“요즘 다시 가수 쪽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아예 가수 쪽은 자회사를 따로 두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장준환은 앞에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미소를 지었다. 그 자회사 대표를 장준환이 모를 리가 없었다. 장준환이 크게 키우려는 수한과 연관된 사람이니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그 사람과 엮이면 묘하게 감정적이란 말이지.’
수한을 버릴 생각은 없지만, 남일이 변했듯 수한도 모를 일이 아닌가? 장준환은 사람을 믿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믿지 않았다. 오롯이 그가 가진 돈만 믿었다.
그 점 때문에 강우형은 장준환의 밑에 있으면서도 그 밑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권력을 누린다고 해도 그게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강우형이 살아 있었다면 나이수에게서 엘 엔터테인먼트를 빼앗은 뒤 장준환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물론 장준환이 그를 모를 리가 없었지만, 이미 강우형에게서도 잡아 놓은 약점이 있으므로 강우형이 그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뭐, 이런 생각들도 다 소용없어졌지만.’
그 강우형은 이미 죽고 없으니 말이다.
“잘되길 바랄게요.”
“네! 성과를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장준환이 다시 남일의 손을 잡아 준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남일은 일부러 더 강조했다. 장준환은 재미있다는 듯이 남일을 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근데 왜 술은 드시지 않고…….”
장준환이 술을 즐겨 마신다는 것을 알기에 남일은 의아해하며 장준환을 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이유를 알았다. 장준환이 오늘 남일을 만난 건 기존에 있던 친분 때문이 아니었다. 남일이 거래를 하자고 해서 그거래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온 거였다.
남일은 이상하게 입이 바짝 말라 왔다. 이미 무슨 말을 할 건지 정해 왔는데도 긴장이 되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가온 엔터테인먼트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해서였다.
“우선, 제가 어떻게 이 일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일의 차분한 목소리에 장준환이 어서 말해 보라는 듯이 턱짓을 했다.
“일단 강우형 이사를 죽인 건 나이수 회장이 맞습니다. 그리고 저는 평소 나이수 회장과 친분을 쌓아 둔 상태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함께 술자리를 했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장준환은 이야기를 쭉 들었다. 그러니까 술에 취한 나이수가 술김에 모든 것을 말했다는 거다. 남일은 혹시 몰라 그 내용을 녹음했고, 남일은 다음 날 이 사실을 나이수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요?”
“저는 그걸로 나이수 회장을 협박했고, 나이수 회장에게서 많은 것을 받아 냈습니다.”
장준환은 이야기를 마저 듣고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엘 엔터테인먼트로부터 받아 낸 것을 이야기하는데 이상하게 그 말이 모두 공허하게 들려왔다. 당연했다. 그 말이 모두 거짓이기 때문이다.
‘배우 전문 기획사가 아이돌을 키우는 노하우를 받아 냈다고?’
말로는 엠디 엔터테인먼트가 그 노하우를 제대로 받아서 연습생들을 키워 내고 있다고는 하는데 장준환은 수한 때문에라도 엠디 엔터테인먼트를 잘 알았다. ‘SSS급 슈퍼스타 시즌 7’은 우연히 잘나가게 된 것이지, 그건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받은 노하우에서 만들어진 성과가 아니었다.
‘그건 케이블에서 혹시 몰라 발생할지 모를 일을 대비한 거였지.’
제보자를 공범으로 만드는 수법이었다. 그런데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남일의 모습에 장준환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게다가 말이지.’
드라마 투자라니 그걸 어떻게 얻어 낸 거라 할 수 있을까? 드라마가 성공했다면 모를까 결국에는 망한 드라마에서 가온이 얻어 낸 게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수한이 참여한 프로젝트라고 해서 믿고 참여했다고 말했지만, 장준환은 남일이 자신을 바보로 보는 건가 의심하게 되었다.
‘둘 사이가 얼마나 나쁜지 업계 사람이 다 아는데 내가 그걸 모를까 봐?’
하지만 아는 것을 모른 척했다. 남일이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남일은 외워 온 것처럼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현혹될 만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 앞에서 사기를 치려고 하다니 멀었구먼.’
돈 앞에서는 누구보다 냉정한 장준환이었다. 그가 달리 돈을 모은 게 아니었다. 그의 앞에서 날고 긴다는 사기꾼들이 이런 식으로 입을 털었다. 남일은 그 사기꾼 중에서도 최하위였다.
“그래서 그 녹음 파일은 어떻게 했죠?”
“삭제하는 조건으로 받아 낸 것이기에 지금은 지우고 없습니다.”
그 말로 장준환은 남일이 한 모든 말이 거짓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수한이 불안하게 느낄 만한 요소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정말 너무 멍청해서 상대할 가치도 없군.’
누가 그런 중요한 약점을 지니고도 그걸 포기한단 말인가? 다른 것도 아니고, 저런 쓸모없는 것들을 받아서 포기하기에는 너무 큰 약점이었다.
장준환은 새삼 남일의 손을 놓기로 했던 제 안목에 감탄했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날카로운 감은 살아 있었다. 강우형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남일은 그가 버렸어야 할 패였다. 이제는 인재도 무엇도 아닌 일개 사기꾼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장준환은 나무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숲을 보는 사람이었다.
