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수한은 앞에 있는 술잔을 채우며 장준환을 보았다. 장준환은 음미하듯이 술을 마시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수한은 조금 전에 들은 내용을 상기하며 물었다.
“서남일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고요?”
“그래요.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하더군요.”
수한은 남일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았다. 남일이 붙었던 엘 엔터테인먼트의 추세가 확 꺾였기 때문이다. 얻어먹을 게 없어졌을 테니 아쉬워서 장준환을 찾는 거였다.
“무언가를 내걸고 도움을 청한 거겠네요?”
“네. 정확해요. 강우형, 그 친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려 주겠다고 하네요.”
장준환은 씁쓸하게 웃었다. 수한도 입안이 써져 앞에 있는 술을 단번에 마셨다. 달짝지근한 술을 마셨는데도 입안이 쓴 건 수한의 마음이 써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하셨습니까?”
“일단은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볼까 해요.”
수한이 불안하게 장준환을 쳐다보자 장준환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수한의 그런 걱정이 헛된 거라는 걸 말해 주는 것처럼 섬뜩하게 눈을 빛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제안이 달갑지는 않아요.”
수한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왜 그러는지 이해했다. 애초에 남일이 강우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 말은 본인이 공범이라는 걸 말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아니면 술김에 말해 준 걸지도 모르겠지만.’
과연 남일이 이 일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수한은 그 의문부터 들었다. 솔직히 수한이 처음부터 의심한 사람이 남일이 아닌가? 수한의 그 생각을 다 아는 것처럼 장준환은 술 한 모금을 다시 마시고 말했다.
“그래서 일단 만나 보겠다고 한 거예요.”
“만약 관련이 없다면 그 손, 잡아 주실 건가요?”
“보답은 해야겠죠.”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수한은 알았다. 보답이 끝이라는 것을. 장준환의 생각을 알고 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물론 장준환을 혼자 독차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미 장준환은 수한 말고도 후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인재 욕심이 많은 탓이었다.
‘그래서 검찰 쪽 인맥도 있는 건가?’
수한은 순간 든 생각을 애써 머릿속에 지워 냈다. 장준환의 힘을 알면 알수록 두려움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수한은 그래서 일부러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장준환을 적으로 돌리면 생각해 둬야 할 일이지만, 장준환은 현재 수한의 적이 아니었다.
“만약 관련이 있다면요?”
“글쎄요. 그거에 관해서는 고민 중이랍니다.”
수한은 미소를 지었다. 좋은 생각이 있다는 듯이 웃는 수한의 모습에 장준환은 의아해하다가 수한의 제안을 듣고는 곧 웃어 버렸다.
“좋네요. 그렇게 해 보죠. 그럼 그 전에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네요.”
“네. 저 또한 해야 할 일이 있고요.”
“복수가 목적이 아니라고 하더니 과연 그 말이 맞는지 의문이 들게 하는 계획이네요.”
“복수는 겸사겸사하는 거지, 절대로 목표가 아닙니다.”
수한의 능청스러운 말에 장준환이 웃으면서 다시 술을 건넸다. 이번 술맛은 쓰기보다는 단맛이 더 입에 돌았다.
***
요즘 엘 엔터테인먼트의 사내 분위기는 낮다 못해 최악이었다. 회사에 가도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특히 윗사람들의 살벌한 눈빛에 불똥이 튀는 걸 막기 위해 직원들은 열심히 자기 일만 했다.
“이것들이 미쳤나?”
상사의 열 받은 목소리에 고개를 바짝 숙인 직원들은 상사가 무엇 때문에 열 받은 건지 사태파악부터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최근 낸 걸그룹의 성과 때문이었다. 다른 앨범 때보다 더 특별히 대중의 반응이 너무 싸늘해 괜히 내보냈나 싶어 마음이 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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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바보인 줄 아나 봄
ㄴ솔직히 얘네 잘못은 아니지 않음?
ㄴ혹시 모르지. 이 중에도 마약 한 애 있을 수도 있잖아
ㄴ또 선 넘는 애 나왔다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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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 다 악플러로 고소해야 한다고 뭐라 뭐라 하는데 듣는 직원들도 할 말이 많았다. 솔직히 이번 활동을 반대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하라고 밀어붙이는데 반대의 소리가 클 수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해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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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가 우리 회사 망하는 거 아니겠지?]
[부자도 3대는 간다고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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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핸드폰으로 서로 글을 옮기면서 안 좋은 분위기가 더 퍼졌다. 회사 분위기가 안 좋으니 가장 난감해진 건 회사의 맨 위 수장인 나이수였다.
나이수는 최근 성적을 보고는 골머리가 아파졌다.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었다.
“음원 순위도 좋은 편은 아닙니다.”
나이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대중성 하면 걸그룹이었다. 그런데 그게 안 통하니 충격이긴 했다. 하지만 나이수도 사실 이 결과를 예상하기는 했다. 과정을 자세히 파고들면 결과가 예측되었다. 그동안 열심히 준비했던 기간에 비해 이번 앨범은 그 주기가 너무 짧았다. 특히나 곡이 대중성을 벗어났다.
걸그룹 하면 대중성인 이유는 음악이 듣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멜로디가 쉬우면서도 중독성이 있는 음악, 이런 곡이 대체로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곡은 수록곡으로 보냈어야 할 곡을 타이틀로 했으니 마약 사건을 무시한다고 해도 대중에게 통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미치겠군.’
나이수는 이번에 주가가 폭락하면서 주주들의 항의를 매일 받는 중이었다. 당연히 그를 무마하기 위해서 열심히 뛰었지만, 짜기라도 한 것처럼 윗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돈 들인 게 얼마인데 이렇게 외면할 줄 몰랐기에 나이수도 충격이었다.
‘장준환.’
나이수는 조용히 이를 갈았다. 주가가 내려가면서 장준환이 다량으로 주식을 사들였다. 나이수는 그 양을 떠올리고는 큰 위협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경영진에서 완전히 쫓겨나게 생겼다.
‘이대로 가서는 절대 안 돼.’
새로운 경영자를 기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나이수는 열심히 고민했다. 어딘가 이 위기를 타개할 틈이 있기는 할 거다. 그 순간, 한 인물이 떠올랐다.
‘김수한!’
나이수는 최대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조금 냉정하게 상황 파악이 되기는 했다. 어차피 마약 사건은 아직 대한민국에는 익숙지 않은 사건이다. 그래서 욕하는 대중도 아이돌의 열애설만큼이나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역시 김수한이야.’
나이수는 당장 수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한이 이미 안 된다고 한번 거절했지만, 이번에는 어떻게서든 수한에게 매달려야 했다. 나이수는 얼마 안 가서 전화를 받는 수한의 모습에 살짝 안도하며 용건을 말했다.
[지금 회사 일로 바쁜데 제가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원하는 게 뭡니까?”
나이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만큼 마음이 급해서 말이 막 나오게 되었다. 원래 사업하는 사람은 마음이 급하더라도 그걸 드러내서는 안 되는데 나이수는 이미 장준환이 발밑까지 쫓아온 걸 알았기에 굉장히 불안해했다.
[제가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데리고 오고 싶은 연예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쪽으로 넘어올 때 그냥 무사히 넘어오게만 해 주십시오.]
수한의 말에 나이수는 정신이 다 아찔했다. 수한이 엘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을 만나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흘러가면서 듣긴 했다. 하지만 그 말을 직접 꺼낼 줄 몰랐다. 나이수는 대답하지 않고 신중하게 고민했다.
‘만난 사람이 누구누구랬지?’
나이수는 떠오르는 얼굴들에 쓰게 웃었다. 웃긴 건 남자 아이돌은 데려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자 아이돌 중에도 나중에 솔로로 기대하는 멤버도 있기에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 어차피 그때가 되면 여자 연습생들을 데뷔시킬 거니까.’