“좋아요. 그 말 믿어 주죠. 나중에 법정에 가서도 진술할 수 있나요?”
“물론이죠.”
남일의 밝아진 얼굴에 장준환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술을 주문했다. 제대로 된 답이 나왔으니 술을 마셔도 이제는 상관이 없었다. 장준환은 술을 한 모금 마시려다가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죽인 이유는 무엇이랍니까?”
“회장님과 강우형 이사가 엘 엔터테인먼트를 먹으려고 했던 속셈을 알게 되어서였습니다.”
아마 그 사실을 알려 준 건 남일일 거다.
“그래서 제게 뒤집어씌우기로 마음먹은 거군요.”
“네. 나이수 회장이 어리석게도 회장님의 힘을 과소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남일도 마찬가지였던지라 술이 유난히 쓰게 느껴졌다. 하기야 장준환은 뒤에서 권력을 움직이는 사람이지, 앞에서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 힘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모른다면 모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고작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이다니 할 말이 없군요.”
“잘은 모르겠지만, 나이수 회장에게 엘 엔터테인먼트는 인생의 전부니까요.”
잘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남일은 나이수의 사고방식을 완벽히 이해했다. 장준환은 아닌 척 말하는 남일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너처럼 말이지?’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장준환은 미소를 지으며 남일이 따라 주는 술을 마셨다. 이상하게 수한과 마셨던 술과 다르게 이번 술은 달면서도 씁쓸하여 기분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
“그렇게 되었군요. 알겠습니다.”
수한은 장준환의 전화를 받은 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일이 싫긴 해도 이런 일에까지는 얽히지 않았던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도 덕분에 죄책감은 없겠네.’
남일의 입으로 나이수가 한 짓이라고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모든 일이 잘되어 가고 있지만, 이런 일 때문에 한편으로는 공허하기도 했다. 성공하면 뭐 하나 싶은 것이다. 그러나 곧 수한은 지훈이 선물한 만년필을 보고는 그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 이런 사소한 감동 하나로 기획사를 세우기로 한 거지.’
수한은 초심을 잃었지만, 자신의 연예인들에게 있어서는 초심을 잃지 않기로 했다. 수한, 자신은 갑질을 당해도 자신의 연예인들이 갑질을 당하는 꼴은 결코 볼 수 없었다.
수한은 서류를 다 검토한 뒤 그의 기준에 통과하는 거만 왼쪽에 두었다. 나머지는 다 반려였다. 부하 직원들 시점에서 볼 때 수한은 좋은 대표이긴 해도 좋은 상사는 아니었다. 완벽주의자 상사는 아랫사람들을 피곤하게 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들어오라고 말하니 성민이 신난 얼굴로 들어왔다. 수한은 무슨 좋은 일이 있나 싶어서 성민을 봤다가 곧 하는 말에 미소를 지었다.
“우리 대표님이 확실히 능력은 있어. 이태욱 PD 예능에 건우 들어간다는 기사 벌써 떴더라.”
“그래요?”
“그래. 홍보팀 돌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떴더라고.”
그렇다는 말은 케이블 방송사에서 직접 냈다는 말이었다. 그에 관한 반응을 보니 반반이었다. 신인인데 예능은 무리가 아니냐는 반응과 잘할 거라는 호감이 가득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아직 안티 팬이 붙지 않았나 봐요.”
“과연 안 붙었을까?”
성민이 최근 댓글 순서대로 보여 주자 악의가 가득한 댓글들이 보였다. 수한은 순간 건우가 뭘 잘못한 게 있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게 뭐가 있겠어. 라이징이니까 거슬리는 거지. 아이돌 쪽은 뜰 것 같으면 이런 견제가 있는 것 같더라고. 엘 엔터 출신 애들한테 들어보니까 이런 일은 흔하다고 오히려 좋은 징조라고 하더라.”
수한은 새삼 신세계를 보는 기분이었다. 수한 역시 과거에서 돌아오기 전 배우만 주로 담당했기에 아이돌 쪽은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럼 소원 씨도 그랬겠네요?”
“그랬지. 그래도 한소원이는 솔로 가수니까 이렇게 대놓고 견제하지는 않았지. 다만 눈에 하나라도 거슬리는 게 있어 봐라. 도끼 눈을 뜨고 지켜봤지.”
수한은 인기 뒤에 감춰진 그림자에 소름이 돋으면서 역시 댓글 같은 건 함부로 보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신과 의사도 잘 섭외된 거죠?”
“응. 이쪽 전문으로 잘 구했어.”
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우울증에 걸리기 쉬우므로 꾸준한 관리가 필요했다. 수한의 그 세심한 배려에 성민이 기특하다고 쳐다보자 수한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어디 회사 대표를 그렇게 자식 보듯이 봅니까? 자식도 없는 양반이.”
“뭐?”
성민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해졌다. 실제 그의 친구들은 이미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성민의 슬픈 표정에 수한은 주변에 아는 사람이라도 소개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웃긴 건 수한 또한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거다.
“우리 좀 여유가 생기면 연애든 뭐든 꼭 해 봅시다.”
수한의 말에 성민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안에서는 작은 적막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