솔직히 아이돌들의 능력보다는 엘 엔터테인먼트 자체에서 키운 게 크다고 나이수는 생각했다. 그래서 결론이 빨리 나오게 되었다.
“좋습니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넘겨드리죠.”
[네. 그거면 됩니다. 그럼 조만간 엘 엔터테인먼트에 들르겠습니다.]
나이수는 치욕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장준환에게 밀려 경영진에서 쫓겨나는 것보다 소속 연예인 몇 명을 버리는 게 더 나았다. 아무리 평소에 친근하게 지냈다고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연예인 모두가 회사의 상품이 되어 버렸다.
나중에 그 소식을 수한에게 들은 여자 아이돌들은 하나같이 씁쓸해했지만, 그래도 요즘 잘나가는 기획사와 함께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떴다.
***
남일은 앞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성민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지난번 일은 미안했다며 밥을 살 테니 나오라고 하여 남일은 나가게 되었다. 장준환과의 약속은 이번 주 주말이므로 남일은 밥을 먹다가도 장준환을 떠올리면 긴장하게 되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런 남일과 다르게 맛있게 밥을 먹는 성민이 약 올랐지만, 아직은 제 편이라 믿고 있기에 그런 생각은 저버리기로 했다.
“그래서 요즘 거기 상황은 어때?”
“김수한이가 능력자는 능력자더라고요. 어디서 일을 그렇게 따 오는지. 바로 망할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남일도 말로 뱉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수한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특히 이번에 데뷔한 신인 ‘더 블랙’이 심상치 않았다. 가온이 아무리 배우 중심 기획사라고 해도 업계 소문에 둔한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남자 아이돌을 키울 생각을 예전에 하긴 했는데…….’
너무 까마득한 예전 일이라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아마 주혁의 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기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이돌 그룹 하나를 데뷔시켰을지도 모른다.
“걔들은 잘해? 그 블랙인가 뭔가.”
남일의 말에 성민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누가 봐도 ‘더 블랙’을 잘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하는 화법이라서 웃겼다.
“다른 건 몰라도 춤 하나만큼은 잘 춰요. 나중에 가온으로 갈 때 데려가려고 포섭 중이에요.”
“그래?”
남일의 탐욕스러운 얼굴에 성민은 예전에 알던 사람은 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을 자신에게 맡겨 준 수한에게 고마운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지는 않네.’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면 남일이 얼마나 화를 낼지 예상은 되었지만, 성민은 그래도 자신이 직접 이 광경을 목격해서 다행이라 여겼다.
“그래서 최명훈은 잘해요?”
“다른 기획사 가서 잘 배워 온 모양이야. 잘하더라고.”
얼마나 잘하는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서 성민은 동현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최악도 그런 최악은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왕 이직한 거 최선을 다해 보려고 했지만, 벽창호라고 한다. 남일은 들어 볼 여지라도 있지, 그곳은 그것조차 없었다고 하여 성민은 왜 이 업계는 이런 사람들밖에 없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재성 PD가 새 프로그램에 들어간다고 하던데 그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어요?”
“섭외 요청이 있긴 했는데 잘될까 싶어.”
‘SSS급 슈퍼스타 시즌 7’이 잘 마무리되긴 했으나, 또 그 PD와 손잡는 건 꺼림칙했다. 게다가 가온에서 딱히 키우는 아이돌 연습생이 없어서 내보내기도 뭐했다. 굳이 쓰자면 또 엠디 엔터테인먼트에 속해 있는 연습생을 내보내야 하는데 그건 또 그랬다.
“그래도 수한이가 그 프로그램 성공할 것 같다고 말하던데요.”
“뭐? 김수한이?”
“네. 저희야 연습생이 없어서 못 내보내는데 지금에라도 연습생을 구해 볼까 고민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게 되겠어요? 김수한처럼 까다로운 놈 기준에 맞추려면 얼마나 재능이 있어야 하는데.”
성민은 순간적으로 흔들린 남일의 눈동자를 봐 버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남일이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을 알아채고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